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100주년 앞두고 기쁜 일이 생기다
3.1절 100주년 앞두고 기쁜 일이 생기다
나는 정통 무반인 우리 집안이 독립군을 배출하지 못한 점에 대해 늘 아쉬워했다.
육이오 때 장교로 출전한 당숙이 전사한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던 중 어제 큰할아버지가 3.1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사실이 확인되어 인증서를 받으러 오라는 통보를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기쁘다.
큰할아버지는 우리 할아버지의 친형으로 당시 한 집에 산 형제지간이다. 우리 할아버지가 19세 때이니 큰할아버지는 그보다 몇 살 더 많으셨을 것이다.
기록을 보니, 1919년 4월 6일, 면민 600명이 저녁 9시에 횃불을 들고 산에 올라가 만세를 부르고, 일제의 총격에도 불구하고 시위를 계속 벌였다. 이틀 뒤인 4월 8일에는 비봉면 사람들까지 운곡면으로 몰래 들어와 밤 10시에 또 횃불 시위를 벌였다.
나는 두 형제가 집안 어른들과 함께 시위에 참여했다는 말은 들었는데, 그게 어떻게 증명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그것도 우리 할아버지 연세 120세가 되는 올해에 밝혀지다니, 늦었지만 감사할 따름이다.
당시 참여한 600명 명단은 다 확인하지 못하지만, 큰할아버지는 아마도 경찰에 체포된 기록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할아버지 형제는 일제 강점기에 함께 수행하며 정신 수양을 했다는 말씀을 들었다.
오늘에서야 역사 앞에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다.
친일파 후손이나 일제 부역자 후손이라면 이게 어떤 감동인지 잘 모를 것이다.
그 작은 면에서 600명이나 모여 횃불을 켠 채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며 독립 만세를 외쳤다니, 내 가슴이 뜨거워진다.
* 1901년생 할아버지와 1924년생 아버지. 할아버지는 큰할아버지와 함께 횃불을 들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큰할아버지 명단이 확인되어 1명 겨우 살아남은 당숙에게 서류 받아가라는 통지가 왔단다. 우리 할아버지는 명단에 없지만, 우리는 형제가 함께 만세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아버지는 1945년 일제에 징병되어 대전 집결지까지 끌려가다가 탈출, 일제가 핵폭탄을 맞고 항복할 때까지 숨어 있다가 해방을 맞았다.
둘째 숙부는 1948년에 징집되어 인천에서 훈련을 받던 중, 10월 27일에 제주 민간인 학살에 가담하라는 미군정의 명령을 거부하고 나선 여수 순천 국군 14연대가 들고 일어난 사건이 터졌다. 이에 이 반란 사건에 투입되어 사람들이 다 죽어간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자 탈영해 집으로 돌아와 깊은 산골짜기에 숨어 살았다. 숙부는 그렇게 숨어 살던 공주 봉갑리에서 결혼하여 살았는데, 육이오전쟁이 나자 경찰은 탈영한 숙부 대신 우리 아버지더러 입대하라고 종용했다. 하지만 장티푸스에 걸려 있던 터라 바로 입대하지 못하고, 전쟁이 끝난 뒤에 28세의 늦은 나이로 군복무를 했다. 숙부는 아버지가 대신 군복무를 했지만 돌아가실 때까지 '처벌되지 않는 탈영병' 신분이었다. 나는 동족 상잔의 시작인 여수순천 반란사건의 이쪽이든 저쪽이든 가담하지 않은 것은 양심적인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겁나기도 했겠지만.
* 충남 청양군 3.1 운동 참가자
정산면, 청양읍, 운곡면, 화성면, 남양면, 장평면, 청남면에서 5일 동안 연인원 5000명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 이가운데 "쏠 테면 쏘라"고 맞서던 정산면 시위대에 일제가 진짜로 총을 쏘아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공식 사망자가 11명이다. 이 사건으로 청양 군민들이 들불처럼 일어나 횃불 시위를 했다고 한다.
