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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단기 출가기 6 / 시간, 2000년 전 퓨왕국에서 오신 스님 삐냐저따, 당신을 따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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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단기출가기 8 / 그대들이 수자타라면 나는 태이자가 되리라


삐냐저따 스님의 왕국 <마하미얀(대정글) 사원>으로 가는 길에 만난 갈대


1. 아라한, 당신은 누구십니까?


2017년 7월 24일, 나는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아라한 삐냐저따 스님을 만났다. 

미얀마에서는 그가 나타나면 길 가던 사람들까지 일제히 엎드리는 아라한, 그가 용인 보문정사에 인연을 따라 찾아 오셨다.

그로부터 3회에 걸쳐 법을 묻는 대담을 나누는 중에 나는 내가 개발한 바이오코드와 브레인워킹과 브레인리퍼블릭, 그리고 아나파나에 대한 확신의 도장을 찍었다.

큰스님은 일주일간 용인 보문정사 별채인 여래원 2층에 머무시며 거의 잠에 들지 않고 아나파나, 비파사나를 하셨다. 그때의 기록은 보문경이란 이름으로 따로 정리했다. 저 아래에 링크를 건다.


- 우리는 처음에 이렇게 만났다. 왼쪽 사진 앞쪽으로부터 아사라 김상국 교수, 나 태이자, 그 다음이 통역 zaw Moe Aung 한대웅, 삐냐저따 큰스님, 덕산 스님 순이다. 평소에는 내가 이곳에서 바이오코드 강의를 한다.


그로부터 덕산 스님과 나와 김상국 교수와 진철문 박사가 가자 가자, 미얀마로 가서 아나파나의 깊은 세계로 들어가보자 만나기만 하면 결의하고 또 결의했다.

사람들이 말했다. 삐냐저따 스님은 아라한과에 이르렀다고. 그래서 더더욱 한 마디라도 더 묻고 싶었다. 미얀마에 가서 종일이라도 붙어 실컷 질문하고 싶었다. 어떻게 걷나, 어떻게 말하나, 어떻게 웃나, 어떻게 공양하나, 어떻게 세수하나, 다 보고 싶었다. 만일 이 세상에 지혜의 완성자 붓다가 계시다면 그곳이 어디인들 내가 가지 못할 곳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갔다, 미얀마 북부 원시의 정글로.


- 대나무숲에 선 삐냐저따 스님. 그가 대정글에 들어와 맨처음 자리잡은 곳은 대숲이다.

 

2011년, 미얀마 양곤 교외의 때퓨국제비파사나선원 주지로 있던 삐냐저따는 혼연히 들려오는 한 여신의 목소리를 들었다.

- 대정글(마하미얀)로 가세요

그 목소리는 거부할 수 없는 친근한, 어쩌면 멀고도 먼 전생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어딘가 귀에 익숙하고, 정다운 목소리였다.

그는 바루 하나만 들고 사원을 나서서 무작정 북쪽으로 걸었다. 때가 되면 탁발해 먹어가면서 목소리가 인도하는 방향으로 걸었다. 버스를 타고, 강을 건너고, 걷고, 또 걸어서 미얀마 북부로 향했다.

 

몇 달만에 그가 다다른 곳은 오늘의 마하미얀 대정글이다. 사람이라곤 아무도 살지 않는 천년 원시림 대정글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수십 미터의 거목이 숲을 이루고 있는 한가운데로 목소리는 가라, 더 가라 요구했다.

그렇게 하여 나무를 헤치고 풀을 헤치며 다다른 곳, 거기에는 초라한 미얀마 전통 사원이 한 채 있었다. 사원이라는 거창한 이름조차 어울리지 않는 갈대로 엮은 집, 거기에 키가 큰 비구가 한 명 있었다. 몇달간 그를 밀어댄 목소리는 "바로 이곳"이라고 말했다.

 

 

 

 

 

- 대정글. 현재 모습으로 지금은 곳곳에 마하미얀 사원의 깃발이 꽂혀 있다.

 

키 큰 비구가 이 무모하고 낯선 불청객을 향해 말했다. 

"그대는 누구인데 사람이 살지 않는 이 정글을 찾아왔는가?"

"나는 신이 가라는대로 먼 길을 왔는데, 여기 머물라고 합니다."

"그거 잘 됐군. 이제 내가 떠날 때가 되었으니 말이야. 자, 나는 가네."

그는 홀연히 떠나고 그는 남았다. 

 

- 삐냐저따 스님이 처음 찾아온 곳. 집이 그대로 남아 있다.

