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갤러리 2 - 육이오전쟁
이중섭은 1950년부터 상상하기 어려운 시련을 겪기 시작한다.
전쟁 직전 형이 부르조아로 몰려 행방불명되고, 1.4 후퇴 때 노모와 형수를 두고 월남한다.
그러다가 도저히 살기가 힘들어 부인과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내고, 이후 열악한 환경 속에서 작품 활동을 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여기 올리는 것은 처자식과 헤어지기 직전까지 그림이다. 즉 1951년부터 1952년 두 해의 기록으로 작품 수수가 적다.
이중섭(李仲燮) 연보 2
1950년 35세
6․25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가장인 형 중석이 행방불명되었다. 친일파, 부르주아로 몰려 처형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10월에 집이 유엔군 폭격으로 부서져 가까운 친척집으로 가서 머물렀다. 전세가 바뀜에 따라 남한군이 북진했다. 원산에서 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회장이 되었다. 12월 6일에 다시 바뀐 전세에 따라 부인과 두 아들, 조카 영진을 데리고 흥남부두를 떠나 부산에 도착했다. 이때 70대 노모에게 그때까지 그린 그림을 모두 두루마리로 말아 맡기고 내려와 평생의 한이 되었다. 부산 범일동의 창고에 거처를 정하고, 부두에서 짐 부리는 일에 잠시 종사했다. 이때 껌을 훔친 소년을 잡아 마구 때리는 군인을 말렸는데, 그 군인이 듣지 않자 화가 나 군인을 때렸다. 못 견딘 군인이 패를 지어 다시 나타나서 휘두른 총 개머리판에 맞아 머리에 큰 상처를 입었다.
1951년 36세
4월에 문총구국대 경남지부 회원으로 가입했다. 이후 가족과 부산을 떠나 제주도로 향하여, 여러 날 걸어서 서귀포에 도착했다. <피난민과 첫 눈>은 이때의 체험을 그린 것이다. 서귀포에서 만난 주민이 방을 내주었다. 피난민에게 주는 배급과 고구마로 연명하는 한편, 게를 잡아 찬으로 삼았다. 장차 벽화를 그리기 위해 갖가지 조개를 채집하여 솜으로 싸두었다. 선주에게 사례하기 위해 여섯 폭 병풍 형식의 그림을 그려주었다. 부산에서 열린 월남작가전에 출품하였다. 12월에 다시 부산으로 갔다. 오산학교 동창을 만나 범일동에 있는 판잣집을 얻었다. 일본의 처가에서 소액의 원조금을 보내왔다.
1952년 37세
국방부 종군화가단에 가입하였다. 영도에 있는 대한경질도기회사에 다니던 친구 황염수를 매개로 그 공장에서 당시 미술대 학생이던 김서봉과 두어 달 같이 지냈다. 3․1절 경축미술전에 출품하였다. 생계 곤란이 계속되어 부인과 두 아들이 일본인 수용소에 들어갔다. 12월에 일본인 수용소의 제3차 수송선 편에 부인과 두 아들이 일본으로 떠났다. 가족에게 보내는 그림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박고석, 한묵 등과 기조(其潮) 동인을 결성하고 르네상스 다방에서 전람회를 열었다. 원산에서 함께 월남한 조카 영진이 군에 입대하였다.
- 범일동 풍경
- 해와 아이들, 1951-3년경
- 봉황 또는 부부, 1951
- 달밤
- 편지 1
- 섶섬이 보이는 풍경, 1951
- 삽화, 1952년
- 편지 봉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