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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태양/허신행을 읽다

남편에서 아내로 이동

남편에서 아내로 이동

 

오랜 기간 가부장제家父長制 사회를 이루어온 우리나라에 오늘날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가장인 남편이 절대적인 가장권을 쥐고 배타적이면서 종신에 가까운 권한으로 가족을 통솔해나왔는데, 이 권위가 지금 무너지고 있다.

 

1994년 4월 18일 이전에는 볼 수도 상상마저 할 수도 없는 성性희롱에 대한 3천만 원의 첫 배상판결이 서울민사지법에서 일어났다. 그것도 서울대학교의 조교인 제자(禹모 씨·26·여)가 스승(申모 씨·53·남)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이었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깜짝 놀랐고, 기성세대의 남자들은 이 사건을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 배상판결은 놀랄 일이 아니며 우연도 아니다. 앞으로 숱하게 벌어질 수 있는 여성세력의 발돋움일 뿐이다.

 

1994년 5월 모 방송국 특집 취재 프로그램에서 역시 기존의 관념으로는 충격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었다. 남편들이 아내의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듣는 사람의 귀를 의심할 정도의 하소연이 얼굴을 가린 남자들로부터 봇물 터지듯이 나왔다. 여자들이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있어왔기에 종종 사회문제로 등장되곤 하지만(그것도 주로 선진국에서), 그 반대의 경우는 별로 들어본 적조차 없다. 그러나 이 문제도 기승하는 여성세력의 일단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기 힘들다.

 

미국에서는 여성세력이 1970년대부터 우후죽순처럼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다. 날로 향상되는 사회적 구조와 여성의 여가선용에 따른 창의력의 축적, 여성에 대한 고용기회의 확대 등에 힘입어 미국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점차 높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여성의 지위향상을 위한 다양한 사회조직과 각종 자원봉사 단체들이 생겨나면서 여성의 사회참여 기회를 늘려주었다.

여성세력이 확장됨에 따라 이혼율이 점차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미국에서는 젊은 부부 두 쌍마다 한 쌍 정도가 이혼경험을 가진다고 한다. 더욱이 그에 따른 사회적 문제가, 특히 자녀양육에 대한 문제가 심각하지만 지금으로선 어쩔 도리가 없다. 남성들의 동성연애와 그로부터 파생된 후천성면역결핍증(AIDS)도 따지고 보면 여성세력의 부상에 그 원인이 있다고도 보겠다.

대도시를 운행하는 택시 기사들에게 손님들의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택시 기사들의 한결같은 대답은, 요즘 부인들의 가정에서 득의만만한 득세와 남편들의 나약성을 꼬집는 말이었다. 남 보기에 안됐을 정도의 저자세로 부인의 눈치를 살피는 남편들이 많더라는 이야기이다.

고려병원의 신경정신과 의사인 이시형 씨는 1993년에 찾아온 외래환자 1,460명 가운데 881명을 대상으로 조사해본 결과, 20·30대의 젊은 남편들이 정신적·신체적으로 나약해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장년에 비해서도 젊은 남편들이 더 많이 무너져가고 있다고 한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의 곽배희 씨는 1993년 상담에 응한 9만 2,498건을 토대로 분석한 결과 한국 가족의 부부관계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남성학 에세이》를 출간한 치과의사 박규진 씨는 “마마보이, 봉처가奉妻家, 기죽은 아버지만 늘어날 뿐 이땅에서 남성은 없어진 지 이미 오래다. 지금은 남성 위기의 시대다”라고 아예 비감한 선언을 할 정도이다. 어려서는 엄마의 치마폭에 파묻혀 살고, 결혼해서는 아내의 눈치나 보다가 늙어서는 데릴사위를 얻거나 시집 간 딸을 따르는 신삼종지도新三從之道의 모습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있어서 흥미롭다.

