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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천야록 2권-1

소설가 이재운 2016. 10. 27. 22:26

1. 천둥


갑오년(1894)(淸國 光緖20년. 일본 明治 27년) 2월 12일 밤, 천둥이 두 번이나 울렸다.

2. 고부민란


古阜에서 민란이 일어나 군수趙秉甲이 도주하자 고종은 그를 체포하여 심문하라는 명을 내리고, 龍安縣監朴源明을 대신 그 직위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長興府使李容泰를 按覈使로 임명하였다. 조병갑은 故 군수趙奎淳의 서자로, 그는 부임하는 곳마다 뇌물을 탐하고 가혹한 행위를 하였다. 계사년(1893)에 한해가 극심하여 기근이 들었지만, 그는 災結을 숨기어 稅租와 함께 징수하므로 결국 민란이 발생하였다.
朴源明은 대대로 光州에서 살았고 많은 재산도 모았다. 그리고 그는 기민한 재주가 있어 무슨 일이든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또 그는 그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어서 그곳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閔泳駿이 기용한 것이다.
그러나 그 후 順天에도 민란이 발생하여 府使金甲圭를 쫓아내고, 靈光에서도 민란이 일어나 군수閔泳壽를 쫓아냈다.

3. 일식


3월 초1일 日食이 있었다.

4. 전봉준의 봉기


古阜에서 東匪 全琫準 등이 봉기하였다. 이때 박원명은 난민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조정의 호의를 표명하고 그들의 죄를 사면하여 鄕里로 돌려보내자 난민들은 모두 해산하였다. 東學 魁首 전봉준 등 수명은 어디로 갔는지도 몰랐다. 그 후 李容泰가 와서는 박원명이 하는 것과는 달리 백성들을 忤逆律을 적용하여 모두 죽이려고 하였고, 또 富豪들에게 민란을 주도했다는 구실을 붙여 뇌물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그가 監司金文鉉과 공모하여 감옥으로 이감된 백성들이 줄을 잇고 있으므로, 백성들은 분을 참지 못하고 다시 민란을 일으켰다.
전봉준은 집이 본래 가난한 데다가 의지할 곳도 없었다. 그는 오랫동안 동학에 물이 들어 항시 울분을 지니고 있었다. 민란이 일어날 때 많은 동학도들이 그를 괴수로 추대하였으나,
그가 간사한 뜻을 펴 보기도 전에 동학도가 해산하였으므로 자신도 창황히 피신하였다.
그 후 巡察使와 按覈使가 그를 급히 수색하자 그는 그의 일당 金箕範孫化中崔敬善 등과 모의하여 大事를 꾀하였다. 그들은 轉禍爲福策으로 백성들을 꾀어내어, 동학이 하늘을 대신하여 세상을 다스리고 또 나라를 보호하고 백성을 편하게 하며, 살인과 약탈을 하지 않고 오직 탐관오리들만은 용서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에 어리석은 백성들은 그들과 호응하고 右道 연해 일대의 10여 읍도 일시 호응하여 10일 만에 수만 명이 늘어났다. 동학도와 난민이 합류한 것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5. 李容泰의 유배와 金文鉉 삭직


古阜按覈使李容泰는 金堤로 유배하고, 全羅監司金文鉉은 직위를 삭탈하였다. 이들은 모두 일을 그르치어 민란을 더욱 악화시켰기 때문이다.

6. 홍종우의 김옥균 암살


儒生 洪鍾宇가 上海에서 金玉均을 살해하였다. 그가 본국으로 돌아온 후 조정에서는 김옥균에게 逆律을 추가 적용하였다.
홍종우는 경기도安山 사람이다. 그는 집이 가난하여 落拓不遇한 생활을 하면서 古今島로 갔다가, 다시 일본으로 들어가 김옥균과 함께 놀았다. 그는 언제나 틈만 있으면 김옥균을 죽여 나라의 걱정거리를 없애려고 하였으나 김옥균은 일당이 많아 뜻을 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해에 김옥균이 청나라로 유람하러 갈 때 홍종우를 데리고 상해로 갔는데, 이때 그는 김옥균을 창으로 찔러 살해하였다.
그리고 그의 시체에 양칠을 하여 부패하지 않도록 한 후 그 시체를 배에 싣고 본국으로 돌아오자 고종은 그의 시체를 鷺梁津에서 다시 처형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의 시신을 처형하기 전에 柳在賢의 아들 某는 그의 배를 해부하여 그의 간을 꺼내 먹고 李祖淵의 아들 李倬도 그곳을 가보았다.
그러나 기타 갑신정변 때 피살된 자제들 중 閔泳璇閔亨植,趙東潤韓麟鎬 등은 가지 않았다. 中宮은 이 소문을 듣고 탄식하기를, “재상의 아들들이 중궁의 양자보다 못하구나!”고 하였다. 고종은 홍종우를 초청하여 위로를 해주고, 그 후 얼마 안되어 과거를 설치하여 홍종우를 발탁한 즉시 弘文館校理로 임명하고 서울에다가 집을 하사하였다.

