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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운 작품/태이자 우리말 사전 시리즈

각하의 뜻

정윤회 게이트가 불붙어 '형이하학'(옛날에 대학 다닐 때 쓰던 말인데 요즘도 그렇게 쓰이는지는 모르겠다만) 얘기가 지나치게 난무하자 제 식구 단속에 나선 박근혜 대통령이 새누리당 지도부를 청와대로 불러 오손도손 담소를 나눈 모양이다. 검찰 수사 정보를 미리 알려주면서 걱정말라고 한 것같다. 그런데 원내대표 이완구가, 최근 총리 후보로 거론된다는 소문을 의식했는지 <박근혜 대통령 각하>라는 낡고 닳은 유신시대의 악습을 세 번이나 썼다고 한다.

 

각하란 존칭은 박정희, 전두환이 아주 좋아하던 것으로, 노태우 대통령에 의해 사용금지령이 내려진 말이다. 그뒤로 공식적인 자리에서 각하란 호칭은 사라지고 청와대 내부에서, 그러니까 몸종으로 비견되는 부속실에서나 가끔 쓰인 모양이다. 그나마도 김대중 대통령 때는 내부에서도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박근혜 대통령에 이르러 화려하게 부활했다.

그러면 각하가 무슨 뜻인지 살펴본다.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군 소위 출신 '다카기 마사오(高木正雄)'라는 건 다 알 것이다. 각하(閣下)는 일본군 소장 이상의 장성을 가리키는 존칭어다. 일본군 장성이 돼보지 못한 컴플렉스인지 모르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유독 각하로 불리는 걸 좋아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대통령은 그보다 높아야 한다. 대통령을 각하라고 부르는 건 사실상 모욕이다.

그래서 내가 이완구 의원에게 알려준다. 아부하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

황제, 왕, 세자, 왕자, 영의정, 장군 등으로 나눠보자.

 

먼저 황제는 폐하(陛下)로 불린다. 섬돌아래라는 뜻이다. 그러니 "폐하"라고 말하는 것은 "대궐 섬돌아래에 있는 신하가 말씀드립니다." 하고 고한다는 뜻이다. 황제를 직접 부를 수 없어 "나 여기 있소." 하고 둘러 말하는 화법이다. 황제가 섬돌아래 있다는 말이 아니다. 황제는 섬돌 위에 있다. 아래 다른 말도 마찬가지다. 진시황 때 처음 썼다.

 

그 다음 왕과 황태자는 전하(殿下)로 불린다. 전은 경복궁 근정전 같은 정전을 가리킨다. 전 아래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전하!"라고 하면 "전 아래에 있는 신하가 말씀 올립니다." 하는 뜻이다. 왕을 가리키는 말로 변했지만 왕에게 下라는 한자를 붙일 수는 없는 법이다.

 

세자나 황제의 손자로서 황위를 이어받을 사람은 저하(邸下)라고 불린다. 저는 집이란 뜻인데, 단을 높이 쌓은 귀인이 사는 집을 가리킨다. 대통령의 개인 주택을 사저, 저택 등으로 부르는데 이것도 사실 너무 깎은 말이다. 저택은 제후가 천자를 알현하기 위해 서울에 와서 묵는 큰집이다. 그러다 우리나라 왕조에서는 왕후가 사는 집을 가리킨다.

 

그다음에 일반 왕자와 군 칭호를 받은 사람들은 합하(閤下)로 불린다. 합은 쪽문이니 좀 격이 많이 떨어진다. 그외에는 정승에게 붙일 수 있다.

 

그 다음 각하(閣下)는 일본에서 쓰인 말인데, 일왕이 임명장을 수여하는 총독, 육군소장 이상, 고급 각료 등을 부를 때 썼다고 한다. 각은 합보다 더 격이 떨어지는 건축물이다. 친일파들이야 "나 친일파요!" 하고 출신성분을 드러내는 것이니 즐겨써도 무방한데, 자주 대한민국인들은 이 말을 써서는 안된다. 특히 독립군 후손들은 절대로 쓰지 말기 바란다.

- 조선시대 경복궁. 높이 보이는 건물이 근정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