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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사람들/선시(禪詩) 감상실

깨달은 이의 노래 증도가

 

증도가를 인쇄하기 위해 만든 활자가 직지심경보다 더 오래되었다는 기사가 나왔다. <기사 바로가기>

 

 

 

다른 것도 아니고 당시 세계 최고 지성이라고 할 수 있는 직지인심, 증도가 등이 역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에 새겨졌다니 놀랍고 떨린다.

증도가는 <깨달은 이의 노래>다. 증도가를 지은 영가 스님을 먼저 친견하고, 이어 증도가를 감상해보자.

인터넷에서 구한 자료인데 글쓴이를 모르겠다.<출처로 가서 확인하기>

살짝 다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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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도가(證道歌)>는 영가(永嘉)스님이 지었다.
영가(永嘉) 스님의 휘(諱)는 현각(玄覺)이요, 자(字)는 도명(道明)이며, 성은 대(戴)씨이며, 절강성 온주부 영가현[浙江省溫州府永嘉縣] 출신이다.

 

어릴 때 출가하여 안으로는 삼장(三臟)을 두루 섭렵하고 밖으로는 외전에도 널리 통달하였다고 한다.
영가 스님은 본래 천태종 계통으로 천태지관(天台止觀)을 많이 익혀서 그 묘를 얻고 항상 선관(禪觀)으로 수행하였다. 천태종 팔조(八祖)인 좌계 현랑(左溪玄朗) 법사와는 동문(同門)이며, 나중에 도를 성취하고 난 뒤에도 서로 서신 왕래를 하였다.

 

일찍이 온주의 개원사(開元寺)에 있으면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지내며 효순하기로 소문이 났으나, 누님까지 함께 지내니 두 사람을 보살피고 있다 하여 온 사중(寺中)과 동구(洞口)에서 비방을 하였다.

어느 날 어머니가 별세하여 상복을 입고서도 누님을 떠나 보내지 못하니 사람들의 비방이 더욱 심했으나 영가 스님은 전혀 그러한 데 개의치 않았다.

 

영가 스님이 천태종에 있으면서 선관을 닦고 선종과 비슷한 길을 밟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러면 왜 천태종에서 선종으로 왔을까.

 

어느 날 개원사 복도로 현책(玄策)이라는 선사가 지나가고 있었는데 나이는 60여세였다. 이때 그의 누님이 발 밖으로 그 노숙(老宿)을 보고,
"저 노스님을 방으로 청해서 대접했으면 좋겠다."
고 하였다. 영가 스님이 얼른 나가서 노스님을 청했더니, 노숙은 들어오지 않으려 하다가 스님의 간절한 청에 못이겨 방에 들어왔다. 그 노숙과 법에 대해 여러 가지로 토론해 보니 자신의 견처나 노스님의 견처가 같은 점도 많이 있고 독특한 점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현책 스님이 영가 스님에게 물었다.

"그대의 법사는 누구인가?"
"제가 <방등경론>을 배울 때는 각각 스승이 계셨으나, 뒤에 <유마경>에서 불심종(佛心宗)을 깨치고는 아직 증명하실 분이 없습니다."


세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노스님은 영가 스님의 기상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고 또 그 누님에게도 협기(俠氣)가 있음을 느끼고 이렇게 권했다.
"부모와 형제에게 효순하는 일도 한 가지 길이지만, 당신은 불법의 이치를 밝히기는 했으나 스승의 인가를 얻지 못하고 있소. 과거의 부처님들도 성인과 성인이 서로 전하시고 부처와 부처가 서로 인가하였습니다. 석가여래께서도 연등불의 수기를 받으셨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천연외도에 떨어지게 되기 때문이오. 남방에 큰 스승으로 혜능 선사가 계십니다. 그곳으로 가서 발 아래 예배하고 스승으로 섬기시오."
그러자, 영가 스님이
"다른 분을 증명법사로 모실 것이 아니라 스님께서 법이 수승하신 듯하니 스님을 증명법사로 모시면 좋겠습니다. 저를 위해서 허락해 주십시오." 하자, 현책 스님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로서는 그대의 증명법사가 되기는 곤란하오. 지금 조계에는 육조대사가 계셔서 사방에서 학자가 운집하여 법을 받는 터이니 만약 그대가 가겠다면 함께 가리다."
그러나 영가 스님은 누님을 홀로 남겨두고 떠날 수가 없어 망설였다. 그러자 누님이 하는 말이 "나는 다른 데 의지해서 지낼 수 있으니 나를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시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현책 스님과 함께 떠났는데, 그 때에 영가 스님의 나이는 31세였다. 그럭저럭 시흥현(始興縣) 조계산(曹溪山)에 이르니 때마침 육조대사(六祖大師)께서 상당(上堂)하여 법문을 하고 계셨다. 이에 영가 스님은 절도 하지 않고 선상을 세 번 돌고 나서 육환장을 짚고 앞에 우뚝 서있자니 육조대사께서 물으셨다.
"대저 사문(沙門)은 삼천위의(三千威儀)와 팔만세행(八萬細行)을 갖추어서 행동이 어긋남이 없어야 하거늘, 대덕(대덕)은 어디서 왔기에 도도하게 아만을 부리는가?"


