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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원 이광수, 친일은 친일일뿐 위장 친일이 어디 있나

소설가 이재운 2016. 9. 10. 12:04

소설가 시인은 정말 마음속으로 친일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면, 결코 친일해서는 안된다. 

글이 남기 때문이다. 글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이광수, 그가 지나가는 사람 1, 2였다면 위장 친일해도 문제가 없다. 하지만 글로 친일하면 그건 위장이 아니고 백년 천년 남는 진짜 친일이 된다.


그래서 글로 종질하는 게 제일 무섭다. 글로 친일하고, 글로 독재자를 찬미하고, 글로 불의를 칭송하면 언제고 그 기록이 남는다. 천년이 지나도 독사의 혀처럼 날름거린 그 더러운 말이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나는 미당 서정주 선생의 제자로서 그의 친일은 목격하지 못했지만 기록으로 알았고, 전두환에 대한 찬양은 눈으로 목격하고 선생께 여쭈기도 하고 해명도 들었다. 하지만 변명할 도리가 없다. 선생의 문학적 재능을 배웠을 뿐 친일, 친독재, 친군부 행적에 대해서는... 변명에 동의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변명할 것없이 겉과 속을 다 드러내면 된다고. 그래서 서정주 선생에게서 무얼 배우고, 무얼 배우지 않았나 나만 알면 된다고.


요즘 이승만 박정희를 미화, 칭송, 신앙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광수의 친일을 변명하려는 짓과 같다. 그냥 있는 사실 그대로 두면 된다. 이승만의 독립운동, 친일파 환대, 전쟁 중 국민학살, 토지개혁, 독재, 자유민주주의 정착... 역사는 그냥 사실만 나열하면 된다. 박정희도 마찬가지다. 헌법유린, 유신장기집권, 산업화, 새마을운동... 이렇게 사실만 나열하면 된다. 뭘 더 넣고, 뭘 더 빼고 할 필요가 없다.


<동아일보 / 무정 작가 이광수, 그의 친일은 위장이었나>



- 한창 친일하던 1942년 사진


이광수


* 1892년 음력 2월 1일생. 0410코드.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

도쿄 2.8독립선언 주도.

혼인 상태에서 나혜석 사귐(나혜석은 친일 시인)

1917년 소설 <무정>을 매일신보에 연재, 조선총독부 자문기관인 중추원이 연재 중단 호소, 유림계 발칵 뒤집혀.

중추원 양반들이 '아비 어미 없이 자란 상놈의 자식'이란 막말 퍼붓고, 성리학자들의 항의전화, 규탄 집회 벌어짐.

동아일보 편집국장, 조선일보 부사장.

김동인이 동아일보에 <젊은 그들>을 연재할 때 이광수는 "작가의 자존심은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독자 본위로 써달라."고 주문(김동인도 친일 작가)

혼인상태에서 산부인과 의사인 허영숙과 장래를 약속하고 베이징으로 애정도피.

임시정부 직원, 독립운동(조선총독부 사주로 이중간첩했다는 설 있음). 독립운동에 환멸, 안창호가 말렸으나 귀국해버림.

1922년 석전 박한영 스님 찾아가 출가. 불교전문강원에서 서정주, 이광수, 조지훈, 김달진 등과 교류. 박한영이 이광수를 환속시킴.

1922년 <개벽> 5월호에 '민족개조론' 발표

허위되고 공상과 공론만 즐겨 나태하고 서로 신의와 충성이 없고, 일에 임하여 용기가 없고, 빈궁하고

이 글 때문에 칼 든 청년이 난입. 개벽 잡지사 기물 파손. 조선총독부의 사주로 이광수가 이런 글을 썼다는 설 있음.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서 "일본 법률의 범위 안에서 정치 산업 교육의 3대 정책을 수립하자'고 주장하여, 사실상 일본 옹호. 논란이 일자 동아일보 편집국장 사퇴.


김우진은 1926년 쓴 평론 〈이광수류의 문학을 매장하라〉에서 당대 최고의 문인 이광수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김우진은 "조선이 지금 요구하는 것은 형식이 아니오, 미문(美文)이 아니오, 재화(才華)가 아니오, 백과사전이 아니다"라면서 "거칠더라도 생명의 속을 파고드는 생명력, 한 곳 땅을 파면서 통곡하는 부르짖음이 필요하다"며 그의 계몽론을 비판했다.

조선총독부가 창씨개명을 추진하자 이광수가 적극 지지하고 본인이 개명.

