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태양/허신행을 읽다

[스크랩] 지식사회가 무너지고 있다

소설가 이재운 2011. 12. 12. 11:19

산업사회와 지식사회의 상멸

- 글 / 허신행 박사(전 농림수산부장관)

 

사회의 변화 물결은 끊임없이 도도하게 흐른다. 원시사회로부터 시작하여 농경사회, 산업사회 그리고 또 다른 사회로 중단함이 없이 물 흐르듯 변하고 또 변한다. 1770년대 산업혁명으로부터 시작된 산업사회도 예외 없이 변하고 있다. 사회의 변화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하나의 자연적인 현상이다.

 

산업혁명으로 대형 공장이 들어서고, 자동차와 기차 그리고 선박이 달리며, 비행기가 하늘을 나는 역동적인 산업사회도 사양화되고 있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대형건축과 도로·항만 등의 건설, 밤낮없이 뿜어내는 굴뚝연기, 잠자고 일어나면 한 층씩 올라가는 고층 아파트 건물, 소음으로 가득 찬 건설현장 등이 숨을 죽인 채, 산업사회는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다.

 

노동의 분업과 기계적인 작업, 노사 간의 갈등과 마찰, 자본이면 무엇이나 다 이룰 수 있는 산업사회가 생기를 잃고 점차 시들어 간다. 이런 쇠락의 조짐은 주식시장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다. 미국 뉴욕의 월스트리트 증권가가 그렇고, 유럽과 일본 그리고 한국의 금융시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굴뚝 산업의 주식들이 주도하는 뉴욕의 다우존스 지수는 떨어지는 데 반하여, 신경제의 첨단 기술주들이 지배하는 나스닥 지수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른다. 한국의 굴뚝산업이 주종을 이루는 거래소 역시 기술산업의 코스닥으로부터 위협을 받기는 마찬가지이다.

 

산 정상에 오르면 내려가야 하고, 생물도 나이가 들면 노약해지게 마련이다. 양陽의 시대가 지나면 음陰의 시대가 오듯, 음양은 교차한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기 때문이다. 이런 자연변화를 가리켜 생로병사生老病死요, 성주괴공成住壞空이며, 생주이멸生住異滅이라 한다. 산업사회가 기울면, 다른 사회가 도래하게 되어 있다. 이것은 자연법칙이다.

 

산업사회가 쇠퇴해간다면, 그와 상생관계에 있었던 지식사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지식사회 역시 마땅히 쇠퇴 내지 상멸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자연의 이치요, 순리이다. 상생상멸의 원리가 틀리지 않다면, 지식사회는 산업사회와 함께 상멸의 석양으로 기울어지게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새삼스럽게 산업사회 이후를 지식 사회라 부르고 있다. 왜 그럴까? 드러커와 같은 경영학자들이 지식사회라 말하니 무심코 따르는 측면도 없지는 않은 것 같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전 세계인들이 산업사회 이후를 지식사회로 인식하는 데에는 어떤 사연이 있을 것이다. 이런 인식은 깊은 성찰의 결과라기 보다는 눈앞에 전개된 현상에 대하여 나타낸 감각적인 반응이라 여겨진다.

하나의 좋은 예로서 평범한 가정을 생각해보기로 하자. 남편과 아내 그리고 자녀들이 함께 행복하게 사는 가정이다. 산업사회를 거쳐오는 동안 남편이 밖에서 일하는 사이에 아내는 집안살림을 꾸려 갔다. 밖에서 보는 이 가정의 이미지는 남편이 주도하는 부계父系 가족처럼 느껴질 것이다. 남편이 밖에서 주로 활동하여 돈을 벌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이 늙고 병들어서 갑자기 밖의 활동을 못하고 앓아 눕게 되었다. 이제는 남편 대신 아내가 밖에 나가 일을 해야만 하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게 된 것이다. 남편 없는 이 가정의 이미지는 부인의 시대, 즉 모계母系 가족처럼 보이게 되었다. 그러니까 밖에 있는 사람들이 이 가정의 모습을 보고는 할머니 시대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 할머니도 나이가 들어 얼마 더 살지 못한다. 남편과 아내가 일생 동안 상생관계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다만 약간의 시간차이뿐, 남편과 아내는 한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자식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여기에서 남편은 산업사회를 가리키고, 아내는 지식사회를 지칭한다. 남편이 워낙 활동적이었기 때문에 아내의 내조內助는 밖으로 잘 드러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동안 산업사회만 눈여겨 보았을 뿐, 지식사회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간과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남편의 활동부재로 아내가 돋보이게 되자, 사람들은 산업사회가 가고 지식사회가 왔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아내도 늙어서 곧 활동을 중단하게 될 것이므로, 앞으로는 자식들의 새로운 사회, 즉 한몸사회와 정각사회가 상생으로 열리게 된 것이다.