7. 김옥균 암살 전모


中東戰紀>에서 홍종우가 김옥균을 살해한 기사를 보면, 김옥균은 갑신정변 때 역모를 하다가 그 일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박영효 등과 함께 재산을 가지고 일본으로 도주하였다. 이때 김옥균은 「巖田周作」이라는 성명을 사용하였으나 그가 다시 중국에 들어가서는 「和三」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고, 서양의 각국을 유람하였을 때 그는 서양 옷을 입고 서양말을 하였다.
그리고 홍종우는 각국의 방언을 잘 알았고, 그도 역시 서양 복장을 한 후 독일과 프랑스를 유람하였다. 그리고 그는 혹 김옥균과 서로 만나면 반가운 척하였다. 그 후 계사년(1883) 김옥균이 오사카로 왔을 때도 홍종우는 그를 따라왔다. 그리고 갑오년(1894) 봄에 그들은 서로 중국을 유람하기로 약속하고 2월 21일 上海에 도착하여 北河南路 東和街 있는 吉島德三의 客舍에 숙소를 정하였다. 김옥균은 倭奴 北原延次郎을 데리고 청국인 吳靜軒과 함께 德三의 객사 2층에서 거처하고, 홍종우는 다른 방에서 혼자 거처하였다. 이때 김옥균은 그가 자기를 해치려고 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22일 새벽 洪鍾宇는 서양 돈 5천원권을 김옥균에게 보이며 小東門에 있는 天豊錢莊에 보내어 함께 무역을 하자고 하더니, 잠시 후 그는 다시 와서 “천풍전장 주인이 출타하여 오후 6시 정각에 온다고 하니 그때까지 기다립시다.”라고 하였다. 김옥균은 그 말을 유의하고 있었다.
그리고 홍종우는 오후 4시쯤에 조선관복으로 갈아입고 김옥균의 방으로 갔다. 김옥균은 서쪽 창가에 있는 藤榻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홍종우는 北原延次郎을 밖으로 나가라고 한 다음 갑자기 총을 꺼내어 쏘았다. 첫번째 맞은 곳은 왼쪽 볼이었다. 그 탄환은 볼을 뚫고 올라가서 턱의 오른쪽을 관통하였다. 선혈이 낭자하였다. 그는 통증을 못이겨 미친 듯이 아우성을 쳤다. 홍종우는 다시 총격을 가하였다. 그 탄환은 왼쪽 가슴을 뚫고 오른쪽을 통과하다가 皮膜을 뚫지 못하고 멈추어 있었다. 그리고 제3탄은 어깨 밑을 관통하였다.
이때 吉島 등 여러 사람들은 다락 밑에 있다가 별안간 탕 하는 소리를 듣고 문밖에서 어떤 사람이 花爆놀이를 하는 줄 알았다. 그리고 다락 3층에 있는 손님들에게는 그 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들이 떼를 지어 내려와 보니 김옥균이 총을 든 채, 동쪽의 다섯번째 방앞으로 도주하다가 땅에 쓰러져 죽어 있었다. 吉島 등은 일본 領使에게 그 사실을 보고하였으나, 그는 한국 사람들끼리 원수가 되어 하는 일이라며 들어보지도 않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上海令黃承暄은 일본영국미국 등 각국 관리를 대동하고 홍종우를 심문하였다. 홍종우는 모습이 훤칠하고 복장도 단정하게 입었다. 그는 강경한 어조로, “그는 大逆不道한 사람으로 사람마다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지금 나라를 위해 적을 죽였으니 죽음을 달게 받겠습니다”라고 소리쳤다. 잠시 후 그는 또 “나라의 명령을 받아 하는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청나라 관리들은 조선으로 전화를 하였는데 그 내용을 대충 열거하면, 김옥균은 조선의 反臣이며 홍종우는 관리이다, 이번 사건은 합리적인 일이므로 속히 석방하여 본국으로 송환하라는 것이었다. 그 후 16일, 상해령황승헌은 홍종우를 호위하여 縣署로 갔다가 다시 軍門의 勇丁 4명을 시켜 홍종우를 조선으로 송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北原延次郎은 처음에 김옥균의 시체를 싣고 일본으로 가려 하였으나 청나라 관리가 저지하자, 그는 초7일, 25일에 조선으로 보낼 棺이라고 하면서 湖南會館에다가 갖다 놓았다. 그 후 홍종우는 그 관을 싣고 귀국하여 길거리에 달아 놓고 소금물을 뿌렸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김옥균이 참변을 당했다는 소문을 듣고 그의 遺髮을 거두어 장례를 치르려고 하였다. 이 때 모여든 조정 대신 및 시골 紳士와 上下議院의 인원은 수천 명에 달하였다. 그들은 모두 그의 상여를 메려고 하였다. 그 후 시체가 도착했다는 소문이 들리자 각 신문사는 그 사실을 일제히 보도하며 그 치욕을 씻으려는 마음이 더욱 굳어졌다고 하였다.
한편, 홍종우가 귀국한 이후, 그 사건이 만리 밖에서 발생하여 들리는 말이 서로 다르므로 자세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中東戰紀>에 기재된 내용을 인용한 것은 청나라 사람들의 목격에 착오가 없을 것으로 믿기 때문에 여기에 기록하였다.
김옥균을 길거리에서 효수할 때 그곳을 지나던 일본인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위와 같은 기록을 참고하면, 그 사건을 國恥로까지 언급하였으니 김옥균이 무슨 덕을 쌓아 일본인들에게 그와 같은 인심을 얻었는지 알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은 갑신정변 때 諸賊 중에서도 김옥균이 가장 흑심을 품고 있었으므로 그가 만일 죽지 않았다면 갑오경장 이후에는 정반대 행위를 하였을 것이라고 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김옥균의 재주가 徐光範과 朴泳孝보다 더 낫기 때문에 그가 갑오경장을 맞았다면 그의 솜씨를 볼 만한 것이 많았을 것이라고 하였다.

