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마라 지바는 누구인가?
쿠마라 지바(Kumārajīva)는 지금의 신장 위구르 지역 쿠차 왕국의 왕족 출신이다.
천재였으나 가장 비참한 인생을 산 승려 출신이면서 마지막에는 강제결혼을 당해 거사로서 생을 마쳤다.
그럼으로써 중국과 한국에 붓다의 가르침을 가장 빨리 가장 정확하게 전하는 위대한 공덕을 세웠다. 하늘은 종종 그렇게 시련을 준다.
* 구마라집(鳩摩羅什) ; 쿠마라 지바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이렇게 번역했다. 다만 지금의 중국어 발음으로는 '지우마루오쉬'가 되는데, 5호 16국 시대만 해도 대략 구마라집 정도로 읽었던 것같다. 우리 삼국시대에 들어온 한자어 발음이 초기 한자 발음이고, 우리나라는 이 발음을 지켜왔지만 중국은 여러 차례 발음 변화를 겪어 오늘에 이르렀다. 상나라 때 만들어진 갑골문자 등 초기 한자는 글자 한 자마다 단음으로 발음되었다.
그의 시련은 태생적이다. 아버지 쿠마라 야나는 인도 북부의 카슈미르 출신의 귀족이다. 그는 쿠차 왕국으로망명, 지금의 칭하이성(淸海省) 신장 위구르 자치구역 내에 있던 쿠차 왕국의 공주(당시 국왕의 여동생) 지바카와 결혼했다. 카슈미르에서 쿠차왕국은 그리 멀지 않다. 천산남로로 가는 실크로드가 있기 때문이다.
* 아버지 ; 쿠마라 야나(Kumārāyana ; 젊음이란 뜻. 童) 어머니 지바카(Jīva; 장수란 뜻. 壽)
* 아버지 이름과 어머니 이름을 따는 전통에 따라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아이의 이름은 쿠마라 지바가 되었다.
- 지도 왼쪽 출발점이 인도 북부의 카슈미르다. 여기서 실크로드의 주로인 천산남로를 따라 동쪽으로 가면 타클라마칸 사막의 오아시스 왕국 쿠차가 나온다. 만년설이 녹은 맑은 물이 쿠차에 오아시스를 이뤘다. 북쪽은 해발 4000미터의 천산, 남쪽은 타클라마칸 사막, 사막의 남쪽은 티베트, 쿠차 동쪽은 중국 서부인 량주(凉州)가 나온다. 삼국지에도 자주 나오는 서융(西戎) 즉 강족과 저족이 사는 땅이고, 동탁의 고향이다.
쿠차를 지나지 않고는 실크로드 교역이 이뤄지지 않을만큼 이 나라는 대상들의 쉼터요, 교역의 중심지로서 엄청난 부를 누렸다.
쿠차국은 인도와 아랍과 달리 백인계들이 살았다. 그래서 눈이 파랗고 얼굴이 흰 코커서스 종이 많다. 쿠차 지역은 지금도 대문을 파란색으로 칠하고, 파란색 옷을 즐겨 입는다.
쿠마라 지바는 344년에 태어났다. 왕족이지만 왕위 다툼에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은 어머니는 그를 출가시켜 아버지의 고향인 북인도 간다라와 카슈가르로 유학을 보냈다. 아홉 살 때 일이다.
처음에는 산스크리트어와 원시경전, 아비달마를 배우다가 대승불교를 공부했다. 이후 쿠차로 돌아와 천불동으로 유명한 키질석굴에서 공부했다. 승려가 들어가 살며 공부하는 구멍만 339개, 석굴은 동서로 2킬로미터에 이른다. 승려 약 만 명이 이곳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 천불동 키질석굴(위;키질은 붉은색이라는 뜻)과 파란색 물감 청금석(아래). 지금도 불화의 안료로 쓰이는데, 이 물감이 서역으로 혹은 중국이나 한국으로 오기도 했다. 쿠차 사람들은 이 색깔을 큐크라고 불렀다. 큐크는 하늘을 뜻하는 말로도 쓰였다. 흉노 후예인 몽골이 '파란 하늘'을 뜻하는 케케 텡그리의 그 '케케'가 '큐크'와 같은 말이다.
