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건강후진국? - 이 칼럼 마음에 안든다
한삼희 논설위원은 안병영 전 교육총리를 들어, 오스트리아 빈이 40년 전과 하나도 다를 바 없어 편안함을 느꼈다더라고 적었다. 그런 반면 본인은 고향 수원이 너무 변해 섭섭하고 당황스럽다고 적는다.
그러면서 그는 <몇십년이 지나도 바뀌는 게 별로 없는 세상에서 좀 살아보고 싶다>는 희망을 적고 있다.
요즘도 그런 나라가 참 많다. 오스트리아가 그렇다니 거기도 그렇고, 북한 시골도 그럴 것이고, 아프리카라면 그런 곳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몽골의 저 멀고먼 초원이나 중국의 소수민족이 사는 골짜기 어디도 아마 그럴 것이다.
이 글을 읽으니까, 연변에 같이 갔던 한 환경운동가가 현지 동포들더러 이 좋은 전통문화를 지키면서 잘 살아야지 왜 자꾸 현대문명의 이기를 찾느냐, 왜 쓸데없이 서울로 서울로 돈벌러 떠나느냐며 그들을 나무라는 걸 지켜보던 기억이 난다. 길림성 시골의 볏짚 엮어올린 지붕이며, 고무신이며, 면바지 같은 걸 말하는 것이다. 그 자신은 나이키 운동화에 니콘카메라 메고, 리바이스 청바지에 아디다스 배낭 메고, 그 배낭에는 담배며 라면이며 과자 따위 가득 넣고 그따위 말을 지껄인 것이다.
감상 따위는 저리 미루고 우리 현실을 제대로 돌아다보자.
우리 아버지는 1924년생이시다. 태어나보니 식민지였다. 조선인으로 태어난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국제적으로 일본인이라고 여겨졌다.
너무 맛이 없고 배가 고파 울부짖으며 가출도 했지만, 결국 돌아와 그 깨묵 배급 받아먹으며 겨우겨우 자라
가까운 미쓰비시광산에서 일하다보니 진폐증에 걸렸다.
스물한 살이 되니 일본제국주의 군인이 되라는 영장이 나와 어디론가 끌려갔다.
태평양 전선에 투입될 것이고, 한번 떠나면 살아서 돌아오기 어렵다는 소문이 들려 큰 마음 먹고 탈영했다. 죽음을 각오한 탈영이었다. 다행이 해방이 되었다.
육이오전쟁이 나자 장티푸스에 걸려 피난도 가지 못해, 할아버지와 둘이 집을 지키며 죽어도 부자가 같이 죽고 살아도 부자가 같이 살자며 버텼다. 그렇게 앓아 지친 몸으로 뒤늦게 군대에 갔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역시 만신창이가 된 휴전선으로 간 것이다.
나도 태어나보니 분단국가, 전쟁하다 쉬는 중인 남한이었다. 내가 태어난 그 자리는 연간소득 100달러도 안되는 빈국, 그 빈국 중에서도 점심 굶고, 저녁 죽으로 먹는 가난한 집이었다. 뒤늦게 군에 다녀온 내 아버지는 산기슭을 개간해 감자 심고, 어머니는 산비탈로 나물 뜯으러 다니고, 형은 책이 없어 교실 밖에서 서성이는 볼품없는 초등학생이었다.
우리 현대사의 나이테나 다름없는 아버지는 일제, 미군정, 이승만 독재정권, 장면어리바리정권, 박정희 군사정권, 최규하 꼭두각시정권, 전두환노태우 군부정권을 겪었다. 이후 민주정권을 골고루 맛보셨다.
신발로 치면 짚신에서 게다짝, 나막신, 고무신, 일제 군화, 미군이 버린 군화, 운동화, 구두를 골고루 신어보셨다.
아버지는 노년에 이르러 서울에 오시면 전철을 타는 법을 몰라 어리둥절하셨고, 자식 집을 찾지 못해 길거리를 헤맸다. 컴퓨터 앞에서 당황하시고, 자식이 무슨 일을 하며 살아가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셨다.
우리 아버지가 이런 기구한 인생을 살고 싶어 살았으며, 아버지 또래 중에 태평양 전쟁에 나가 죽은 이들이며, 육이오전쟁에 나가 죽은 사촌동생(육군중위 이종범, 전사)이며, 완장찬 머슴이며 죽창 들고다니며 공산당 부역자 골라 찔러죽인 이웃(앞집 살던 박평만 씨)을 볼 줄 어찌 알았겠는가.
전쟁 직후의 그 살벌한 전선에서 근무하며 불안에 떨고, 돌아와서는 육촌조카(이재필) 월남갈 때 동생들까지 끌려갈까 걱정하고, 유신 때는 자식이 데모하다 감옥갈까 "데모하지 마라, 데모하지 마라" 걱정하고, 누군가는 감옥에 가는 걸 보며 벌벌 떨었다. 양공주가 뭔지 알기를 했을 것이며, 혼혈이 생길 줄 어찌 알았겠는가. 그 시골까지 먼나라 새댁들이 시집와 살 줄도 모르고, 외국인노동자들이 공사판까지 밀고들어올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아버지의 자식인 내게도 이 세상은 너무 빠르게 변하는데, 짚신 신던 식민지 백성으로 생을 시작한 아버지는 오죽하셨겠는가.
그런데 간단히 말해 정신건강후진국이라니...
단지 한국만 이런 극심한 변화를 겪는다면 이 주장에 승복하지만 전세계 인류가 공통으로 겪는 일반적인 현상 아닌가. 굳이 우리나라를 후진국이라고 비하하면서 자학할 필요가 있을까. 이게 어디 한두 사람 때문에 생긴 일인가. 인류 전체가 겪고 있는 아픔을, 그것도 현대사의 중심에서 육이오전쟁, 월남전, 그리고 이제는 IT산업전쟁의 최전선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동족을 향해 책상머리에 앉아 이런 식으로 쉽게 말해서는 안된다. 치열하게 일하되 그늘을 살피고, 앞으로 나아가되 뒤를 바라보는 여유를 가지면 된다.
자살자는 최근 현상이지 늘 우리나라 자살자가 가장 많은 것도 아니다. 아마도 경제위기 닥친 유럽에서 더 많은 자살자가 나올지도 모른다. 전쟁 일어난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그리고 동북대지진과 쓰나미로 수만 명이 몰살당한 일본, 지진으로 십만 이상이 죽은 아이티 등 널리 돌아다보면 지구촌 전체가 아프다.
그러니 가까이 사는 우리끼리, 우리 국민끼리 위로하고 보살피자. 늦었지만 정부에서 국민 정신건강을 제대로 챙기겠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국가가 나서서 국민의 정신건강을 돌보겠다고 나선 나라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 다리 튼튼한 가족들이 외할아버지 묘소 앞에 모였다. 식민지 백성 출신 어머니를 비롯해 육이오전쟁 발발할 때 "산으로 피난갔는데 모기떼가 어찌나 극성인지 애들이 울고불고 난리인데, 큰애는 뱃속에 있으니 모기 물리지도 않고, 울지 않아 좋더라"던 큰형, 국민소득 50불 국민, 100불 국민, 그리고 삼천불, 만불 국민까지 골고루 모였다. 소득 2만불 백성으로 태어난 늦둥이조카들은 여기까지 오지 못했다. 소득 2만불 시대에 태어난 늦둥이 조카들은 닌텐도, 아이패드 잡고 논다. 아래 사진은 어린이날이라고 밥값 비싼 레스토랑에서 점심 먹고 있는 '2만불 국민'인 조카들(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