8. 兩湖招討使洪啓薰의 출정


洪啓薰을 兩湖招討使로 임명하여 壯衛營의 병대를 인솔하고 호남의 東匪들을 토벌하게 하였다. 그리고 4월에 金鶴鎭을 전라감사로 임명하고 전라병사李文榮을 파직하여 徐丙黙을 대신 그 직위에 임명하였다.
이때 東匪의 경계가 점차 심하여 서울에서는 하루에 네다섯 번씩 놀랐다. 조정의 여론도 힘있는 관리들이 직무유기를 한 것은 그 허물이 閔泳駿에게 있다고 하였으나, 민영준은 그 여론을 무마하지 못하였으므로 이런 명령을 내려 하루 속히 부임하도록 한 것이다.
김학진은 辭陛하면서 편의대로 일을 보게 해 달라고 간청하므로 고종은 억지로 대답하기를, “경이 하고싶은 대로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김학진은 문관이라 난을 진압할 만한 재주가 없어서 가족과 작별할 때 두려운 기색을 보이며 눈물을 흘렸는데,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매우 걱정하였다.
서병묵도 그가 康津水使로 있을 때 성품이 청렴하고 백성들에게 善政을 한다는 소문이 있었으므로 다시 그를 除授하였으나, 다른 장점은 없었다.

9. 兩湖巡邊使李元會의 원병 파견


判尹李元會를 兩湖巡邊使로 임명하였다. 고종은 홍계훈으로부터 오랫동안 승전 소식이 없자 孤軍의 援兵이 없음을 우려한 나머지 이원회에게 江華兵과 淸州兵을 원병으로 보내게 하고, 아울러 홍계훈의 병사를 통제하도록 하였다.

10. 嚴世永안핵사 부임


嚴世永을 三南按覈使로 임명한 후 백성의 병폐를 보고하게 하였다.

11. 洪啓薰의 동학군 추적


초7일, 홍계훈은 청나라 군함 淸遠號와 우리 군함 蒼龍號 및 漢陽號에 京兵 800명을 싣고 군산항에서 전주로 들어가고, 초9일에는 2대 병력을 동원하여 金溝와 泰仁을 진주하였으며, 15일에는 1개 대대를 인솔하고 전주를 출발하여 東匪의 향방을 추적하였다.