* 에고, 답답해라. 내일 독립기념관 식장에 가거든 사진 좀 잘 박아오라고 동생에게 말했는데 일이 복잡해졌다. 큰할아버지 장녀가 대전에 살아 계시나 노환으로 말씀을 하지 못하고, 그 집 식구들이 외가의 일이다 보니 무슨 뜻인지 몰라 청양 고모에게 연락하라고 했다는데, 그래서 독립기념관 100주년 기념식에서 대통령 표창을 받을 예정이었다는데, 어르신들이 너무 연로해 뭐가 뭔지 몰라 헤매고 미루는 사이 , 그러면 대전보훈지청에 와서 증서라도 받아가라고 했단다. 100주년 기념식장에서 대통령 명의의 증서를 받을 예정이었는데 당고모 집에서 누군가 그냥 증서나 받으러 가야 한단다. 100년 세월이 야속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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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양군 3.1만세운동사
한국근대사에서의 3.1운동
3.1운동은 윌슨의 민족자결 주의의 사상적 영향을 받고 민족자결주의가 독립을 갖다주리라고 보고 일으킨 운동이 아니라 초기 개화운동이래 당시까지 여러차례의 민족운동 - 갑신정변(1884), 갑오농민혁명(1894),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운동(1905~1910), 애국계몽운동과 의병운동(1910년)이후 이국민속에 축적되어 주체적 민족운동 역량이 국제정세의 변동을 능동적으로 포착, 폭발하여 일어난 운동이다.
청양지역의 만세운동 청양지역에서는 4월5일 정산면을 시작으로 청양읍, 화성면 6일 운곡면 7일 남양면, 청남면 8일 비봉면 장평면등 8곳에서 5일동안 7천여명이상이 15회에 걸쳐 만세를 부르고 횃불시위를 하였다.
비봉면 4월8일 강정리 주민 10여명이 마을 뒷산에서 횃불을 밝히고 만세를 불렀으며 주동자는 유남식 유천식으로 옥고를 치렀다. 또 9일에도 산에 올라가 만세 시위를 하였으며 주동자는 김현규와 이상유이고, 정확한 날자는 알수 없으나 신원리 주민들도 문박산에 올라가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주동자는 이마을 정산길과 대치면 상갑리의 유환방, 유경재이며 이들은 만세사건후 철원애국단에 가입하여 공을 세웠고 1920년 발각되어 해산 옥고를 치렀으며 1963년에 정부로부터 대통령 표창을 추서 받았다.
남양면 4월7일 면민 6백여명이 저녁 8시경 산에 올라 횃불을 올리고 만세를 불렀다. 천도교교구장이 있었던 한도수가 시위를 주동했다가 체포되었으나 수형 여부는 알수 없다.
운곡면 4월6일 면민 6백여명이 저녁 9시경 면내 여러곳의 산에 올라가 횃불을 밝히고 만세를 불렀으며 총을 쏘아 저지했다. 또 8일 운곡, 비봉면민 6백여명이 저녁 10시경 운곡면내의 산에 모여 횃불을 놓고 만세를 불렀다.
장평면 4월8일 낙지리 주민들이 저녁 8시경 마을 동남쪽에서 만세를 불렀으며 김사길이 체포되었다.
청남면 4월7일 지곡리 주민들이 마을 뒷산에서 횃불을 올리고 만세를 불렀으며 주동자 이동명 유병한 이영은은 옥고를 치루었으며 청소리에 이동명 이영은등 이고장 출신 7명의 업적을 기린 7투자 기적비가 있다.
청양읍 4월5일1천여명이 읍내에 모여 만세를 부르며 시위하다 총탄에 맞고 2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화성면 4월5일 산정리에서 3천명의 주민들의 모여 만세시위를 벌였고 또 날자는 알 수 없으나 농암리에서도 주민들이 만세시위를 벌였다고 한다.
정산3.1민족운동 1.만세운동의 동기 가혹한 식민지 착취를 직접 체험하면서 나라의 독립이 없으면 사람다운 생활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경험하고 있을 때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번져 누구든지 독립을 갈망하고 홍범섭(당시 20세)이 서울서 선언서를 가져와 내용을 읽고 전국적으로 번지고 있는 만세시위에 대한 정보를 듣고 같은마을 임의재(38) 윤석희(29) 홍세표(33)박상종(39)등과 만나서 만세시위를 하기로 결의하였다. 백곡리에 사는 우재현(83)씨에 의하면 홍범섭은 7세때 아버지를 따라 서울서 백곡리로 이사왔고 한문을 배우다 보통학교에 다녔으나 일본인 교육이 맞지 않아 스스로 학교를 그만두고 다시 한학을 공부한 학구적이며 민족정신이 강한청년이였다고 한다. 출옥후 그는 서울로 가서 중동중학교에 진학하였으나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학교를 졸업하지 못하였으며 계속되는 일제의 감시를 피하여 1929년 서울서 공주로 이사 다시 10년뒤 서울로 이사를 했다. 쫓기고 감시받는 생활속에 부인이 삯바느길로 생계를 유지하였고 1940년 초에는 함경도 안변까지 가서 이름을 바꿔 숨어 지내다가 광복을 맞았다. 1973년 2월3일 74세에 눈을 감았으며 198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고 현재 재숙,재옥 두딸이 서울에 살고 있다. 그 외 정산 3.1운동 주동자중 윤석희 임의재 홍세표의 묘소는 백곡리에 있으며 박상종은 출옥후 감시를 피해 타관을 전전하다 자손도 없이 함경북도 장진에서 별세했으며 묘소도 그곳에 있어 안타까워 하고 있다.