 

가정의 세력이 남편으로부터 아내로 이동하고 젊은 20·30대의 경우에 남성의 위기론까지 대두되고 있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 게 마련이다. 젊은 세대들의 성장과정에도 문제가 있지만, 그렇다고 여성만을 따로 강하게 키운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 근본적인 원인은 다른 데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세력의 원천, 그 가운데에서도 지식과 정보 그리고 창의력의 흐름이라는 측면에서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직장이 있는 남성보다 여성들에게 아무래도 더 많은 여가선용의 기회가 주어진다. 여성들에게 상대적으로 시간이 더 많다는 이야기이다. 대부분의 주부들이 가사를 돌보지만 문명의 이기가 많고 가공식품이 다양하게 개발되며, 의류 같은 것들은 거의 모두 구매하기 때문에 옛날과 달리 그들에게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다.

 

남편들이 일에 쫓기듯 서둘러 출근하고 나면 주부들은 아침시간을 매우 값지게 보내는 경우가 많다. 영어를 조금만 알아듣는 여성이면 아침 6시부터 9시까지 계속 이어지는 외국방송을 통해 전 세계의 뉴스를 샅샅이 보고 들을 수 있다. 이어서 국내방송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요리강의는 물론 다양한 사회문제의 토의내용을 알차게 배운다.

오전 10시 30분에서 11시쯤 되면 많은 주부여성들이 간단한 화장을 하고 점심 약속장소로 향한다. 동창모임과 학부형모임, 남편 직장의 부인모임, 기타 여러 가지 인연에 따라 갖는 모임이 많은 경우이면 거의 매일 나갈 수도 있다. 점심시간이 통상 길어지기 일쑤이다. 그 만한 이유가 있다. 점심시간에 만난 10여 명의 동료 주부여성들과 함께 교환하는 지식과 정보의 분량은 엄청나다.

 

가전제품의 종류와 품질 및 성능 그리고 값에 관한 정보는 물론이고 고장수리에 따른 경험담까지 쏟아내려면 엄청난 시간을 요한다. 거기에다가 자녀들의 학교교육과 과외수업에 관한 정보, 가정교육과 사회활동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비롯하여 자녀의 군대문제, 이성 간의 교제문제, 혼인문제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정보가 터져나온다.

 

군대나 대학에 보낸 아들의 있지도 않은 사고를 빙자하여 돈을 뜯어내는 사기한들에 대한 예방법에서부터 건강비결과 가산家産의 증식방법 등에 이르기까지 숱한 내용의 값진 정보들이 끝없이 교환된다. 주부모임의 토론내용을 식당에서 우연히 듣고 있노라면 공무원이나 회사직원들의 연수원 분임토의와 같다. 그 진지성과 알찬 내용으로 보아서 몇 갑절 더 유익한 경우도 보았다. 그런 면에서 부인들의 토의내용은 매우 생산적이다. 옛날 부인들처럼 한 자리에 모이면 시어머니와 남편들의 흉허물을 보던 그런 시대는 지난 지 오래되었다.

 

오후에 집에 돌아오면 여성들은 나머지 여가를 독서로 보내는 경우가 많다. 요즈음 출판물들이 홍수처럼 쏟아지고, 그 가운데 읽을 만한 값진 책들이 많다. 최소한 베스트 셀러로 불리는 책만이라도 읽지 않으면 주부들의 각종 모임에서 화제 속에 끼어들지 못하기 때문에 필독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저녁이면 밖에 나갔던 자녀와 남편이 돌아오면서 새로운 추가 정보를 얻게 된다. 아들과 딸의 세계는 물론이고 남편의 세계까지 거울 들여다보듯 훤하게 꿰뚫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주부들이다.

 

미혼 여성들도 마찬가지이다. 남성에 비해서 비교적 더 꼼꼼하고 성실하여 매사에 열심이다. 여성들은 남성에 비하여 일반적으로 더 긍정적이고 수용적이다. 여성들은 취직하는 경우가 많지 않고, 경제적인 여유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유를 많이 누리고 있기 때문에 지식을 쌓는 데 더 용이하다. 친구들과의 수평적 유대가 강해서 정보교환의 폭이 넓다.