12. 동학군 全州 점령 및 奴令과 吏胥의 싸움


27일, 동비가 전주를 함락하자 감사金文鉉이 도주하였다. 4월 초에 김문현은 列邑에서 병대를 모집하여 동비를 추격하기 위해 古阜의 黃土山까지 갔다가 동비에게 패하였고, 또 이때 홍계훈이 前鋒將으로 나서서 長城 月坪에서 동비와 싸우다가 패하였다.
한편, 동비들은 京兵 1개 대대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샛길로 井邑을 침범하여 홍계훈의 뒤를 포위하고 있다가 이날 새벽, 전주 西門에 도착하자, 김문현은 서문 밖 민가를 불태우고 城을 의지하여 방어망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正午가 지나 서문이 열리면서 동비들이 일제히 들어오므로, 김문현이 慶基殿으로 들어가 태조의 御眞을 지고 떨어진 옷과 짚신 차림으로 난민들 사이에 끼어 도주하므로 本營은 큰 난리가 일어났다.
그리고 경기전에는 은행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지난 무자년(1888) 봄에 까치와 白鷺 수천 마리가 이 은행나무를 둘러싸고 싸우다가 까치가 진 일이 있었으며, 기축년(1889) 정월에는 奴令들이 吏胥들과 몽둥이를 들고 싸우다가 수십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盤石里에서는 1천여 호가 모두 불에 타자 사람들은 이것을 까치가 싸운 응보라고 하였다. 이때 御眞이 蒙塵하고, 營下의 萬家가 동비에게 유린당하고, 망명한 奴令들은 동비에게 투항하여 吏胥들을 다 죽이려고 하므로 이서들은 도주할 때 그들의 집을 모두 불태우고 날마다 약탈을 일삼았다.

13. 洪啓薰의 全州 탈환전략


홍계훈이 전주에서 동비를 포위하였다. 그는 동비가 북쪽으로 달아났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의 뒤를 따라 28일 전주에 도착하였으나 전주성은 이미 함락된 뒤였다. 처음에 홍계훈이 우려한 것은 동비와의 중과부적인 데다가 그들은 더욱 흩어져 있어 앉아서 끌어들일 수 없으므로 약 10일 동안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나 전주성이 함락되자 그는 죄를 지을까 두려운 생각이 들어, 관군이 모인 틈을 타서 일거에 섬멸하려고 하였다. 이때 畿潮 지방의 援兵들이 날로 모여들고 湖左列郡에서 새로 모집한 의병들도 속속 도착하였다. 이에 그는 哨兵을 나눈 후 요충지를 수비하게 하여 동비의 돌격을 방어하고, 또 서로 연락할 수 있도록 포진한 후 오랫동안 동비를 포위하여 곤경에 처하도록 하였다.

14. 김문현 유배


金文鉉을 거제부로 유배하여 栫棘을 가하였다.