쿠차에서는 매우 유명한 승려가 되었다. 19살이 되었을 때 그의 명성은 중국까지 퍼졌다.
그런데 중국 전진(前晉)의 황제 부견이 이 소문을 듣고 장군 여광을 보내 쿠차를 정벌하고, 쿠마라를 잡아오게 했다.
여광이 7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쿠차를 정벌하면서 쿠마라 지바의 외숙부인 국왕이 죽고 나라가 망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사원에 있던 그는 부견의 명령으로 기어이 포로가 되었다. 이때 여광은 명성으로는 백발 노인쯤 될 줄 알았던 쿠마라 치바가 열아홉 살 청년이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여광은 군대를 이끌고 돌아오는 중에 그의 모국인 전진이 후진에게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수도인 장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그 중간쯤 되는 량주(凉州)에 머물러 후량(後凉)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막상 그를 초대하려던 부견이 사라지자 여광은 쿠마라 지바를 더욱 모욕했다.
저족(티베트 계열로 삼국지에도 자주 등장하는 西戎은 바로 저족, 강족으로 구성됨) 출신인 여광은 쿠마라가 얼마나 유명한 승려인지 보자며 말에서 떨어뜨리기도 하고, 쿠마라의 사촌여동생과 강제로 동침하도록 요구하는 등 못된 짓을 일삼았다. 쿠마라가 거부하자 여광은 다른 여자를 데려다 동침을 요구하면서, 같이 자지 않으면 여자를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이에 쿠마라는 굴복했다.
계율을 어긴 쿠마라는 가사를 벗어버린다. 이런 삶이 무려 18년간 이어졌다. 그 사이 쿠마라 지바는 중국어와 한문 공부에 집중하였다.
그때, 이전에는 전진에 복속돼 있던 강족 요양(姚襄)이 장안을 점령, 후진(後秦)을 세웠는데, 그의 아들 요흥(姚興)이 여광이 세운 후량까지 쳐서 복속시켜버렸다. 이때 쿠마라 치바의 명성을 알고 있던 요흥은 그를 장안으로 초빙하여 국사로 모셨다. 간난신고에도 그의 나이는 아직 35세, 이때부터 쿠마라 치바는 요흥의 강력한 지지를 등에 업고 장안에 들어온 402년부터 죽을 때까지 경전 번역과 불교 보급에 크게 이바지한다.
어찌 보면 여광에게 당한 시련과 모욕과 간난신고는 '귀인' 요흥을 만나기 위한 인연이었는지도 모른다. 불심이 깊은 요흥은 쿠마라를 위하여 소요원(消遙園)을 지어주며 오로지 불경 번역에 전념해달라고 부탁했다.
* 붓다의 말씀을 번역하는 이의 9대 원칙
1) 번역의 주인공(譯主) : 정면의 좌석에 앉아, 원본의 산스크리트 문장을 낭독한다. 역자로서 번역된 경전에 그 이름이 기록되 는 사람은 이 역주이다.
2) 번역의 제1 부주인공(證義) : 역주의 왼쪽에 앉아, 역주를 도와 산스크리트 원문을 ‘평량(評量)’한다고 되어 있다. 역주와 더불어 원 문의 구성이나 뜻을 검토하는 직책이다.
3) 번역의 제2 부주인공(證文) : 역주의 오른쪽에 앉아, 역주가 낭독하는 산스크리트 문장을 듣고, 그 글자와 발음에 관해 검토하는 직 책이다.
4) 소리번역자(書字) : 산스크리트 원문의 낭독을 자세히 듣고, 그 음을 한자로 나타낸다. 즉 범음(梵音)을 한자로 소리번역(音寫)하는 직책이다. 이를 테면 sutra를 음사하여 ‘수다라(修多羅)’로 하는 일 따위이다.
