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가 추사체를 쓰기까지
당신이 목수인가? 그럼 대패는 몇 개나 닳아 없앴는가? 당신이 작가인가? 컴퓨터 키보드를 몇 개나 닳아 없앴나? 당신이 화가인가? 버린 붓이 몇 자루인가? 당신이 농사꾼인가? 닳아없앤 괭이와 삽이 몇 자루인가? 그는, 예술가는 금강안(金剛眼)과 혹리수(酷吏手)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금강역사 같은 매서운 눈초리, 혹독한 세금징수원 같은 치밀한 손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에게 그런 눈초리와 손끝이 있는가? - 박수근의 금강역사(왼), 석굴암 금강역사(오른). 온 신경을 집중하여 수행자를 지키는 천신이다. 이 금강역사가 글을 쓰는 내 등뒤에 지켜서 있다고 상상하라. 이 금강역사가 그림을 그리는 그대 등뒤에 서 있다고 상상하라. 이 금강역사가 글씨를 쓰는 그대 등뒤에 서 있다고 상상하라. 김정희가 추사체를 쓰기까지 "나는 평생에 벼루 열 개를 밑창 내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습니다" - 벗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 중 김정희는 안동김씨 세도기에 살던 지식인으로서 0630의 기개로 그들에게 맞선 인물이다. 그러니 일생이 우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55세이던 1840년에 유배에 들어가 9년째가 되는 1848년까지 제주에 머물러야만 했다. 김정희는 제주에 있으면서 중국 금석문을 훑어보며 그만의 독특한 글씨를 완성해나갔다. 원래 글씨를 잘 쓰기도 했지만, 그는 제주 유배기에 마침내 그 유명한 추사체를 만들어냈다. 물론 추사체란 어떤 특징을 가진 서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서예 작품을 가리키는 말이다. 글로 치면 문리가 터진 것이고, 그림으로 치면 이중섭이 육이오전쟁을 겪고 가족이 해체되고 나서 그림에 혼이 들어가고, 박생광이 60이 넘어서야 그의 독특한 색채 감각이 들어간 걸작을 생산해낸 것과 같은 것이다. 시련은 이처럼 사람을 단련시킨다. 시련은 혹독할수록 더 잘 단련시킨다. 그것이 죽을만큼, 혹은 자살할만큼 아프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그의 유배 중 심리를 볼 수 있는 작품이 '해 바뀔 무렵의 겨울'이란 뜻의 세한도(歲寒圖)다. 그는 <지금 그대가 나를 대하는 것을 보면, 내가 곤경을 겪기 전에 더 잘 대해 주지도 않았고 곤경에 처한 후에 더 소홀히 대해주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의 곤경 이전의 그대는 칭찬할 만한 것이 없겠지만, 나의 곤경 이후의 그대는 역시 성인으로부터 칭찬을 들을 만하지 않겠는가? 성인께서 유달리 칭찬하신 것은 단지 엄동을 겪고도 꿋꿋이 푸르름을 지키는 송백의 굳은 절조만을 위함이 아니다. 역시 엄동을 겪은 때와 같은 인간의 어떤 역경을 보시고 느끼신 바가 있어서이다.>라는 발문을 썼는데, 그 외로운 유배지로 제자인 이상적이 청나라 책 120권 79책을 구해다 선물했기 때문이다. 그는 제자의 이런 정성에 감동하여 세한도를 그려 준 것이다. 세한도의 세한은 <歲寒然後知 松栢之後凋(세한연후지 송백지후조)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되어서야 소나무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비로소 알 수 있다.>라는 논어 자한편의 글에서 따온 것이다. 들었는가. 세한의 추위 속에서 바들바들 떨며 살아있는 그 소나무처럼, 사람에게도 시련이 닥쳐도 새로운 변화가 일어난다. 김정희 자신도 이런 이야기를 쓰지는 않았으나 그의 머리는 고도의 집중상태로 들어갔다. 그러면서 군더더기, 멋스러움, 잘난 척 등 탐진치(貪嗔痴)를 다 버리고나서야 서예의 깊은 세계로 들어갈 수 있었다. 화가가 그림의 이치를 꿰뚫는 것처럼 그의 글씨 역시 혼이 들어가버렸다. 우리는 이러한 영적 진보를 시련 대신 아나파나를 통해 이룰 수 있다. 아나파나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 물이 빠져 마른 가시 잎과 가지를 움켜쥐고, 눈이 오면 눈이 오는대로,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대로 들숨날숨 오직 생존을 위해 꾹 참고 봄이 오기를 기다리는 겨울소나무의 그 마음, 그것이 아나파나를 할 때 갖는 집중된 마음이다. 그것이 모든 것의 열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