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태양/*파란태양*

미안하다. 행복해지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란다

소설가 이재운 2016. 6. 20. 23:34

숲길을 걷거나 시골 밭둑을 걷다 보면 여기가 천국이지 달리 어디가 천국이겠는가 싶을 때가 있다. 이슬 머금은 보랏빛 제비꽃이 수줍게 올려다보고, 마가렛이며 망초 등이 하얗게 피어 있고, 라일락이나 더덕넝쿨 어디선가 향기가 코끝을 간질일 때 잠시 잠깐 그런 생각이 든다. 하늘도 짓궂어서 인간으로 하여금 이처럼 잠시짬깐 쉬어갈 수 있게 만들어준다. 먹을 때, 섹스할 때, 꽃이 피고 녹음이 짙은 자연을 볼 때, 자식 재롱 구경할 때, 잠시 권력의 맛을 느낄 때 등이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지속되는 게 없다. 금세 끊어진다. 먹을거리는 떨어지거나 맛이 없어지고, 섹스하던 상대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친하던 동무도 세월이 지나 길에서 다시 만나면 매우 낯설어진다. 산마루에 서 있는 큰 나무나 길가의 바위처럼 감성이 쪽 빠져나가 있다.

더위에 지칠만하면 가을 바람 불어보내고, 추위에 지칠만하면 봄바람 불어보낸다. 그저 죽지 않을만큼 살려준다.


방글방글 웃어대는 딸아이가 한 살 두 살 먹어가는 걸 보면서 언젠가는 딸에게 이런 사실을 말해주고 싶었다. 우리 아이가 많이 아프던 열네살 때 진실의 일부를 말해준 이후 더 가혹한 진실에는 입을 다물었지만, 딸은 아마도 스스로 깨우쳤을 것이다.


미안하구나. 넌 행복하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란다.

넌 지구학교에 온 거란다. 여긴 천국이 아니라 지옥 비슷한 곳이란다.

- "아빤 내가 왜 이 세상에 왔는지 모르지?"

이렇게 약올리는 것같다.


사람들은 크게 성공한 사람은 늘 행복에 싸여 사는 줄 착각한다. 성공이라는 게 일정한 영역이 있는 게 아니라서 자기 자신을 성공했다고 확신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인간으로 존재하는 한 자신이 성공했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인간, 그 자체가 실패 아닌가.

돈이 갈 수 없는 길, 명예가 갈 수 없는 길, 권력이 갈 수 없는 길이 너무나 아득하다. 

인간의 지능을 갖고 자신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사실 다 위선이다. 아프기 때문에 행복하다 말하고, 힘들기 때문에 행복하다 말하고, 우울하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말한다. 몇년 전 행복전도사로 유명하던 이가 끝내 자살하고, 아돌프 히틀러 같은 절대권력자도 자살하였다. 내 스타일대로 더 설명하지 않겠다. 인간이니까 우울한 것이고, 인간이라서 행복은 불가능한 것이다.


나는 이 문제를 공부로 해결하였다. 공부는 쉴 틈이 없으니 나를 옥죄는 거대한 우주담론이 내 공부시간만큼은 비켜갈 수 있다. 바이오코드를 공부하면서 다크 매터리얼과 다크 에너지가 우주의 96%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난 이미 행복 따위는 걷어차 버렸다. 다 거짓이라는 걸 알았다. 굳이 붓다의 금강경이 아니라도 현대의 지성인은 그쯤 다 안다.

절대 착각해서는 안된다. 가난은 당연한 우리의 본분이고, 우울은 일상이다. 사자, 호랑이도 늘 굶주림에 시달리고, 늘 고독하다. 자연법칙을 거슬러 가난을 이기려면 물이 흐르듯 그냥 흐르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한결 낫다. 억지로 모래성을 쌓으면 무너질 때 고통스럽다. 그냥 둬야 한다. 내 앞에 큰 웅덩이가 생기든 말든 물은 흘러 지나갈 것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우울증은 모래시계처럼 조금씩 줄어들다가 마침내 죽는 날 없어질 것이다.


나는 내 머릿속에 앉아 있는 생체시계의 정체를 안 1990년 이래 늘 주인이 되기 위해 몸부림쳤다. 하지만 언제나 거부되었다. 지난 한 달간 심한 면역력 결핍을 느끼면서 목이 잠기고 가래가 끓고 눈의 실핏줄이 잇따라 터지고 해마가 그만 좀 쉬자고 소리질렀다. 먹기도 싫고 사람도 싫고 일하기도 싫고 오직 물만 마셨다. <성공 뒤에 찾아드는 허무, 스캔들의 대문을 열다>란 기사를 보니, 매우 잘 쓴 기사임에도 필자가 한 가지 놓치고 있는 게 보인다.


인간의 주인인 DNA의 지휘자 <생체시계>는 생존, 생식을 원한다. 그러는 과정에 권력이 생길 수 있고, 부가 생길 수 있지만 그건 목표가 아니다. 사람들은 권력과 부가 생기면 곧바로 행복해지리라고 상상하지만 <생체시계>에 행복이란 임무수행 때 잠시잠깐 주워지는 보상일 뿐 <행복한 상태>는 결코 지속되지 않는다.