15. 청국에 군대파병을 요청


청나라로 원병을 청하였다. 이때 東匪의 기세가 날로 치성하여, 城邑이 비록 함락되더라도 백성들은 희색이 만면하였다. 그들은 혹 동비가 패했다는 말을 듣더라도 그 말을 믿지 않고 그럴 리가 없다고 하면서 관군이 패했다고 말하고, 서울의 대관들도 시골 사람에게 동비의 소식을 들으면 모두 탄식하면서 “어찌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리고 李元會가 떠난 후 서울에서는 유언비어에 서로 놀라, 혹은 전주가 함락되었다고 하고 혹은 동비가 錦江을 건넜다고 하면서 피난민들이 사방으로 도피하였다. 그리고 동비가 홍계훈에게 보낸 글에 「上奉國太公」이란 구절이 있자 홍계훈은 이 사실을 고종에게 보고하였다. 이를 본 兩殿은 크게 노하여, 동비를 속히 평정하지 않으면 점차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걱정이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閔泳駿을 불러 대책을 논하였다. 그것은 중국으로 전문을 보내 원병을 청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민영준은 “지난해 천진조약을 체결할 때 청일 양국이 조선으로 파병을 할 때는 서로 알려야 한다고 하였는데, 청나라는 우리에게 별다른 악의는 없지만 일본은 오랫동안 우리를 엿보고 있는 처지이므로, 그들이 만일 조약을 빙자하여 속히 오지 않으면 형세가 매우 위급하게 될 것이니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때 중궁이 동비가 보낸 글을 내놓으면서 꾸짖기를, “이 못난 놈아, 내가 어찌 일본놈의 포로가 되겠느냐? 다시는 임오년과 같은 일은 당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패하면 너희들도 멸종될 것이니 여러 말 말라”라고 하였다. 이에 민영준은 袁世凱에게 간곡히 원병을 청하였고 원세개는 李鴻章에게 전화를 걸어 이 사실을 보고하자, 이홍장은 허락한다는 답서를 보냈다.
“지난번 한국정부에서 우리나라로 보낸 서한의 내용은 이러했다. 전라도 관할인 泰仁古阜 등지의 백성들이 흉하고 사나워서 본래부터 다스리기 어려웠습니다. 그들은 요즈음 東學敎匪에 붙어 1만여 명의 무리를 이루어 10여 군데의 성읍을 빼았고 이제 또 全州省을 함락시켰으므로, 군대를 보내 그들을 다스리기 전에 미리 宣撫를 하였습니다만 그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항전하여 우리 군대를 격파하고 많은 병기를 빼앗았습니다.
이와 같이 흉측한 자들이 오랫동안 소란을 피우는 것은 매우 우려되는 일입니다. 하물며 그곳은 서울과의 거리가 4백몇십 리밖에 되지 않는데, 만일 그들이 다시 북상하도록 놓아둔다면 왕성 주위가 소란하게 되어 그 피해가 적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새로 만든 군대들은 도회지만 지키고 있고 또한 전투을 해보지 않은 병사들이므로 그들을 섬멸하기 어려운 실정에 놓여 있습니다.
만일 凶寇들이 오랫동안 지속된다면 중국 정부에 우려를 끼치는 일이 더욱 많아질 것입니다. 지난 임오년과 갑신년 두 차례의 내란 때도 모두 중국의 병사들에 의지해서 진정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번 원군문제도 귀 총리에게 간청하오니, 속히 北洋大臣께 전문를 보내어 몇 개의 부대를 보내도록 해주십시요. 이들이 속히 와서 저희 군대 대신 동비를 초멸하였으면 합니다. 아울러 우리 군대에 軍務를 따라 배우게 하여 방어의 계책을 미리 세울 수 있게 하였으면 합니다. 한번 크게 도적들을 막아 쓸어 없애버리게 되면 감히 계속 주둔해서 막아줄 것을 바라지 않고 즉시 철군을 청하여 大兵을 오랫동안 밖에서 수고롭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울러 귀 총리께서는 속히 도움을 주시어 이와 같은 급박한 처지를 구제해 주시기 바랍니다.(<中東戰紀>)”

