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운 작품/태이자 우리말 사전 시리즈

양말을 한자로 안써서 불편하다는 성균관대 이명학 교수에게

소설가 이재운 2011. 12. 23. 13:33

우리나라가 한글 전용을 국가 정책으로 실시한 이후 한자 한문 전문가들이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아마 이런 점에서 이명학 교수 같은 분들은 울분을 갖고 있을지는 모르겠다.

사실 우리가 한자 한문을 버리고 한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큰 변화가 일어났다.

한자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힘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언제 적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SBS에서 한글전용 문제를 놓고 토론을 벌인 적이 있다. 패널로 나와달라는 연락을 받았지만 난 한글전용 찬성파를 지지하기도 그렇고, 국한문혼용파를 지지하기도 불편하다고 하여 업저버로 코멘트만 하기로 하여 그렇게 한 적이 있다.

 

그때 내가 한글전용도 지지하지 않고, 국한문혼용파도 지지하지 않은 이유는 이렇다.

한자와 한글을 섞어쓰자는 국한혼용파의 경우 쉬운 우리말로 고쳐쓸 수 있는 데도 굳이 현대인들이 잘 쓰지 않는 한자어를 고집하는 태도가 마음에 안들기 때문이다. 소설가 중에서도 일부러 독자들이 잘 모를 것같은 옛날식 한자어를 쓰는 사람들이 있다. 언어란 서로 소통하자는 건데, 이쯤이면 잘난 척해보자는 말밖에 안된다. 예를 들어 먹을거리라고 하면 알아듣기 쉬운 것을 굳이 식자재라고 표기하는 공무원들이 있다. 이런 식으로 국한문혼용하자고 주장하면 곤란하다.

 

또 내가 한글전용 주장을 기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예를 들어 북한이나 한겨레신문의 경우 어떤 경우는 한자를 쓰지 않는데, 쓰지 않는 것까지는 좋은데 의미가 뭔지 혼란스러운 한자어를 발음상태로만 적어놓는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소주의 경우 불을 때 증류시키는 전통 소주와 물에 타서 만드는 소주가 있는데, 이들은 아무 구분없이 쓴다. 하지만 증류식 소주는 엄연히 주(酒)이고 물탄 소주는 주(酎)다. 술의 격이 완전히 다르다. 구분하자면 물탄 소주는 사실상 소주라는 말을 못쓰게 해야 한다. 그냥 물탄 술이라고 쓰든지 희석주라고 해도 되는데, 이런 구분없이 쓰면 언어생활이 모호해진다.

 

아래 이명학 교수의 주장을 적고 거기에 초록색으로 내 의견을 적는다.

 

 

- 옛날 어느 지역에 한자(漢字)를 쓰는 부족과 문자가 없는 부족이 있었다. 어느 날 그곳에 사람처럼 서서 걸어 다니는 온 몸에 털이 수북하게 난 원숭이가 나타났다. 문자가 없는 부족은 '사람과 비슷하게 생긴 잔나비'라고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한자를 쓰는 부족은 '비슷하다'(類) '사람'(人) '원숭이'(猿)라는 각각의 단어를 조합해 '類人猿'이라고 이름 지었을 것이다.

* 유인원이 사람과 비슷하게 생긴 원숭이과 동물이라는 건 요즘 아이들이 다 안다. 만일 영어로 Ape라고 해도 우리 아이들은 그렇게 외운다. 그러니 그냥 소리나는대로 적는다고 해서 유인원의 뜻을 모르지는 않는다.

 

다행히 우리는 세종이 만든 한글 덕분에 우리 말과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문자를 갖게 됐다. 그런데 문제는 한글의 우수성만 너무 강조한 나머지, 한글전용을 마치 애국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배타적인 사고가 지배해 지난 수천 년 우리 문자 역할을 대신해 준 한자를 청산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게 됐다는 것이다.

한글전용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한자어(漢字語)를 한글로 바꾸어 쓰는 것이 한글 전용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한글로 쓴 '유인원'은 단지 한자로 된 '類人猿'을 읽는 소리일 뿐이고, 그 자체로는 뜻을 유추해 볼 길이 없다. 그런데 한글 전용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한글로 유인원이라 써야 되고, 그 모태가 된 한자어 '類人猿'에 대해서는 알 필요도 없다고 주장한다.

* 그렇다. 한자를 굳이 쓸 필요가 없다. 소리 이미지만으로도 언어는 생명력을 갖는다. 구축함 역시 복잡하게 한자를 적지 않아도 잠수함 잡는 배라는 걸 아이들은 잘 안다. 버스, 엘리베이터처럼 유인원, 구축함도 그렇게 발음만으로 써도 된다. 우리말 사전을 영어 사전 보듯이 한번만 읽으면 다 쓸 수 있다.