내가 아는 한 생체시계는 인간들이 성공했다고 착각하는 순간 행복이 아니라 또다른 의무를 요구한다. 여기서 인간들이 좌절하거나 실망할 뿐이다. 그것은 바로, 다른 개체를 도우라는 것이다. 매우 색다른 주장으로

들리겠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생체시계는 오직 종의 생존과 생식, 그러면서 수많은 적응과 변화를 통해 더 강해지기를 바랄 뿐이다. 행복 따위는 원래 없다. 행복 호르몬은 잠시 인간을 일으켜 세우려는 '당근'이고, 오직 채찍이 기다릴 뿐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차라리 성공했다는 주위의 평이 생길 때쯤(자기 자신은 승복하지 못해도) 재빨리 다른 개체를 돕는 봉사와 기부 쪽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그러면 안전해진다. 생체시계는 더이상 채찍을 들지 않는다. 채찍을 맞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승의 고통을 많이 줄어든다. 생체시계는, 더이상 바라지 말라고 분명히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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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성공한 유명 인사의 스캔들로 세상이 떠들썩하다. 왜 이런 행동을 보이는가.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원래부터 이상한 사람이 운 좋게 성공을 움켜쥐었다가 본색이 드러난 경우가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게까지 이상한 사람은 아닌데 성공 후에 무언가 마음에 이상한 일이 벌어져 사고가 터진 경우다. 후자라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쾌락' 하면 비윤리적인 느낌을 받지만, 실제 뇌 안의 쾌락 시스템은 생존에 꼭 필요한 장치여서 지금껏 퇴화하지 않고 맹렬히 작동하고 있다. 인류 생존에 꼭 필요해 강력한 쾌감 반응을 일으키는 요인을 생존 아이템이라고 한다. 가장 강력한 것이 먹는 욕구이다. 먹어야 내가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가 사랑에 대한 욕망이다. 남녀가 사랑을 나누지 않으면 다음 세대를 지탱할 후손이 끊기게 된다. 셋째가 권력, 힘에 대한 욕망이다. 힘이 있어야 내 가족, 내 조직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쾌락 시스템이 생존, 그리고 적절한 수준의 삶의 유희 기능을 넘어 과도하게 작동하면 오히려 생존 자체를 위협한다. 먹는 쾌락에 지나치게 빠지면 복부에 지방이 차오르고 결국 심장과 뇌가 병들게 되는 것처럼.



긍정성은 성공의 중요한 요인이다. 긍정성은 삶에 위기가 찾아와도 그것을 뛰어넘어 목표를 향해 달리게 해준다. 그런데 이 긍정성을 제공하는 '마음'은 자선단체가 아니다. 작용 방식을 보면 금융기관처럼 일한다. 성공하고 싶다고 마음에게 이야기하면 마음이 긍정성을 대출해준다. 그러다가 성취를 이룬 순간 마음이 채권 회수에 나선다. 제공하던 긍정성의 파이프 라인을 잠가버리면서 '널 성공하게 지금껏 도와주었으니 이젠 나를 즐겁게 해봐'라고 마음이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다. 성취 후 찾아오는 허무감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다. 일단 성취하고 나면 마음이 보상을 요구하면서 긍정성을 더는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허무감이 밀려드는 것이다.

유명 인사의 스캔들을 보면 그것이 터진 시점에 그는 내리막길이 아닌 성공의 탄탄대로에 서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다 가진 사람이 왜 저런 행동을 해서 모든 것을 잃는지 이해가 안 되겠지만 사실은 다 가졌기 때문에 스캔들이 터질 위험도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성공 후에 찾아오는 심리적 보상에 대한 요구를 건강하게 해결하지 못하면, 그 허전한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쾌락 시스템이 과도하게 작동할 수 있다. 스캔들의 내용을 보면 대부분이 성적(性的)인 것이거나 돈이나 인기 같은 파워를 과도하게 사용하는 경우다. 강력한 생존 아이템인 성적 욕망과 권력욕이 내 쾌락을 위해 타인을 망가트리고 결국 내 숨통마저 조이는 것이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가 생존을 위해 힘을 쓰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가졌으나 가진 힘을 이용해 행복에 이르는 기술은 부족하다'고 평했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75년 동안 724명을 대상으로 행복에 대한 연구를 한 결과를 보니 맥이 빠질 만큼 심심하다. 돈, 힘이 아닌 좋은 인간관계를 가진 사람이 더 행복하고 더 건강하다는 것이다. 인간관계만 좋으면 된다니 행복하기가 참 쉽게 느껴지지만 사실은 세상에 제일 어려운 것이 사람과의 관계이다. 어렵다 보니 돈으로, 힘으로 사람의 마음을 사려고도 하지만 이렇게 해서는 진짜 좋은 관계를 얻을 수 없다. 돈으로 사랑을 표현할 수는 있지만 진짜 사랑을 살 수는 없다.

대중의 사랑을 지속적으로 받는 유명인 중에 기부천사 스토리를 가진 이들이 적지 않다. 기부 행동 자체가 자신의 성공을 지탱하는 동기인 경우도 보게 된다.(이 부분이 생체시계가 깊이 숨겨둔 비밀이다. 이 부분에 주목하기 바란다.) 생존은 나를 위한 몸부림인데 생존의 목적인 행복은 내 에너지가 타인을 위해 쓰일 때 찾아온다는 쉽지 않은 지혜를 미리 깨달은 분들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