2. 만세운동의 전개 홍범섭의 집에서 임의재, 윤석희, 홍세표, 박상종, 김세환(36), 임창순(20), 이건호(31), 이태호(25), 김필현(32), 윤구학(31)등 9명이 만나 1.장날을 이용하여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주고 독립만세를 부른다. 2. 태극기를 만들어 장꾼들에게 나누어준다. 3.어떠한 탄압에도 굴복하지 않는다는 3가지 사항을 결의하였으며 4월5일에서 7일까지 3일동안 만세시위가 있었다.
첫째날(4월5일) 4월5일 정산장날에 홍범섭등이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숨겨가지고 시장으로 가 오후3시경에 1백여명의 장꾼들에게 나누어주고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장꾼들은 주동자들을 따라 시장을 누비며 시위를 했고 갑작스런 사태에 일본헌병들은 붉은잉크를 시위군중에게 뿌려놓고 연행하기 시작했다. 이때 윤구학은 헌병이 휘두르는 칼날을 맨손으로 막아 손가락이 끊어졌으며 30여명이 연행되자 시위자는 700여명으로 늘어나 헌병대로 몰려가 구속자 석방을 외치며 투석전을 하자 헌병들은 공포를 쏘며 군중을 위협하였다. 이에 당시 향교직원이었던 권흥규(60․목면 안심리)가 쏠테면 쏘라고 하자 가슴에 쏘아 그 자리에서 숨졌으며 이때 김필현도 몸의 3군데에 총탄을 맞고 부상을 입었다.
둘째날(4월6일)이날의 시위는 정산 및 각면의 시위중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내게되었다. 이날 아침 시장사람들이 권흥규의 시체를 헌병대로부터 인수하여 목면 안심리(여우고개)장지까지(약6km)가는데 1천여명이 두줄로 빼곡이 서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에 공주에서 지원오던 헌병들이 권흥규의 상여행열과 부딪혀 무차별로 총을 쏘아대고 군중들을 체포하였다. 총탄을 맞고 현상에서 숨진 사람은 권흥규의 조카딸, 최윤안, 유행길, 장응열, 윤광원, 김국삼등 6명이며 권흥규의 어린딸은 칼날을 손으로 막다가 손가락 4개가 짤리고 볼에 총탄이 스쳐 불구가 되었다. 전날밤 비가 많이 온 탓으로 흩어지던 군중은 옷에 흙탕물이 묻었는데 흙묻은 옷입은 사람은 체포한다하여 옷을 갈아입자 새 옷을 입은 사람도 검거하였다. 이날 오후 5시경 상여행렬이 장지에 이르렀고 대박리에 사는 정일택이 정산에서부터 상여를 따라왔는데 권영진이 그에게 태극기를 그려달라고해 태극기를 6,7본 만들어 주었으며 권영진은 지곡리에 사는 전성순에게 독립만세라고 쓴 깃발 5-6개를 만들어주었다. 태극기와 깃발은 상여대열에 넘겨져 군중들의 시위가 격렬해 졌다.
셋째날(4월7일) 권의사는 안심리 여우고개에 안장되었으며 하관 무렵 맑은하늘이 갑자기 흐려지고 천둥과 번개가 번득여 소홀히하였다고 한다. 이날 저녁에 와촌리, 내초리 주민 5백여명이 근처 산위에서 횃불을 올리고 대한독립만세를 불렀으며 일헌병이 총을쏘아 저지하였다. 그후 그산을 만세봉이라 부른다. 또 4월9일에 마티 말고개에서 오후 3시경 수백명이 모여 산에다 태극기를 걸고 만세시위를 벌였으며 어떤사람이 “고궁의 봄빛은 어이 그리 더디단가 태극기를 박달나무가지에 걸어보네”라는 한 시를 써서 큰길에 걸어놓기도 했다.
3.희생자 홍범섭을 중심으로 불붙기 시작한 연3일의 정신시장만세시위는 10여명의 피살자와 도내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옥고를 치르거나 태형을받았다. ■피살자:권흥규,최윤안,유행길,장응렬,윤광원,김국삼,권영진,권흥규질녀,장광열,최상운,권인필 ■부상자:김현필,윤구학,권흥규의딸 ■1년 복역자(공주형무소):홍범섭,임의재,윤석희,홍세표,박상종 ■태형:90-70년도 총 188명(정산면 147명 목면 40명 장평면1명). 태형 최연소자는 박희보(서정리)로 당시 나이 15세이며 최고령자는 송주헌(와촌리)으로 당시 66세였다.