그에 비해서 남성들은 대개의 경우 자기가 하는 일에만 전념하는 데다가 층층의 조직사회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많으며, 사회적 출세와 가사분담이라는 정신적 부담이 누적되어 다양한 지식의 흡수가 용이하지 않다. 따라서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많은 지식과 정보에 접할 수밖에 없다. 물론 모든 여성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남성들은 하나의 일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여성들에 비해서 보고 듣는 세계가 좁아지기 쉽다.

 

과거 농경사회나 봉건주의사회 하에서는 지식과 정보의 생산 내지 공급이 매우 한정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주로 정보를 집 밖에서 습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여성들은 접근하기조차 어려웠다. 따라서 세력은 자연히 남편들에게로 쏠릴 수밖에 없었다. 여성들은 하루종일 육체적 노동을 해도 못 다한 산더미 같은 가사일과 외부세계와 연결시켜줄 수 있는, 오늘날과 같은 TV나 라디오, 컴퓨터, 책 등이 없었기 때문에 세상 돌아가는 물정을 모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세력의 원천인 지식과 정보가 남성보다는 여성들에게 더 많이 공급되고 있어서 알게 모르게 가정의 세력은 주부들에게로 이동하고 있다. 가정의 권력이란 가전제품이나 가구, 자동차, 기타 필수품들을 구입하는 결정권과 자녀들의 교육에 따른 결정권, 가족의 건강관리에 대한 영향력, 부동산을 중심으로 한 재테크와 관련된 결정권 등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가운데 부동산 투기를 비롯한 재테크에 관한 행위에서 여성들이 막강한 권력을 발휘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학자나 고급 관료, 언론인, 정치인, 예술인 등 지식인 계층으로 올라갈수록 재산을 관리하는 여성들의 권력은 막강하다. 이들이 재테크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 틈을 이용해 주부들은 다양한 정보와 주변의 경험들을 살려 남편 월급의 수십 배가 넘는 돈을 쉽게 벌어들이는 사례들이 허다하다. 이런 경우, 남편들이 부인들에게 재산관리를 맡기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어떤 주말부부의 가정에서 꽤 높은 관리직에 있는 남편이 지방으로 발령을 받아 내려가게 되었다. 평소 남편이 워낙 보수적인 데다 검소하여 가족의 옷 한벌, 신 한켤레를 선뜻 못 사게 했다. 남편이 지방으로 내려간 틈을 타 어느날 부인이 자녀들과 상의해서 승용차 한 대를 남편 모르게 구입하였다. 남편이 주말에 올라오면 승용차를 먼 장소에 주차해두었다가 남편이 다시 근무지로 떠나면 자녀들과 주중에 이용한다. 이런 가정이 전국에 얼마나 될지는 궁금거리 가운데 하나이다.

 

가정에서 세력의 판도가 이렇게 바뀌면 남편의 고집스런 권위 유지보다 오히려 민주적인 협의와 다수결에 의한 결정방식을 자연스럽게 도입하는 것이 좋다. 주부에게 웬만한 사안에 대해서는 자율적으로 처리하도록 내맡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가족의 건강관리와 자녀교육 그리고 재산관리 등에서 주부들의 역할은 매우 생산적일 때가 많다.

 

그렇지 않고 시대의 변화에 역행하여 독선적인 방법으로 여성들을 굴복시키려 들면 가정의 행복은커녕 존경과 대우를 제대로 받기가 매우 힘들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큰소리만 치면 여성들은 속으로 ‘아이쿠, 이것도 남편이라고!’ 할 것이다. 세력의 재편에 따른 부부의 역할분담이 요구되는 시기이다. 역할분담이 잘 됨으로써 새로운 질서가 확립되며, 남녀평등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