베트남에서는 감사하다는 말을 '깜언'(cam-on)이라고 한다. 이 말은 한자어 감은(感恩)에서 온 것이다. 과거 한자문화권에 속했던 베트남은 프랑스 식민지 시절 전통문화를 단절시키려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한자를 폐기하고 로마자로 표기하게 되었다. 베트남어의 수많은 어휘가 모두 한자어에서 온 것인데, 지금 베트남 사람들은 이것을 모른 채 소리 나는 대로 쓰고 뜻을 익히고 있다. 우리도 한글 전용을 계속한다면 먼 훗날 베트남인들처럼 어원도 모른 채 단순히 음과 뜻을 주입식, 암기식으로 익히게 될 것이다.

* 베트남 사람들이 깜언이라는 말을 쓰는데 아무 불편이 없을 것이다. 우리도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란 말을 쓸 때 굳이 머릿속에 감사(感謝)와 안녕(安寧)이란 한자를 떠올리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말이 안되는 주장이다. 물론 어원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래서 한글학자나 한문학자들이 주장만 하고 있을 때 나는 <뜻도 모르고 자주 쓰는 우리말 사전/예담>을 집필하여 15년째 증보판을 계속 내오고 있다. 이런 노력이면 된다. 거기 보면 서랍이 설합(舌盒)에서 나오고 도무지가

도모지(塗貌紙)라는 형벌에서 나왔다는 게 자세히 나와 있다. 그러면 되는 것이다. 도마뱀의 도마가 토막이라는 우리말에서 나와 급할 때 꼬리를 토막내듯이 자르고 도망친다는 데서 온 말이라는 걸 알면 조금 더 재미있어지는 것뿐이다. 물론 몰라도 도마뱀을 설명하는데 지장이 있는 건 아니다.


양말은 무슨 뜻일까. 양말은 한자로 '洋襪'이다. 이 물건이 처음 들어왔을 때 사람들은 그 명칭을 어떻게 지을까 고민하다가 '서양에서 들어온 버선'이라고 뜻을 정하고 한자어로 양말이라 이름 지은 것이다. 또 비행기를 타면 의자 앞에 "구명 동의는 중앙 팔걸이 밑에 있습니다"라는 문구를 보게 된다. 몸통 동(胴), 옷 의(衣)를 써서 '胴衣'라 하는데, 소매가 없는 '몸통에 입는 옷' 즉 '조끼'란 뜻이다. 우리는 오랜 세월 싫든 좋든 한자문화권에서 살아왔으며 우리 어휘의 대부분이 한자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 버선과 양말 두 가지 어휘를 구분하여 쓰면 된다. 아무 불편이 없다. 조선시대까지는 버선을 신었고, 이후 양말을 쓴 것으로 다 이해한다. 구명동의처럼 정말 우리말하고 아무 상관없이 쓰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그냥 물에 빠질 것에 대비해 공기주머니를 단 옷이라고 외우면 아무 지장없다. 조끼가 중요한 게 아니라 물에 뜨는 옷이라는 게 더 중요한데 구명동의라는 한자어에는 이런 의미가 들어가 있지 않다.

 

따라서 우리 한문학과 교수들이 <올해의 한자>라는 행사를 통해 듣도 보도 못하던 이상한 한자어나 발표하여 중국인들만 기쁘게 하는 치졸한 짓은 안했으면 좋겠다. 중국하고 일본이야 한자를 쓰는 나라이니 그래도 되지만 우린 한자가 외국문자로 여기는 나라다. 이들이  ‘掩耳盜鐘' 넉 자를 올해의 한자라고 발표했는데, <제 귀를 막고 종을 훔치다>라고 적으면 왜 안되는지 궁금하다. 얼마나 쉬운가. 

이 중에서 엄 자는 흔히 쓰는 자도 아니다. 엄폐(掩蔽)라고 할 때 군사용어로 조금 쓰일 뿐이다. 우리 대한민국이 왜 이런 스트레스를 해마다 받아야 하는가. 그냥 우리말로 써도 충분한 것을 몇몇이 자위하듯이 그러면 보기 안좋다.

(뭘 모르는 소설가 놈이 한문을 핍박한다는 생각이 든다면 <뜻도 모르고 자주 쓰는 우리 한자어/예담>을 봐주시길. 나도 한문 좀 합니다. 한문학과 교수나 나같은 사람이 한문으로 된 우리 고전을 읽고, 좋은 게 있으면 우리말로 소개하면 된다고 봅니다. 전국민이 논어, 맹자, 기신론 따위를 한문본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 추가 / 이 기사는 어떻게 보시는가?

"강OO는 최근 패션매거진 싱글즈 화보 촬영을 진행했다. 그는 매니시하면서도 러블리한 느낌을 잘 소화해내 스태프의 찬사를 받았다.조선일보 기사 중. 2011년 12월 23일자 기사다. 이런 걸 나무라셔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