지식사회가 산업사회와 함께 무너지고 있다는 증거는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우선 지식의 산실産室인 대학들이 붕괴되고 있다. 지방대학부터 흔들리면서 위기에 처하기 시작하였다. 대도시에 있는 대학들도 흔들리기는 마찬가지이다. 지식의 기초과정인 초·중·고등학교의 교실도 무너지고 있다고 아우성이다. 어떤 사람들은 ‘교육 대란大亂’이 온다고 야단법석이다.

 

어느 교육학자가 오늘의 교육현실을 압축시켜 말하기를 “학교는 있어도 진정한 교육이 없고, 선생은 있어도 가르치는 의욕이 없으며, 학생은 있어도 배우고자 하는 열의가 없다”고 하였다. 왜 그럴까? 지식사회가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산업사회 말기에 급속히 늘어난 지방대학들은 지식사회의 마지막 버스를 탄 셈이다.

 

심지어 세계적인 대학, 최상의 대학으로 인정받고 있는 하버드나 스탠포드 대학 등에서도 스스로 중퇴하는 학생들이 늘고 있다. 대표적인 사람이 빌 게이츠William H. Gates Ⅲ(1955∼ )이다. 그는 하버드 대학을 중퇴하고 마이크로 소프트 회사를 설립, 20년도 못돼서 세계 제1의 갑부가 되었다. 시간이 갈수록 세계 일류대학의 학생은 물론 교수들까지도 일반기업으로 스카우트돼나가거나 스스로 벤처기업을 창업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지식사회가 무너지고 있다는 증거는 또 있다. 학교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지식의 대부분이 새로운 상생의 사회, 즉 한몸사회와 정각사회에 잘 맞지 않는다. 만일 새로운 사회가 지식사회라면, 대학에서 배우는 지식이 과거 산업사회에서보다 더 잘 적용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 모두가 지식이 새로운 사회에 잘 들어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물론 기업이나 다른 직장에서도 대학교육의 비현실성을 절감하고 있다. 어떤 기업은 대학교육이 오히려 자기 회사의 발전에 역행한다고 말할 정도이다. 그리하여 이 기업은 대학당국에 비용을 내고, 졸업 후 해당학과의 학생 모두를 채용하기로 약속하면서, 주문교육을 요청하여 화제를 모으기도 하였다.

지식사회가 무너지고 있다는 또 다른 증거는 학력파괴 현상이다. 일부 벤처기업들은 대학생보다는 고등학생이나 중학생을 더 선호하고 있다. 많은 지식으로 무장되지 않은, 때 묻지 않은 순수 인재를 원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런 경향은 지식사회와는 먼 거리에 있다. 일반지식보다는 컴퓨터나 인터넷 등의 기술수준이 높은 사람들의 취직기회가 날이 갈수록 더 높아지고 있다.

 

지식사회가 무너지고 있다는 또 하나의 증거는 기업들이 ‘새로운 아이디어’와 ‘창의력’을 갈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존의 지식은 인터넷을 클릭만 하면 누구나 쉽게 습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새로운 아이디어나 창의력은 지식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복잡한 지식의 두뇌를 깨끗이 씻어내고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청정한 마음으로부터 샘 솟듯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기존의 지식이 아닌 새로운 아이디어나 창의력은 깨달음의 정각正覺상태에서 발현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지식이나 교육이 불필요하다는 주장은 아니다. 지식은 필요하나 산업사회에서보다는 덜 필요하고, 교육은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새로운 아이디어와 창의력의 요람으로 바뀌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주입식 교육보다는 개별 학생들의 적성에 따른 전문성과 창의력을 길러주는 방향으로 나가지 않으면, 새 시대로의 적응이 매우 어려울 것이다.

 

과거 산업사회에서는 찾아 볼 수 없던 이런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는 지식사회의 쇠퇴 내지 붕괴 때문이다. 지식사회가 붕괴되지 않는다면, 지식의 산실인 대학들이 왜 구조조정을 해야 하고, 모든 학사學事과정을 전면적으로 개편하지 않으면 안되었을까.

 

지식사회 이후의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아마도 초·중·고등학교는 물론 대학까지도 혁명적인 변화를 겪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왜냐 하면, 지식사회가 가고 새로운 상생의 사회가 도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출처 : 용인타임스
글쓴이 : 개마고원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