- 이광수가 밝힌 창씨개명 이유 / 내가 향산(香山)이라고 일본적인 명으로 개한 동기는 황송한 말슴이나 천황어명과 독법을 같이하는 씨명을 가지자는 것이다. 나는 깊이깊이 내 자손과 조선민족의 장래를 고려한 끝에 이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굳은 신념에 도달한 까닭이다. 나는 천황의 신민이다. 내 자손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 것이다. 이광수라는 씨명으로도 천황의 신민이 못 될 것이 아니다. 그러나 향산광랑(香山光浪)이 조금 더 천황의 신민답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내선일체를 국가가 조선인에게 혀하였다. 이에 내선일체운동을 할 자는 기실 조선인이다. 조선인이 내지인과 차별 없이 될 것 밖에 바랄 것이 무엇이 있는가. 따라서 차별을 제거하기 위하여서 온갖 노력을 할 것밖에 더 중대하고 긴급한 일이 어디 또 있는가. 성명 3자를 고치는 것도 그 노력 중의 하나라면 아낄 것이 무엇인가. 기쁘게 할 것 아닌가. 나는 이러한 신념으로 향산이라는 씨를 창설했다


이광수는 1940년 경성일보(조선총독부 기관지로 일본어로 발행된 신문) 창간을 주도한 도쿠토미 소호에게 일본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창씨개명을 하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1943년부터 그는 여러 학병 권유의 글과 연설을 언론과 방송 등을 통해 번갈아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후 서울에서 이광수의 친일 행적으로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양주로 피신.

1943년 11월 8일부터 14일경까지 작가 최남선, 기업인 김연수, 친일파 정치인 이성근(李聖根) 등과 함께 부산항을 출발, 일본에서 학생들에게 지원병을 권유하는 '선배격려대원'으로 연설했다.


이광수의 친일작품으로는 1939년 2월호 동양지광 잡지에 발표한 시 <가끔씩 부른 노래>를 시작으로 1940년 <의무교육과 우리의 각오>, 1940년 4월 조선일보에 <내선일체와 조선문학>을 발표했다. 

1940년 11월에는 <지원병 훈련소의 하루>(국민총력), 1942년 12월 <대동아 일주년을 맞는 나의 결의>(국민문학) 등을 발표했고, 1943년 2월에는 춘추지에 <폐하의 성업에>를, 1945년 1월 18일에는 매일신보에 <모든 것을 바치리> 등 103편의 시, 논설 등을 기고하였다. 또한 <조선의 학도여> 등의 시, <그들의 사랑> 등의 소설, <성전 3주년> 등의 수필을 발표하였다. 

1943년 3월 이후 피신 시작하면서 거의 작품활동을 하지 않는다.


전향 이후 이광수의 친일논설집은 1941년 단행본으로 발간되었다. 내용면에서는 중국과의 사대관계 단절 위에 일본과 유대강화를 필연적으로 보는 내선일체론, 후방에서 천황의 뜻을 받들어야 한다는 총후봉공론, 후천개벽을 곧 일본이 아시아를 지배하는 시대로 파악하는 대동아 공영론 등 이광수 친일론의 골격을 담고 있다.


“1945년 8월 보름날 정오에 일본천황 유인이 울음 섞인 소리로 온 일본인에게 부득이 항복한다는 포고를 할 때, 라디오 앞에 이광수도 울면서 그 방송을 들었다. (김동인의 증언)


해방 후 봉선사에 숨음.

이후 반민특위에 구속됨.


자신의 친일행적에 대한 경위와 친일의 역사철학적 맥락을 전면적으로 밝힌 《나의 고백》(춘추사)을 간행했다. 이 책에서 민족의식이 싹트던 때부터 일제 말기까지 자기의 행위를 '민족을 위한 선택'이었다고 서술한 후, 일제 말기의 친일 행위 역시 "애국자로서의 명예를 희생하더라도 민족보존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이었다."고 강변했다. 《나의 고백》에는 친일에 대한 변호 외에도 〈친일파의 변〉이라는 부록이 있는데, 〈홍제원 목욕〉, 〈삼학사〉, 〈관공리는 반민족자였던가〉, 〈미국인의 친일파관〉, 〈대한민국과 친일파〉 등의 글에서 이광수는 병자호란 당시 끌려갔던 여성들을 〈홍제원 목욕〉이라는 지혜를 통해 감싸안았듯이 친일했던 사람들을 포용해야 한다고 주장.

 "해방이 1년만 늦었어도 조선 사람들은 황국신민의 대우를 받았을 것입니다. 창씨개명 안한 사람, 신사참배 안한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됩니까? 우리 국민은 문맹자도 많고, 경제자립도 어려워 일본과 싸워 이길 힘이 없습니다.", "나는 민족을 위해 친일했소. 내가 걸은 길이 정경대로(正經大路)는 아니오마는 그런 길을 걸어 민족을 위하는 일도 있다는 것을 알아주오."라고 변명.

이승만 정권의 친일파 보호 정책과 병보석으로 출감. 이후 육이오전쟁 때 납북, 친구 홍명희가 큰 병원으로 안내했지만 폐병으로 사망.

그의 이름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