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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운 작품/태이자 우리말 사전 시리즈

일제 강점기, 한자의 탈을 쓰고 몰려든 일본어

이재운의 <우리말의 탄생과 진화>

- 일제 강점기, 한자의 탈을 쓰고 몰려든 일본어

 

한자가 들어오면서 없어진 순우리말이 많다. 하지만 경쟁력 있는 어휘들은 한자에 시달리며, 언어와 문자에 관련된 크고작은 사건들을 견디며 굳세게 살아남았다.

선조들은 문자를 적지 못하는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 이두(吏讀), 반절(反切), 향명(鄕名), 각운(脚韻), 향찰(鄕札), 구결(口訣)을 구사하는 등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런 덕분에 중국에서 직접 들어온 한자 어휘들은 충분히 소화가 된 상태에서 우리말의 보조 표기 수단으로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하지만 조선 후기 격동의 시대와 일제 강점기에 거의 무방비 상태에서 들어온 일본식 한자어는 아직도 큰 문제가 되고 있다. 한자어는 한자만 알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고, 그래서 우리말로 쉽게 바꿀 수도 있는데, 일본식 한자어는 그렇지 않다. 일본 사정에 맞게 고쳐진 일본식 한자어는 우리로서는 너무 갑작스럽고, 낯설고, 무슨 뜻인지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 그냥 무늬가 한자니 한자인가 보다 하지 그게 정작 일본식 한자어라는 걸 알아차리기가 어렵다.

다만 이제 와서 이건 일본식 한자어고 저건 중국식 한자어라고 가려쓸 여유는 없다. 한자어 자체를 줄여나가야 하는 마당에 굳이 일본식 한자어 먼저 버리고 중국식 한자어는 좀 살려두었다가 나중에 버릴 수도 없다.

일본은 한자어를 들여갈 때 가나를 함께 표기하도록 해서 오늘날에도 한자어에는 가나 표기가 따라붙는다. 이 점에서는 우리보다 효율적이었다. 우리는 가나보다 훨씬 표기력이 좋은 한글을 갖고 있으면서도 수백 년간 한자어를 한글로 표기하지 못한 채 한자는 한자로 읽었다. 그러면서 작은 중국(小中華)이라는 엉뚱한 자부심을 가졌다.(외래어를 알파벳 등 그 나라 문자로만 표기하려는 것과 같은) 그러는 사이 일본은 한자어를 들여가 빈약한 가나와 결합시키면서 문자 생활에 일대 혁명을 일으켰다. 우리도 한자가 들어오면서 철학을 알고, 역사를 알고, 기타 선진 문명을 알게 되었지만 일본은 가나와 한자어를 섞어쓰면서 중국뿐만 아니라 영국, 프랑스, 미국, 네덜란드 등의 선진 과학 기술 문명을 급속히 받아들였다. 일본의 일반 백성들도 이러한 섞어쓰기 덕분에 문자 생활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오로지 한자어만으로 적다보니 생활 문자로 자리잡지 못하고 말았으며, 문명이라고는 오직 중국에서 받아들이는 것말고는 알지도 못하고, 이 결과 구한말이라는 참담한 시대를 당해 오랜 세월 모욕을 견디며 살아야 했다.

문자란 지식과 정보를 담는 도구다. 문명이란 이 문자를 이용해 지식을 주고받으며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문자는 어떤 지식이나 정보도 모두 담을 수 있을만큼 흡수력이 좋아야 한다. 그런데 한자는 다른 문자에 비해 흡수력이 떨어져 중국에서조차 옛문자 ‘古文’이라고 낙인찍어 폐기처분하고 전혀 새로운 간체자를 만들어 쓰고 있으며, 컴퓨터나 휴대폰에서 한자를 검색할 때는 알파벳을 이용하고 있다. 일본어 역시 알파벳을 이용해 한자어와 가나를 검색한다.

그런데 한글은 흡수성이 워낙 뛰어나 어떤 외국어라도 자연스럽게 쓸 수 있다. 한자든 일본어든 영어든 우리말에서는 큰 어려움없이 쉽게 소통된다. 이것이 우리나라가 IT강국으로 일어선 배경이기도 하다.

이러다보니 우리말은 어원이 복잡하기는 하나 어휘는 하루게 다르게 풍부해진다. 어휘가 풍부해지면 표현력이 높아지고, 그만큼 정보를 저장하고 전달하는 능력이 높아지는 것이다.

다만 이렇게 뛰어난 흡수성을 가진 한글이라도 한자어가 아니면서 한자어인 것처럼 보이는 일본식 한자어가 이렇게 많이 섞여 있으면 크고작은 혼동을 일으킬 위험이 있다. 힘들어도 우리말로 고쳐나가야 한다. 너무 많아서 예를 들기도 쉽지 않고, 눈에 비쳐지면 잘 잊혀지지 않아 여기 적지는 않는다. 곱고 바른 우리말을 열심히 쓰다보면 저절로 해결될 것으로 믿는다.

안그러면 홍콩에서 활약하는 일본인 배우 '金城武'는 '가네시로 타케시'가 맞지만 어떤 이는 그를 금성무라고 부르고, 어떤 이는 '진청우'라고 부르는 일이 생긴다. 이렇게 되면 서로 어떤 소통도 없게 된다. 언어는 소통을 전제로 만들어진 도구인데 이런 경우에는 도리어 소통을 막는 구실을 한다.

우리 한글을 숯이나 스폰지처럼 흡수력이 강한 문자로 지켜나가자면 찌꺼기나 때는 말끔히 씻어내야 한다. 우리말을 찾아쓰고 골라쓰고 자주 쓰는 게 우리말을 잘 씻는 방법이다.

 

이재운(소설가․『뜻도 모르고 자주 쓰는 우리말 어원 500가지』대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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