15. 청국에 군대파병을 요청


청나라로 원병을 청하였다. 이때 東匪의 기세가 날로 치성하여, 城邑이 비록 함락되더라도 백성들은 희색이 만면하였다. 그들은 혹 동비가 패했다는 말을 듣더라도 그 말을 믿지 않고 그럴 리가 없다고 하면서 관군이 패했다고 말하고, 서울의 대관들도 시골 사람에게 동비의 소식을 들으면 모두 탄식하면서 “어찌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리고 李元會가 떠난 후 서울에서는 유언비어에 서로 놀라, 혹은 전주가 함락되었다고 하고 혹은 동비가 錦江을 건넜다고 하면서 피난민들이 사방으로 도피하였다. 그리고 동비가 홍계훈에게 보낸 글에 「上奉國太公」이란 구절이 있자 홍계훈은 이 사실을 고종에게 보고하였다. 이를 본 兩殿은 크게 노하여, 동비를 속히 평정하지 않으면 점차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걱정이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閔泳駿을 불러 대책을 논하였다. 그것은 중국으로 전문을 보내 원병을 청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민영준은 “지난해 천진조약을 체결할 때 청일 양국이 조선으로 파병을 할 때는 서로 알려야 한다고 하였는데, 청나라는 우리에게 별다른 악의는 없지만 일본은 오랫동안 우리를 엿보고 있는 처지이므로, 그들이 만일 조약을 빙자하여 속히 오지 않으면 형세가 매우 위급하게 될 것이니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때 중궁이 동비가 보낸 글을 내놓으면서 꾸짖기를, “이 못난 놈아, 내가 어찌 일본놈의 포로가 되겠느냐? 다시는 임오년과 같은 일은 당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패하면 너희들도 멸종될 것이니 여러 말 말라”라고 하였다. 이에 민영준은 袁世凱에게 간곡히 원병을 청하였고 원세개는 李鴻章에게 전화를 걸어 이 사실을 보고하자, 이홍장은 허락한다는 답서를 보냈다.
“지난번 한국정부에서 우리나라로 보낸 서한의 내용은 이러했다. 전라도 관할인 泰仁古阜 등지의 백성들이 흉하고 사나워서 본래부터 다스리기 어려웠습니다. 그들은 요즈음 東學敎匪에 붙어 1만여 명의 무리를 이루어 10여 군데의 성읍을 빼았고 이제 또 全州省을 함락시켰으므로, 군대를 보내 그들을 다스리기 전에 미리 宣撫를 하였습니다만 그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항전하여 우리 군대를 격파하고 많은 병기를 빼앗았습니다.
이와 같이 흉측한 자들이 오랫동안 소란을 피우는 것은 매우 우려되는 일입니다. 하물며 그곳은 서울과의 거리가 4백몇십 리밖에 되지 않는데, 만일 그들이 다시 북상하도록 놓아둔다면 왕성 주위가 소란하게 되어 그 피해가 적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새로 만든 군대들은 도회지만 지키고 있고 또한 전투을 해보지 않은 병사들이므로 그들을 섬멸하기 어려운 실정에 놓여 있습니다.
만일 凶寇들이 오랫동안 지속된다면 중국 정부에 우려를 끼치는 일이 더욱 많아질 것입니다. 지난 임오년과 갑신년 두 차례의 내란 때도 모두 중국의 병사들에 의지해서 진정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번 원군문제도 귀 총리에게 간청하오니, 속히 北洋大臣께 전문를 보내어 몇 개의 부대를 보내도록 해주십시요. 이들이 속히 와서 저희 군대 대신 동비를 초멸하였으면 합니다. 아울러 우리 군대에 軍務를 따라 배우게 하여 방어의 계책을 미리 세울 수 있게 하였으면 합니다. 한번 크게 도적들을 막아 쓸어 없애버리게 되면 감히 계속 주둔해서 막아줄 것을 바라지 않고 즉시 철군을 청하여 大兵을 오랫동안 밖에서 수고롭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울러 귀 총리께서는 속히 도움을 주시어 이와 같은 급박한 처지를 구제해 주시기 바랍니다.(<中東戰紀>)”

16. 이홍장의 답전


“청국 북양대신이홍장의 답전은 이러했다. 이미 丁汝昌에게 칙령을 내려 해군함 濟遠號와 揚威號 두 척을 인천으로 파견하여 서울의 상인들을 보호하게 하였고 아울러 直隷提督葉志超에게 太原鎭總兵聶士成과 함께 해군 1,500명을 선발하여 그들에게 군장비를 지급하고 이들을 商船에 나누어 태우고 차례로 출발하도록 하였으며, 한편, 주일공사汪使에게 전화를 하여 이 사실을 일본 외무성으로 알려 전일의 조약을 준수하였습니다. (<中東戰紀>, 汪使는 淸國 주일공사汪鳳藻)”

17. 민영준의 고종 기만


閔泳駿은 고종이 동학난을 키웠다는 죄로 벌을 받을까 싶어 신료들에게 외부의 일을 보고하지 못하도록 하고 이홍장의 답전 내용도 비밀에 붙여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호남에서 난이 일어난 사실을 고종만 모르는 것이 아니라 조정의 하급 신하들도 그 비밀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은 자세히 알지 못하였다.
하루는 趙東潤이 고종을 알현하자 고종이, “도성의 인심이 어떻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는, “피난민들이 사방으로 피신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잠시 후 민영준이 들어오자 고종은 또 “도성의 인심이 어떻습니까?”하고 묻자 그는, “옛날처림 평온합니다”라고 하였다. 고종이 다시 “조동윤의 말은 피난민이 사방으로 피신을 한다는데 당신은 평온하다고 하니 도대체 어느 말이 옳은 것입니까?”라고 하자 민영준은, “조동윤은 小臣이라 道를 어지럽혀 聖上의 이목을 가리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민영준이 밖으로 나오자 조동윤은 그를 맞아 읍을 한 다음 큰 소리로 “전주가 함락되고 도성이 텅텅 비었는데 공은 백성이 모두 평온하다고 하니, 누가 도를 어지럽히며 누가 성상의 이목을 가리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민영준은 아무 대답도 못하고 눈에 노기를 띠고 나갔다.
이때 민영준은 근심과 공포감에 쌓여 어떻게 할 바를 몰랐다. 그는 날마다 銀을 쌓아둔 곳간에 들어가서 은덩이를 쓰다듬어 보다가 서쪽 곳간에 있는 은을 동쪽 곳간으로 옮기고는 잠시 후에 다시 동쪽 곳간의 은을 서쪽 곳간으로 옮겨 놓는 등 분분하게 움직이다가, 긴 한숨을 쉬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이때 바깥사랑에는 많은 公卿들이 있었지만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閔斗鎬는 민영준과 재산을 달리 모아, 따로 錢穀과 보화 100만냥을 저축해 놓았다가 이때 하인들을 불러 탄식하기를, “너희들이 여러 해 동안 일을 하였지만 노고의 보수를 받지 못했으니 이것들을 가져가거라”고 하면서 한 사람당 白米 다섯 말과 當五錢 100文을 나누어 주었다. 이에 그 하인들은 기꺼이 받고 웃으며 헤어졌다.

