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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삼성 부회장과 서지현 검사의 경우

소설가 이재운 2018. 2. 6. 12:41

이재용 삼성 부회장과 서지현 검사는 이 사회를 엿볼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 같다.

무지와 탐욕의 바다에 던져진 이재용과 서지현 두 사람의 사건을 구성해보자.


범죄자 이재용은 대통령 박근혜의 강권을 이길 수 없어 수동적으로 따랐을 뿐이라는 이유로 무죄 혹은 일부 무죄가 되었다. 세계적인 대기업 삼성의 사실상 주인인 이재용이 대통령의 강권을 거부하지 못한 것이 무죄라면, 일제 치하 그 많은 지식인들이 일제총독부의 요구를 거부하지 못해 친일 시를 쓰고, 친일 발언을 한 것을 우리가 어떻게 단죄할 수 있는가. 

더구나 이재용이 삼성 수장으로서 갑질한 그 수많은 사례는 다 무엇인가. 인간사회를 정녕 사바나의 약육강식의 짐승 사회로 인정하겠다는 것인가. 

난 문재인 정부가 이재용에 대한 처벌 의지가 있는지 줄곧 의심해왔고, 사실 여부에 관계없이 사법부는 황당한 법리로 그를 풀어주었다. 이런 사법부, 이런 정부가 있는 한 대한민국의 미래는 북극 지대의 흑야와 같을뿐이다.


우리는 불의 앞에 당당하게 맞서 <목숨이라는 최종무기>를 던진 선열(先烈 ; 나라 위해 목숨 바친 선조)들을 기린다. 여기에 박근혜와 이재용의 부당거래를 비춰보면 더럽고 악취가 날 뿐이다.


나는 서지현 검사 사건을 보면서도 두 가지 다른 시각을 갖고 있다.


하나는 법집행을 담당하고, 사회적으로 '권력기관'으로 간주되는 검사 자신이 성희롱을 당하면서도, 그것도 대여섯 차례 손길이 오는 데도 뿌리치지 않고 참았다는 현실에서 매우 비루한 인간성을 본다. 검사로 임용될 때는 범죄에 당당하게 맞서 싸우겠다는 각오를 했을 텐데, 그런 각오는 어디 가고, 불이익이 두려워 그냥 앉아서 성희롱을 계속 당했다는 것인지 상상이 안된다. 말하자면 검사가 성추행을 당할 때 왜 안된다고 말하지 못했는지, 왜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는지, 그 손을 뿌리치지 않았는지 답답하다. 

서 검사를 변호하는 이들은, 불이익이 뻔한 데 어떻게 항거하느냐고 변명하는데, 그런 비겁한 변명은 적어도 내게는 아무런 감동조차 주지 못한다. 피해자가 이웃집 아주머니나 아랫집 아가씨라면 그게 말이 되지만, 대한민국 검사가 그런 하찮은 변명을 하면 안된다.


더구나 이미 공소시효가 지나 사건 가치가 없어진 이제야 공론화하는 것도 비겁하다. 가해자로 지목된 안태근이란 법무부 전 검찰국장이 온누리교회에서 간증하는 걸 보고 화가 치밀어 이 사건을 공개했다고 하는데, 그 동기가 그리 아름답지 못하다. 후배 검사를 공개석상에서 성추행하는 놈이, 그러면 갑자기 하느님 믿고 성인군자라도 될 줄 알았단 말인가. 나쁜 놈은 계속 나쁜 놈으로 살아가는 게 가장 큰 벌이다. 그럴수록 업보가 늘어나고, 언젠가는 참혹한 삶의 질곡으로 빠져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거짓으로 신앙간증하고, 온누리교회와 일반 교회가 하는 악의 순환구조를 잘 보여주었다(이 평가는 우병우 사단으로서 그가 한 짓에 대한 것이지 성희롱 사건과는 아직 관련이 없다) 


서지현 검사 관련 또 하나의 시각은 성희롱이 일어나던(아직은 서 검사의 일방 주장이지만) 그 자리에 법무장관이 있고, 검사장들이 있고, 중견 검사들이 있었다는데, 검사 한 놈이 여성 검사의 엉덩이를 주무르고 허리를 감싸안는 걸 보고도 못본 척했다면 이 놈들은 검찰이 아니라 집단범죄조직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동료의 범죄라고 해서 눈 감아주고, 기소권을 남용하여 불기소하는 이런 더러운 집단은 뼈대 자체를 갈아바꿔야만 한다. 공수처(공직자비리수사처)를 어서 만들어 검사와 판사, 경찰 등을 전담 수사하지 않으면 이런 악의 순환구조를 뿌리뽑기 어렵다.

따라서 이번 사건은, 서 검사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검찰 내부 조직과 기강, 도덕성에 더 선명한 가치를 요구하는 계기로 논의되기를 바란다. 

그럼에도 언론과 방송은 <선데이서울(벌거벗은 여성 사진과 불륜 이야기로 도배하던 정부가 설립한 서울신문사 발행 더러운 주간지)> 딱 그 수준으로 이 사건을 바라보고 있다.


우리는 이런 더러운 사건에서 시선을 돌려 좀 더 가치있고 모범적인 호모 사피엔스들을 돌아봐야 한다.

박종철은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인데도 끝까지 동료들의 이름과 행방을 불지 않았다.

지오다노 브루노 신부는 장작불이 자신의 몸으로 옮겨붙는 중에도 진실을 저버릴 수 없다며 그 뜨거운 화형을 감당해냈다.

중봉 조헌과 영규 스님은 누가 싸우라고 시키지도 않고, 싸울 의무도 없는데 일본군과 싸우다 모두 다 전사했다.

주논개는 일본군과 놀아주기만 하면 목숨을 지키고, 삶을 보장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 적장의 허리를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천주를 믿지 않겠다고 한 마디만 하면 순조 이공의 조정에서 크게 쓰이고 영달할 수 있었지만 기꺼이 목을 내밀어 칼을 받았다.

안중근은 그가 원하면 하얼빈역에 가지 않을 수 있었지만, 누구도 강요한 적이 없지만 스스로 가서 적을 쏘고 자신도 죽었다.


도대체 이런 사례를 얼마나 많이 들어줘야 비겁하지 않을 수 있는가. 

그러지 못했음을 후회할지언정 자랑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피를 토하며 울부짖을지언정 자신의 용기없음을 미화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