 

여기가 삐냐저따 스님이 2011년에 다다른 대정글의 마지막 목적지다.


삐냐저따 스님이 우물을 찾으니 비탈진 언덕 아래에 있었다. 거기서 물을 길어다 먹어야 했다. 다만 주변에 인가가 없으니 어디서 탁발해 먹어야 할지, 민가를 보지 못한 지 꽤 되었으니 거기까지 나가 탁발하기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신에게 말했다.

- 나는 그대의 요구대로 이곳에 왔다. 난 이제 아나파나를 하겠다. 살면 살고 죽으면 죽으리라.

 

 

- 우물을 찾아가는 길

 

- 삐냐저따 스님이 마시던 우물

 

- 우물에 오르내리는 길. 맨뒤는 진철문 쿠타라.

 

- 삐냐저따 스님이 통나무집으로 떠난 뒤 유적 삼아 이 집을 지키는 노비구. 우리에게 탁발할 때의 자세와 아나파나 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 

 

- 현재  삐냐저따 스님이 사는 오두막. 1.5평쯤 돼보인다. 외부에 화장실 하나가 있을 뿐이다. 전기와 수도는 공급된다.

단지 황금탑 사원과 전각에 가깝다는 이유로 여기로 나왔을 뿐 아무것도 호사스러운 것이 없다. 카탱을 열면 몇 억원씩 보시받는 스님이라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소박한 집이다. 3000만평 대정글의 소유주가 사는 집이 여기라니.

 

삐냐저따는 이곳에 살던 비구가 남긴 얼마간의 쌀과 음식을 해먹으며 무작정 아나파나만 했다. 목이 마르면 우물까지 내려가 떠다 마셨다. 맹수가 나올지 안나올지 모르고, 거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아나파나만 했다. 죽일 테면 죽이고 살릴 테면 살리라는 결기가 있었다. 아무렴 천하사를 꿰뚫는 이 깨달음의 대사업에 그까짓 마장 쯤이야 깃들겠는가, 천신들이 그냥 두고보지는 않으리라, 이런 배짱도 있었다.


그렇게 석 달이 흘렀다.

여인 서넛이 머리에 공양물을 지고 나타났다.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다. 

붓다의 수제자 사리불이 친동생의 출가를 축하하려고 길을 떠나는데, 붓다도 가고 싶어했다.

"두 갈래 길이 있는데, 지름길은 사람이 안사는 사막이고, 제자들까지 이 많은 대중이 함께 가자면 탁발을 해먹으며 가야 하는데 그러자면 빙 돌아서 먼 길을 가야 합니다. 아무래도 길이 멀어서 붓다께서 가시기엔 불편합니다."

붓다가 물었다.

"혹시 시바리도 갑니까?"

"예, 제 제자들은 다 갑니다."

"그럼 돌아걸 것 없어요. 사막으로 갑시다."

"아니, 거기는 탁발할 데가 없다니까요?"

"사리불, 걱정 말아요. 시바리가 간다는데 뭘 걱정하십니까?"

그래서 붓다 일행은 지름길인 사막으로 들어섰다. 사리불은 걱정하면서 앞장서 나아가는데, 웬걸, 그 사막에 머리에 공양물을 이고 지고 온 사람들이 줄지어 있었다.


- 사진은 내가 마하미얀 사원에 단기출가 중 삐냐저따 스님을 따라 탁발나갔을 때 만난 시주공양자들. 난 비구들 맨끝에 있다. 내 앞 키 큰 비구가 쿠타라 진철문 박사, 그 앞이 아사라 김상국 박사다.


이런 얘기도 있다.

시바리 존자는 붓다께서 "너는 여러 생 동안 시주 보시를 너무 많이 해서 그 복업(福業)을 꼭 받아야만 한다."고 하시자 "과연 제게 그런 복업이 있는지 없는지 히말라야 정글에 가서 시험해도 되겠습니까?"하고 여쭈었다.

친척 어른이기도 한 붓다는 "그러려므나." 하고 허락해주었다.

시바리는 제자 겸 도반 500명을 이끌고 아무도 살지 않는 히말라야 기슭으로 들어갔다. 그러다가 6개월만에 붓다의 수행처로 돌아왔다.

붓다는 시바리가 살아 돌아오는 걸 보고 웃으시고, 시바리도 붓다에게 멋쩍어 웃어보였다. 

히말라야 산중에서 굶어죽지 않고 잘 수행하다 온 것이다.


이처럼 마하미얀 대정글에는 이로부터 공양물을 지고 오는 신자들로 서서히 붐비기 시작, 마침내 6년이 지난 오늘 완전히 다른 아나파나 본찰 '대정글사원'으로 우뚝 섰다.