18. 안국방의 감고당


숙종 기사년(1689)에 仁顯王后는 安國坊 私第로 쫓겨났다. 그 집은 인현왕후가 복위한 후 대대로 봉쇄하여 臣庶들이 거처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나 中宮이 다시 개수하여 閔泳駿에게 하사하면서 문처마 「感古堂」이란 편액을 붙여두었다.
이해 봄에, 민영준이 일찍 일어나 보니 큰 구렁이가 자신이 누워 있는 그 옆에서 도사리고 있었다. 그는 크게 놀라 뛰어나오면서 하인을 불렀다. 그렇게 소란을 피우는 사이에 그 구렁이는 어디론가 가 버리고 보이지 않았다. 민영준은 점점 더 그것이 나쁜 징조라고 생각이 들어 그 사실을 중궁에게 알리고 다시 그 집을 폐쇄하여 校洞으로 이사하였는데, 그 후 얼마 안되어 그가 도주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사람들은 그것을 구렁이의 장난이라고 하였다.

19. 중궁의 아리랑 타령


정월에 고종이 낮잠을 자다가 광화문이 무너지는 꿈을 꾸었다. 고종은 너무나 놀라 잠에서 깨어났으나 매우 좋지 않은 꿈이었다. 이해 2월에 창덕궁으로 移御하여 그 즉시 東宮을 개수하였다. 이때 南道에서는 戒嚴이 급박하였지만 토목공사는 더욱 열을 올렸다.
고종은 밤만 되면 전등을 켜 놓고 광대들을 불러 새로운 노래를 부르라고 했다. 이번 곡은 「아리랑타령」이라고 했다. 이 타령이란 말은 곡조를 길게 빼는 것을 세속에서 일컫는 말이다. 原任大臣閔泳柱는 그 광대들을 거느리고 오직 아리랑타령만 전담하고 있으면서 그 우열을 논하여, 尙方의 金銀으로 상을 주었다. 이 놀이는 大鳥圭介가 대궐을 침범한 후에 중지되었다.

