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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사람들/선시(禪詩) 감상실

<무소유>마저 버리고 떠난 법정 스님

법정 스님의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승의 삶이라는 게 뜻대로 되는 건 별로 없다는 걸 알겠다. 생각할수록 쓸쓸하여 인터넷에 들어가 스님 사진을 더 찾아보았는데, 대개 이러하다.

 

 

열심히 인터넷 찾아 웃는 사진 하나 골라냈다.

돌아가신 뒤에 봐서 그런지 웃음마저 쓸쓸해보인다.

 

세상을 살다보면 벼라별 도전에 다 직면하지만, 스님들은 출가하는 것으로 사실상 그런 괴로움에서 많이 벗어난다고 본다.

앙알거리는 아내, 매달려 떼쓰는 자식, 회사 동료와 자리 다툼하는 것이며, 돈 벌어보겠다고 이놈 저놈 눈치보고, 부모형제 일로 마음 쓰는 일까지 해서 사바의 일은 늘 고군분투다. 스님들은 이런 걸 잘 모른다.

우스갯소리지만 난 내 친구 스님에게 출가하는 거야 쉽지, 세상 한번 살아보라고 농담한 적도 있다. 속세에 사는 게 진짜 인생이지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인 산사에서야 희로애락이 어디 있으며, 예쁜 여자에게 홀릴 일이 있나, 승진하고 싶은 욕심이 나나, 돈벌어 뽐내보겠다는 욕심이 생기나, 그저 천년만년 앉아 있는 바위 같은 삶이 아닌가---- 이런 줄 알았다.

 

그런데 법정 스님을 보니 안그렇다는 걸 알겠다. 세상살이가 승속 가리지 않고 힘들구나, 그렇게 알겠다.

 

그는 1932년, 일제 치하의 조선 해남에서 태어났다. 목포상고를 졸업하고, 1956년 전남대 상대를 3년까지 다닌 걸 보니 집안이 못살지는 않은 듯하다. 나이가 꽤 들어서 대학에 간 듯하다. 육이오전쟁에서는 어떤 역할을 하셨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1956년에 경남 통영 미래사에서 효봉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 효봉 스님.

 

그의 스승 효봉 스님은 일제 시절 판사였는데 독립운동한 이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뒤 죄책감을 느끼고 출가하신 분이다.

 

법정 스님 인생에서는 내가 보기에 <무소유>와 <맑고 향기롭게>게 가장 중요한 듯하다. <무소유>는 1976년 범우사에서 나온 수필집이다.

이 책에서 법정은 난초를 기르는데, 일본에서 영양제 사다 주는 등 정성을 들이다 어느 순간 자신이 난초에 구속되어 있다는 걸 알고 다른 스님에게 줘버렸다는 일화를 싣고 있다. 

유기견까지 모아다 길러온 나로서는 이 대목이 별로 마음에 닿지 않았는데, 여하튼 이 책 이후 법정 스님은 별호를 갖게 됐다. 대개 스님들은 사치할 일이 별로 없다보니 호를 하나씩 갖는 풍습이 있다. 법정은 별호 갖는 풍습을 싫어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법정 말고, <무소유 스님>으로 통했으니 별호가 따로 필요 없었을 것이다.

 

1976년 처음 <무소유>가 출간된 이후 법정은 <무소유>라는 별호를 이름에 달고 살게 되었다. 이 <무소유>는 그에게는 엄청난 계율이 되었던 듯하다.

원래 법정은 사회참여 의식이 뛰어난 스님이었다. 그 자신, 동국역경원 편찬부장을 지내고, 불교신문사 주필을 지내고,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을 맡고, 유신 철폐 개헌 서명 운동을 하는 등 뚜렷한 사회개혁의식을 갖고 실제 참여하던 분이었다. 돌아가시기 전만 해도 4대강 정비 사업을 반대하던 분이다. 그의 연표를 보면 뭔가  끊임없이 사회활동을 해왔다는 걸 알 수 있다.

 

▲1932년 11월 5일(음력 10월 8일) = 전남 해남군 문내면 선두리 출생
▲1954년 = 통영 미래사에서 효봉 선사를 은사로 입산 출가
▲1956년 7월 15일 = 효봉 선사를 은사로 사미계 수계
▲1959년 3월 15일 =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자운율사를 계사로 비구계 수계
▲1959년 4월 15일 = 해인사 전문강원에서 명봉화상을 강주로 대교과 졸업, 이후 지리산 쌍계사와 가야산 해인사, 조계산 송광사 등 선원에서 수선안거(修禪安居)
▲1960?1961년 = ‘불교사전’ 편찬 작업에 동참
▲1967년 동국역경원 편찬부장
▲1972년 첫 저서 ‘영혼의 모음’ 출간
▲1973년 불교신문사 논설위원, 주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민주수호국민협의회와 유신 철폐 개헌 서명운동 참여
▲1975년 10월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충격, 송광사 불일암으로 돌아감
▲1976년 대표 저서인 ‘무소유’ 출간
▲1984?1987년 송광사 수련원 원장
▲1985년 경전공부 모임 법사
▲1987?1990년 보조사상연구원 원장
▲1992년 강원도 산골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기고 홀로 수행정진
▲1993년 8월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 준비위원회 발족
▲1993년 10월 10일 프랑스 최초의 한국 사찰인 파리 길상사 개원
▲1994년 1월 1일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 창립
▲1994년 3월 26일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 창립 기념 첫 대중법문을 서울, 부산, 대구, 전주 등지에서 하며 지부 발족
▲1995년 김영한(법명 길상화)씨의 대원각 시주를 받아들여 송광사 말사 ‘대법사’로 조계종에 등록
▲1997년 1월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 이사장 취임
▲1997년 12월 14일 대법사를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바꾸고 창건 법회
▲1998년 2월 24일 명동성당 축석 100돌 기념 초청 강연
▲2003년 10월 ‘맑고 향기롭게’ 창립 10주년 기념 강연, 파리 길상사 개원 10주년 기념 법문
▲2003년 12월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 회주에서 스스로 물러남
▲2010년 3월 11일 길상사에서 법랍 55세, 세수 78세로 입적