5) 뜻번역자(筆受) : 범음을 옮겨서 중국어로 만든다고 되어 있다. 소리번역자(書字)가 소리번역(음사)의 단계에 있는 데 대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여기서는 뜻번역(의역)이 이루어진다. 이를테면 ‘수다라’를 번역하여 ‘경(經)’이라 하는 일 따위이다. 단 여기서는 아직도 단어의 번역 단계이다.
6) 글을 짓는 자(綴文) : 문자를 연결시켜서 구절을 이루게 한다고 되어 있다. 번역된 단어를 놓고, 그 순서를 고쳐서 한문의 문법에 맞는 순서로 배치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필수의 단계에서는 ‘조견오온(照見五蘊) 피자성공견차(彼自性空見 此)’라고 되어 있는 것을 여기서는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이라고 하는 따위가 그것이다.
7) 교정자(參譯) : 양국의 글자를 검토하여 잘못이 없게 하는 직책이다. 즉 번역문을 다시 한 번 원문과 대조하여 검토하는 일이다. 여기서부터는 문장을 다듬는 단계로 들어 간다.
8) 글 다듬는 자(刊定) : 지리한 데를 깍아 구절을 결정한다고 되어 있다. 문장의 검토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명(明)’이 란 무명(無明)이 없는 것이라 보아, ‘무무명(無無明)’이라 되어 있는 것을 지루하다 하여 두 ‘무(無)’를 삭제하여 다 만 ‘명(明)’이라고 하는 따위이다.
9) 마지막으로 번역문 손질하는 사람(潤文) : 승려로 임명하고 남향하여 자리를 잡는다고 되어 있으며, 역주(譯主) 다음 가는 중요 직책이다. 그 임 무는 문장의 마지막 손질이다. 이를테면『반야심경』의 번역에 보이는 ‘일체고액(一切苦厄)’이라는 구절은 산스크리트 원본에 없다. 또 ‘시고공중(是故空中)’이라 되어 있는 ‘시고’도 원본에는 없다. 그것들은 윤문이 문장을 손질할 때 넣은 것이 분명하다.
이로써 인도와 중국의 중간에 머물며 어려서부터 인도 불교를 익혀온 쿠마라 지바는 유려한 문체와 정확한 뜻으로 불경을 번역하기 시작한다. 그의 문하에는 800여 명의 학승이 모이고, 2000여 명이 따랐다고 한다. 오늘날 그가 번역한 아미타경, 법화경, 반야경, 대지도론, 중론, 유마경 등은 지금도 그대로 쓰인다.
그는 공(空), 극락(極樂), 공명조(共鳴鳥;실크로드의 상상의 새, 머리가 두 개이나 지극히 사이가 나쁘다. 결국 한쪽 머리가 다른 쪽 머리에 약을 먹여 죽였는데, 결국 자기도 죽었다는 최악의 사이를 상징한다)를 최초로 만들어냈다.
그는 외쳤다. 시련과 고난 속에서 붓다가 될 수 있고, 번뇌 속에 반야가 깃들어 있다고. 파계승이 되었지만 평생 붓다의 제자임을 잊지 않고 삶을 살아낸 그는 위대한 성자가 되었다.
* 한편 쿠마라 지바가 죽은 413년에서 한참 늦은 520년경 소림사에 등장했다는 보리달마가 중국에 불교가 없어 면벽 9년을 했다는 이야기는 완전한 허구다. 중국에서 만들어진 선종을 부각시키기 위해, 인도 출신의 평범한 승려 보리달마를 중국식 판타지로 만들어낸 것이라는 게 정설이다.
- 쿠마라 지바의 고향 쿠차, 지금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세워진 동상
한편 KBS에서 그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다만 '푸른 눈'은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 그는 인도인과 백인계 쿠차인 혼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