4.투옥자 5명과 태형을 받은 정산면내 거주자 147명을 통해본 분포도 3일동안 벌어진 정산의 만세시위는 연령 신분 직업등 모든 것을 초월하여 독립만세가 곧 국권회복이라는 목표를 설정하고 면민 모두가 일제에 대항한 쾌거라 할 수 있다.
5.권흥규의사 순열비와 백곡리 3.1운동기적비 권흥규의사 순열비는 1953년 정향조병호선생과 정산중 교장 김창한씨등이 발의하여 세웠다가 1966년 다시 비를 만들어 정산면사무소 앞에다 세웠다. 비문은 이양수선생이 짓고 조병호선생이 썻으며 권흥규의사는 90년8월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백곡리 3.1운동 기적비는 1984년 9월에 우선구(백곡리)당시 대전문화국교 교장과 송용재 충남상고 교사가 상의하여 ‘백곡3.1운동기적비 수립위원회’를 조직하여 세웠다. 비문은 태형을 받은 김세환의 아들 김기평(당시 공주교대교수)이 짓고 글씨는 정산만세시위 주동자인 홍범섭의 딸인 재숙, 재옥자매가 썻다. 이비에는 백곡출신으로 정산장날 만세시위를 주도․참여했던 19명의 이름과 공적이 새겨있으며 매년 3월1일 기념식을 한다.
정산 3.1만세운동을 통해서 본 3.1운동의 본질
3.1운동은 한국근대사에서 가장 큰 전민족적인 운동인 동시에 민중운동으로 선각자 33인에 의해 ①기획②조직화③자금공급④독립선언서 작성⑤독립선언서 배포⑥독립선언 회합등 중요역할로 3.1운동에 불을 붙여주고 이어 민중은 자발적으로 지도부없이 ①기획했고②조직했고③때로는 간단한 독립선언서나 격문을 작성 배포했고④태극기를 제작 배포했으며⑤독립선언을 하고⑥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여⑦3.1운동을 전국적 민중운동으로 발전시키는 역할을 했다. 만일 민중들이 이러한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지 않았다면 3.1운동은 몇곷의 대도시 소규모운동으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농민들은 ①자유와 권리박탈②민족차별③토지조사사업에의한 토지약탈④태형실시⑤도로공사부역⑥소작료인상⑦각종세금등으로 독립을 빼앗긴이래 일제의 식민지착취와 탄압을 가장 가혹하게 받았다. 그러므로 선각자들에 의해 3.1 운동의 불씨가 당겨지자 전국적에서 독립을 얻기위해 자발적으로 봉기가 있게 된 것이다.
농민들의 전형적인 시위형태는 ①지식인들이 학교나 교회를 근거지로 사전에 태극기 독립선언문 전단등을 준비하거나 농민층의 주동자들이 준비하였다가②장날 장터에 나가 만세운동을 선전하면③미리만세운동이 있을 것을 예견하지 못한 농민들이 모두 합세하여 대규모 시위 운동을 전개하고④진압일경이 발포하여 사상자가 생기면 비폭력시위가 폭력화되어 헌병주재소나 면사무소를 습격하는 것으로 이어지며 이들의 활동특징은 태극기 제작 만세시위 횃불시위 농악대시위 주재소습격 면사무소접수등이다.
이렇게 볼 때 정산 3.1만세운동은 3.1운동의 본질인 민중운동단계에 적합하며 전국에서 일어난 가장 전형적인 농민층시위 형태를 띠고 있다. 또한 조직이 구성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대대적인 만세시위가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가혹한 식민지 착취를 직접체험하고 독립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서이기도 하지만 기존사회조직을 운동에 잘 이용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농촌의 마을형태는 30~50가구정도의 자연부락단위로 이루어져 있어 만세운동을 하기에 부적접한 조건이므로 많은 사람들이 한곳에 모이는 장터를 시위장소로 택해 만세운동을 예견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합세하도록하여 민중운동으로 발전시킨데 있다. 3.1운동의 본질인 민중운동, 그 민중운동이 일어났던 정산면 백곡리는 백제때 현의 소재지인 열기곧 두릉윤성이 있었고 백제멸망후 부흥군들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싸웠으나 패하고 유민들의 혼은 고려를 거쳐 조선에 이르는 동안에 그 맥이 이어져 임진왜란때에도 두촌임정식이 향병을 모아 싸웠으며 3.1운동때에는 정산에서 만세시위가 주동이된곳으로 이는 주권의식이 강한 백제인의 기상이 이어져내려옴을 뜻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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