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실사구시(實事求是;오직 사실만으로 탐구한다) 정신을 가진 북학파(당시 유행하던 청나라의 철저한 고증학처럼 조선학을 파고든 학자들)가 나타나기 전까지 조선의 사대부들은 영혼이 없는 좀비처럼 살았다. 몸은 분명 조선인이고, 조선 땅에 사는데 머릿속에는 중국 역사, 중국 산하, 중국 인물, 중국 서적, 중국 예술로 가득 차 있었다. 입을 열었다 하면 온통 중국 얘기 뿐이고, 글을 썼다 하면 온통 중국 관련 고사로 어지럽고, 그림을 그려도 온통 중국 산하만 상상으로 다루었다. 오늘날의 친미, 친일 좀비보다 더 강력했다.
이런 점에서 반대만 하라고 만들어진 부서 사간원을 독립시킨 조선 개국 주인공 정도전의 안목은 탁월했다.
왕이 행하는 정사를 비평간쟁하는 게 사간원의 직무다. 오늘날 박근혜 대통령의 정사를 비평간쟁하는 정부 내 기관이 없는 것과 크게 대조된다. 이번에 문제가 된 특별감찰관은 청와대 직원들과 대통령 친인척을 대상으로 할 뿐 대통령을 직접 비평간쟁하지 못한다. 그러고보면 우리나라 대통령제는 정부 내 비평간쟁 기능을 없애버린 셈이다. 조선시대 그 많은 왕 중 사간원을 없앤 이는 연산군 밖에 없었다.
조광조가 사사될 때 그의 억울함을 간한 사간원 이세번, 광해군이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를 폐비시켜 서궁에 유폐시키고, 그 아들 영창대군을 죽일 때 부당하다고 간한 이효원,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한 사간원의 정신이 내게 DNA로 내려와 있다. 그것이 <사도세자, 나는 그들의 비밀을 알고 있다> <나는 고백한다 - 정도전 살해 사건> <태사룡의 거꾸로 읽는 삼국지> <당취(소설토정비결 3-4권으로 합본)> <상왕 여불위> <천년영웅 칭기즈칸> 등의 작품으로 드러났다. 또한 우리말 우리글이 문학 언어가 되기 위해서는 더 다듬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20년이 넘도록 사전 편찬에 매달리는 것도 그 한 면모다.
- 조선에도 사람이 산다, 조선에도 산과 강이 있다고 외친 고산자 김정호.
그는 조선인 머릿속에 조선의 길을 내준 지식혁명가다.
요즘 미국에서 물 좀 먹고온 유학파 교수들을 보면 늘 입에 영어 어휘를 달고 다닌다. 내가 대학, 대학원이라도 나왔으니 망정이지 까딱하면 알아듣지 못할 만큼 대부분 영어, 한자어, 그리고 우리말을 토씨로 약간 쓰는 정도의 중증 환자도 보았다. 유학파 관리들도 그렇다고 들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이보다 더 심했다.
조선시대 후기, 베스트셀러였던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보면 주인공도 중국인, 무대도 중국인, 대화 내용도 중국 역사에 뿌리를 둔다. 거기 나오는 모든 산하가 중국 땅이고, 모든 대화가 중국인들이 나눌만한 중국인 삽화다. 이 소설을 쓴 사람은 조선사람 김만중인데 그 유명한 숙종 이순의 부인인 인현왕후의 인척으로서 사사건건 당쟁과 궁중음모에 개입한 정치소설가다.
- 안견의 몽유도원도. 세종 이도의 세째아들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듣고 그렸다 하나 그림 소재는 명백한 중국의 산수다.
이 중국화풍은 조선시대 화가들이 베껴그린 것으로 계림 소주를 가보지도 않고 그려냈다. 이 작품에는 신숙주, 정인지, 박팽년, 성삼문, 김종서, 고득종, 최수, 명사중, 이현로, 김수온, 최항, 송처관, 김담, 상석덕, 박연, 윤자윤, 이예, 서거정 등 무려 23명의 찬(그림에 붙이는 시)이 달려 있다.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가 나오기 전까지 우리나라 화가들은 이처럼 중국의 산하만 그려댔다. 도연명의 <도화원기>를 모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김만중을 예로 드는 것은, 그 자신이 조선왕조의 실세이면서도 정작 그의 소설에서 조선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다. 작은 소품이나 삽화마저 당나라 물건이요, 당나라 이야기다. 이런 걸 우리 문학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런데도 우리 고등학교 교과서에 버젓이 실려 있다.
또 그의 대표적인 정치소설 <사씨남정기>는 굉장히 의도적이며 편파적인 정치소설이다. 그가 속한 노론의 적극 지지를 받는 인현왕후를 높이고, 반대파인 소론이 지지하는 희빈 장옥정은 사악한 인간으로 깎아내리는 모함 저주 모욕 소설이다. 이마저도 시대는 명나라요, 무대는 중국 금릉이다. 역시 조선 사람이 한 명도 나오지 않고, 조선의 산하는 일절 나오지 않는다. 이 작품 역시 교과서에 실려 있다.
조선시대라는 게 대체로 이렇게나 얼이 빠져 있었다.
- 교과서에 실린 사씨남정기.
이런 가운데 실학파 인물들이 드문드문 나타나 마침내 조선을 이야기하고, 조선사람을 말하기 시작했다. 소설에서는 박지원, 화가로는 겸재 정선과 이방운, 학자로는 홍대용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김정희 등이 우리 학문을 또렷이 드러내었다. 안정복은 동사강목을 써서 우리의 역사를 알리고,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이종휘의 고구려사, 유득공의 발해고 등이 쏟아져나왔다. 우리 삶과 산업을 다룬 백과사전류도 나왔다.
이런 가운데 우리 땅, 우리 산하를 그리고 설명한 이가 있었으니 그가 고산자 김정호다. 거의 모든 실학자들이 조정의 지원을 받지 못한 것처럼 김정호 역시 개인의 힘과 친구들의 조력만으로 청구도, 대동여지도를 그려내고, 이에 따른 지리지를 편찬해냈다.
왼쪽 청구도, 오른쪽 대동여지도. 청구도에 독도가 표기되어 있고, 대동여지도 목판본에는
축척 표기의 어려움 때문에 빠져 있고, 필사본에는 들어가 있다.
이처럼 우리 역사는 줏대있는 사람들이 고비고비에서 물꼬를 터서 오늘날의 대한민국에 이르렀다.
나 역시 이들에게서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신을 본받아 자주적인 정신으로 살고 싶었다. 그중 하나가 우리말을 가다듬는 것이다. 문학언어로 성숙하지 못한 우리말을 반듯하게 드러내고 쓰임새를 정리하고 싶은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 어느새 우리말 사전 10권 집필의 결과로 나왔다. 아직 한창이지만 내게 이런 일을 하도록 영감을 준 박지원 등 북학파들에게 늘 감사한다.
우리말 관련 나의 다섯번째의 결실인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우리말 백과사전>이 곧 나온다.
현재 나머지 5권도 집필 완료되어 점검 중이고, 몇 가지 작업 중인 것도 있다. 우리말이 훌륭한 문학언어가 될 때까지 사전으로 뒷받침하고 싶다.
- 왼쪽 / 곧 신간으로 나올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우리말 백과사전>
- 오른쪽 / '뜻도 모르고 자주 쓰는' 시리즈로 나온 <우리말 1000가지>,
<우리 한자어 1000가지>, <우리말 어원 500가지>, <우리말 숙어 1000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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