20. 식년소과


이달에 式年小科의 방목을 발표하여 생원과 진사 1,300명을 선발하였다. 옛날의 제도에는 생원, 진사가 200명에 불과하였지만 근년에는 고종이 內帑錢의 궁색함을 우려하여 매 식년마다 100명을 추가 선발하였다. 이들은 모두 納錢者를 모집하여 原榜에 붙인 자로서 이를 「原榜進士」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납전자만 추가 선발하면 명문거족들에게 원한을 살 것 같아 下民들에게까지 은전을 내려 大臣, 儒賢, 東宮, 官屬의 子弟, 兄弟, 侄, 孫으로부터 公主, 翁主, 前世名臣, 祀孫 및 동궁의 同年人과 解試에 참여한 70세의 노인을 모두 榜末에 붙여 이를 「恩典進士」라고 하면서 中外人을 기쁘게 하였다.
이에 名賢의 祀孫으로 위장한 자, 수염이 새파란 사람이 甲戌生이라고 한 자, 심지어는 염치없는 조정 대신들까지 시골 부자들에게 많은 뇌물을 요구하고 자기 친척이라고 하면서 윤리를 무시하고 나라를 속여, 갖은 간사한 일을 자행하였다. 이해 봄에 생원과 진사의 會試가 2월에 있었으나 賊徒의 戒嚴으로 인하여 방목을 발표할 시기가 연기되었다가, 이때 조촐하게 거행하였다.
그러나 먼 곳에 사는 선비들은 큰 난리가 일어날까 싶어 일찍 귀향하였으므로, 그들은 白牌도 받지 못하고 襴衫과 幅巾도 갖추지 못한 채로 떠났다. 이를 그때 사람들은 「空名進士」라고 하였다. 그리고 옛날 제도에 생원과 진사의 방목을 낼 때는 방목 한 개에 다섯 명을 적었으므로 방목 40개를 내야만 200명이 되었다. 그리고 방목 끝에는 「畢」字를 써 이를 畢度라고 하였다. 이 방목은 돈을 내는 사람이 정원에 차지 않으면 수시 모집하여 수시로 방목을 내었으므로 매일 1~2번씩 방목을 낸 셈이어서 결국 「필」자는 쓰지도 못한 채 끝이 났다. 그것은 합격과 불합격을 막론하고 금전만 들어가면 방목을 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書吏들은 고시관과의 내통으로 농간을 부려 白牌를 위장하여 쓰고 片榜에다 첨가 기록하였으며, 혹 시골의 간활한 무리들은 스스로 백패를 만들어 자기의 시골집으로 내려간 뒤 진사 행세를 하기도 하였다. 진사가 없어진 지 이미 오래되었지만 이 방목과 같이 무질서한 것은 일찍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조선 진사는 금년에 끝이다”라고 하였는데, 그 후 과연 그들의 말과 같이 되었다.

20. 식년소과


이달에 式年小科의 방목을 발표하여 생원과 진사 1,300명을 선발하였다. 옛날의 제도에는 생원, 진사가 200명에 불과하였지만 근년에는 고종이 內帑錢의 궁색함을 우려하여 매 식년마다 100명을 추가 선발하였다. 이들은 모두 納錢者를 모집하여 原榜에 붙인 자로서 이를 「原榜進士」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납전자만 추가 선발하면 명문거족들에게 원한을 살 것 같아 下民들에게까지 은전을 내려 大臣, 儒賢, 東宮, 官屬의 子弟, 兄弟, 侄, 孫으로부터 公主, 翁主, 前世名臣, 祀孫 및 동궁의 同年人과 解試에 참여한 70세의 노인을 모두 榜末에 붙여 이를 「恩典進士」라고 하면서 中外人을 기쁘게 하였다.
이에 名賢의 祀孫으로 위장한 자, 수염이 새파란 사람이 甲戌生이라고 한 자, 심지어는 염치없는 조정 대신들까지 시골 부자들에게 많은 뇌물을 요구하고 자기 친척이라고 하면서 윤리를 무시하고 나라를 속여, 갖은 간사한 일을 자행하였다. 이해 봄에 생원과 진사의 會試가 2월에 있었으나 賊徒의 戒嚴으로 인하여 방목을 발표할 시기가 연기되었다가, 이때 조촐하게 거행하였다.
그러나 먼 곳에 사는 선비들은 큰 난리가 일어날까 싶어 일찍 귀향하였으므로, 그들은 白牌도 받지 못하고 襴衫과 幅巾도 갖추지 못한 채로 떠났다. 이를 그때 사람들은 「空名進士」라고 하였다. 그리고 옛날 제도에 생원과 진사의 방목을 낼 때는 방목 한 개에 다섯 명을 적었으므로 방목 40개를 내야만 200명이 되었다. 그리고 방목 끝에는 「畢」字를 써 이를 畢度라고 하였다. 이 방목은 돈을 내는 사람이 정원에 차지 않으면 수시 모집하여 수시로 방목을 내었으므로 매일 1~2번씩 방목을 낸 셈이어서 결국 「필」자는 쓰지도 못한 채 끝이 났다. 그것은 합격과 불합격을 막론하고 금전만 들어가면 방목을 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書吏들은 고시관과의 내통으로 농간을 부려 白牌를 위장하여 쓰고 片榜에다 첨가 기록하였으며, 혹 시골의 간활한 무리들은 스스로 백패를 만들어 자기의 시골집으로 내려간 뒤 진사 행세를 하기도 하였다. 진사가 없어진 지 이미 오래되었지만 이 방목과 같이 무질서한 것은 일찍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조선 진사는 금년에 끝이다”라고 하였는데, 그 후 과연 그들의 말과 같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