사람들이 자신을 희생할 때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는 듯하다. 대의를 위해, 아니면 말로 할 수 없는 더 큰 말을 위해.
몸에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을 가하거나 산소 공급을 스스로 막는 사람들은 가족들이, 혹은 사회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 대해 말로는 안되니까 더 큰 언어, 즉 행동으로 항변하는 것이다. 학생들이 성적을 비관하는 것도, 이것도 저것도 대개의 자살이란 이렇게 언어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또 안중근(0815), 이봉창(1240) 같은 이들이 죽음 앞에서 떳떳이 뜻을 굽히지 않는 것은 자신들의 죽음으로 뭔가 더 큰 말을 할 수 있으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조국이, 동포들이 그 말에 귀를 기울여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식을 들은 조국의 청년들이 독립운동에 많이 투신하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 크리스트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내가 좀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헛소리했소, 하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는데, 그는 무슨 생각으로 십자가를 지고 죽기를 자처했을까? 그것도 동족인 유태인들로부터 배반당하고, 적 로마 총독의 손에 죽는 모진 결과를 스스로 원했을까? 그의 죽음도 언어였을까.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죽음도 무섭지 않다는 것 아닐까.
그 믿음이란 유태인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로마를 위한 것인가?
그보다 더 큰 인류를 위한 것인가? 아마 이 모두가 예수의 뜻과는 상관이 없을 것이다.
예수는 진리를 믿고, 그 진리는 죽음으로 꺾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을 버렸던 듯하다.
가끔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이들이 있다. 헛된 미신이 아니라 분명한 믿음을 지키려 목숨을 버린 이들이 있다.
지오다노 부르노(0810) 신부는 자신의 신앙이 아니라 지구는 태양을 돈다는 이 평범한 물리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렸다. 부인하기만 하면 살 수 있는데, 갈릴레오 갈릴레이(1210)처럼 살 수 있는데 그는 거부하고 죽음을 선택했다.
우리가 아는 안중근 의사는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이 아니라 조국을 위해 바쳤다. 유형이 다르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부모의 마음과 비슷하다.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마음은 인간이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본능이다.
그런데 자신이 아는 진실이나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범인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예수는 죽음으로도 꺾이지 않는 진리를 쥐고 있었다. 지오다노 부르노 신부처럼 작은 신념 하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경우도 있다. 불교에도 진리를 지키기 위해 희생한 스님들이 여럿 있다.
오늘 크리스마스를 맞아 물어본다.
죽을만큼 힘들어도 지킬 수 있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
그 신앙이 2009년이 지나도, 어떤 과학이나 문명에도 변하지 않을 진리인가.
그런 크리스찬이어야만 예수 크리스트의 탄생을 축하할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
예수가 겪은 그 고난을 그대로 견디면서도 신앙을 지킬 수 있는가 자문하여 "예!" 하는 답이 씩씩하게 나와야만 진정한 크리스찬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그런 크리스찬을 여럿 보았다. 또 그렇지 않은 크리스찬은 더 많이 보았다.
물질만능시대를 열어, 남보다 더 잘 사는 목표를 이루어낸,
'귀족 기독교인'들이 지배하는 대한민국에서 감히 물어본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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