* 여기서부터 초록색으로 적은 글은 어쩌면 일반 독자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짧게 기록한다.

삐냐저따 스님을 부른 신은 산다무키다. 산다무키는 미얀마인이라면 누구나 다 섬기는 유명하고 영험한 신이다.

어느 날, 산다무키는 양곤의 때퓨사원에서 수행 중이던 삐냐저따 스님에게 나타나 "나를 대정글로 따라오시오"라고 했다. 그때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나를 따라오라 하여 간 길이 바로 마하미얀이었던 것이다.


삐냐저따 스님은 우리나라 신라 시기에 미얀마 북부에 있던 나라 PYU왕국(현재 유네스코가 발굴 중이다)의 왕이었고, 산다무키는 왕비였다. 그러던 중 이웃 나라와 전쟁이 벌어져 쫓기게 되고, 지금의 퓨왕궁을 버리고 동쪽으로 동쪽으로 달아났다. 그러던 중 지친 왕자 하나가 그만 죽었다. 그는 오늘의 보문정사 주지 덕산이다. 

그뒤 지금의 마하미얀까지 달아난 퓨왕조 왕실은 거기서 밭농사를 일구고 숨어 살다 죽었다. 그 무덤이 지금도 있다. 그로부터 이 밀림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다.(약 3천만 평에 이르는 이 대정글은 몇년 전 미얀마 정부가 삐냐저따 스님에게 소유권을 기증, 전체를 사원으로 개발 중이다.)

몇년 전만 해도 보문정사 주지 덕산과 삐냐저따 스님은 원래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 양곤의 호수, 수치 여사 옆 절에 사는 자와나 스님과는 아는 사이였는데, 어느 날 자와나 스님이 덕산 스님을 데리고 삐냐저따에게 갔고, 거기서 그들이 전생의 가족이었다는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국의 덕산 스님을 마하미얀까지 부른 것은 바로 산다무키 신이었다. 그로써 천년 전의 부자가 상봉하고, 거기서 접신을 통해 산다무키와 덕산 스님이 모자 상봉을 하였다. 산다무키는 피난 중에 잃은 왕자 덕산을 천년 간이나 그리워하다가 이제야 가족을 한 자리에 모이게 해놓고, 먼저 마하미얀에 황금탑을 세우고, 동시에 한국에도 세우라고 요구했다. 그래서 지금 마하미얀과 한국에 황금탑이 동시에 세워지고 있다.

미얀마에서 사리 기증이 이어지고, 보시금이 몰려오고 있다.

불가사의한 일이라서 여기까지만 적는다.


난 이처럼 완성된 상태의 마하미얀 사원에 간 것이고, 그럴 즈음인 올해 여름 큰스님을 한국의 보문정사에서 친견하여 인연을 맺었다.


내가 이 글 제목을 "당신을 따르리라"고 적은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단기출가기 곳곳에 나오지만 나는 내 머리에 남은 마지막 머리카락 한 개를 뽑기 위해 노력했다. 나는 그것을 뽑았다. 큰스님께서 던져주는 반야지혜로 나는 그것을 끊어내고 뽑아낼 수 있었다.

난 아직 내가 보고 겪은 것을 다 적지 못했다.

나는 삐냐저따 스님이 보신 것을 보았으며, 붓다가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보신 것을 보았다. 다만 그 이후 치열한 수행 끝에 붓다가 보신 삼천대천세계를 아직 보지 못했다. 나는 볼 것이다. 내가 볼 것이다.  

 

-미얀마 북부 박물관에서, 붓다가 미얀마에 오셨을 때 조성된 최초의 불상을 친견한 뒤 삐냐저따 큰스님의 배려로 가슴에 안고 있다. 

"붓다시여, 당신과 제가 하나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기도했다. 


*** 이 글을 다 읽으셨으면 인연의 실을 이끌어 여기에 묶기 바랍니다.

아사라, 쿠타라, 태이자가 있습니다.

<황금탑이 있는 절 용인 보문정사 / 국제여래선원>

주소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운학동 11

문의 / 031-332-0670 1899-3239

안내/유승민 yuchunni@hanmail.net

 

*** 붓다는 불교신자가 아닙니다.

붓다는 스승이 없습니다.

그가 붓다이고, 그가 스승이기 때문입니다.

붓다에 대해 더 자세히 아시고 싶으면 아래 글을 눌러보세요

 

<나는 이렇게 들었다 1 보문경 상>

<나는 이렇게 들었다 2 보문경 중>

<나는 이렇게 들었다 3 보문경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