 

 

이러한 법정 스님이 무소유 스님이 된 이래 간소하게 삶을 사시느라 얼마나 힘드셨을지 모르겠다. 강원도 오두막으로 떠날 때 심경도 이해가 간다. 사람들은 무소유 스님이라니까 돈 한 푼도 가져서는 안된다는 식으로 스님을 대했을 것이다. 물 한 모금 더 마셔도 무소유에 금이 가는 것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쌀, 채소, 된장, 소금, 이런 것들이 주식이었을 것이다. 길가다 국수를 사먹을 때도 멸치는 건져냈다니 말이다.

 

 

스님이 무소유에서 벗어나 보려고 하신 게 <맑고 향기롭게>가 아닌가 싶다. 무소유만으로는 너무 맑고 깨끗한 수행자 이미지만 있으니까 한 발 더 나아가 자신의 삶에 향기를 더하고 빛을 더하기 위해 이 운동을 계획하신 듯하다. 즉 <무소유>는 소승의 일이요, <맑고 향기롭게>는 대승의 일로 판단하신 듯하다. 그제야 좀 숨통이 트셨을 것으로 보인다.

 

남을 돕는다는 건 본래 사치에 속한다. 남을 도우면서 내가 잘났다는 망상을 하기 쉽고, 은근히 즐기고, 기뻐하게 되는 게 남 돕는 일이다. 실제로 봉사를 하거나 헌금을 하거나 기부를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런데 이 기분이라는 게 나쁜 놈이다. 기분이 좋아져서는 안되는데 원래 이 모양이다. 그래서 스님은 무주상보시를 생각하신 듯하다. 남을 돕되 도운 티를 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림자 없는 보시가 무주상 보시다. 이게 보시 중의 보시로 금강경에서 붓다께서이 누누히 강조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좋은 일도 많아서 시민단체도 있고, 정치도 있고, 교육도 있다. 다같이 남을 위해 일하는 것처럼 포장하지만 이 모든 행위는 사실상 '마음에 새기는 보시' 즉 잘난 척하려고 과시하는 보시다. 부자들이 수십 억 원씩 절에 기부하는 것도 실은 과시하려는 것이다. 절 장부에 금액을 큰 글씨로 적어넣거나 아니면 범종에 이름을 새기거나 대웅전 기둥에 이름 석 자 새기는 게 다 '잘난 척하는 보시'다. 부처님은 이런 식으로 우주에 있는 모든 별마다 가득 보석을 채워 보시해도 사탕 하나 무념무상으로 주느니만 못하다고 하셨다.

 

법정 스님은 <무소유>와 <맑고 향기롭게>에 계율처럼 끌려다녔든 앞서가셨든 평생 그런 삶을 지키다가 참말로 그림자 없이 가셨다. 법정이 저작권자로 돼있는 모든 책을 절판하라는 건 아마도 78세로 사시기까지 힘들었을 그 고행의 아픔을 표현하신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세상을 맑고 향기롭게 하려면 스님의 책 같은 게 많이 읽혀지는 게 옳다고 보는 게 보통 사람들의 생각이련만, 스님은 아니다. 이게 화두거리다. "내 저작물에서 나오는 인세는 가난한 이웃에게 보시하라"도 아니고, 절판해버려라, 이럴 때는 그 이유가 있는 법이다. 난 <무소유>가 스님을 짓눌러온 그 무게를 상상해본다. 돌아가시면서까지 그 무게를 지고 싶지 않으셨는지도 모른다.

 

더구나 법정 스님은 환생을 믿는 분이다. 다른 세상에 다른 사람으로 태어나 살면서까지 이승의 인연에 묶이고 싶지 않으셨는지도 모른다.

이래저래 스님은 가셨지만 생각할거리를 많이 남기고 가셨다.

물론 법정 스님 가셔서 신나는 스님들도 있을 것이다.

처를 숨겨둔 은처승들, 재산 몰래 빼돌려 숨겨놓고 호의호식하는 스님들, 배가 터지도록 먹고도 모자라 냉장고가 가득 차 있는 스님들, 아파트 몰래 얻어 놓고 거길 토굴이라고 자랑하는 스님들, 여신도하고 눈맞아 밤마다 딴짓하는 스님들, 공부는 안하고 신도들에게 먹을거리 내놓아라, 옷 해바쳐라 야단치는 스님들, 차 마시는 데 환장하여 비싼 다구 사다 늘어놓고 낮이나 밤이나 그거 들여다보는 스님들, 법정 스님 가셔서 한숨 돌렸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