육조 스님의 이러한 말씀은 건방지게 와서 인사도 하지 않고 선상만 세 번 돌고 턱 버티고 서 있기만 하니 그것은 아만심이 탱천하기 때문이 아니냐하는 힐난이다. 그러나 육조 스님이 영가 스님 하는 짓을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한 번 슬쩍 법을 걸어본 것이다.
그러자 영가 스님께서
"나고 죽는 일이 크고, 무상(無常)은 빠릅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육조 스님이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남[生]이 없음을 체험해 얻어서 빠름이 없는 도리를 요달하지 못하는가?"
이렇게 육조 스님께서 반문하시니 이것은 '네가 지금 무상이 빠르다고 하니 그 무상(無常)의 근본을 바로 체험하여 깨치고, 남이 없음[無生]을 요달하면 빠르고 빠르지 않음이 떨어져 버린 구경을 성취하게 되는데 왜 그것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느냐'라는 말씀이다.
이에 영가 스님이 답하였다.


"본체는 곧 남이 없고 본래 빠름이 없음을 요달하였습니다."
본체는 원래 남이 없으니 그걸 우리가 체득할 필요가 뭐 있느냐는 것이다. 이대로가 남이 없고 그대로가 빠름이 없는데, 다시 남이 없고 빠름이 없음을 요달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영가 스님이 반박하자, 육조 스님이
"네 말과 같다. 네 말과 같다."
고 인가하시니, 천여 명의 대중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그때에야 비로소 영가 스님은 다시 동랑(東廊)으로 가서 육환장을 걸어 놓고 위의를 갖추어 육조 스님께 정중히 예배하였다. 위의를 갖춘다는 것은 큰 가사를 입고 향을 피우고 스님에게 예배를 드리는 것을 말한다. 영가 스님이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나서 바로 하직 인사를 드리자 육조스님이 말씀하셨다.
"왜 그리 빨리 돌아가려고 하느냐?"
"본래 스스로 움직이지 않거니와 어찌 빠름이 있겠습니까?"
"누가 움직이지 않는 줄 아느냐?"
"스님께서 스스로 분별을 내십니다."
"네가 참으로 남(生)이 없는 도리를 알았구나!"
"남이 없음이 어찌 뜻이 있겠습니까?"
이는 남이 없음에 뜻이 있다면 남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뜻이 없다면 누가 분별하느냐?"
뜻이 있느니 없느니 하고 있는 그것부터가 분별하는 것이 아니냐는 육조스님의 질책이다.
"분별하는 것도 뜻이 아닙니다."


분별을 하여도 심(心), 의(意), 식(識)의 사량으로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진여대용의 나타남이라는 영가 스님의 말씀이다. 그러자 육조 스님께서 선상에서 내려오시더니 영가스님의 등을 어루만지시며 말씀하셨다.
"장하다 옳은 말이다. 손에 방패와 창을 들었구나. 하룻밤만 쉬어 가거라."
그리하여 그 때 사람들이 영가 스님이 조계산에서 하룻밤만 자고 갔다 하여 일숙각(一宿覺)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이튿날 육조 스님께 하직을 고하니 육조 스님은 몸소 대중을 거느리시고 영가 스님을 전송하셨는데, 영가스님이 열 걸음쯤 걸어 가다가 석장을 세 번 내려치고 말했다.
"조계를 한 차례 만난 뒤로는 나고 죽음과 상관없음을 분명히 알았노라!"
선사가 고향으로 돌아오자 그의 소문은 먼저 퍼져서 모두들 그를 '부사의(不思議) 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그의 가(歌), 항(行), 게(偈), 송(頌)은 모두가 그의 누나가 수집한 것이다.
영가 스님은 선천(先天) 2년(서기 713년) 10월 17일에 입적하시니 세수 39세였으며, 시호(諡號)는 무상대사(無相大師), 탑호(塔號)는 정광(淨光)이다. 그해에 육조스님께서도 돌아가시니 세수 76세였다.


영가 스님은 <증도가(證道歌)>에서 깨달음의 계기를 이렇게 말했다.
"스스로 조계의 길을 깨친 뒤로 나고 죽음과 상관없음을 분명히 알았다."

조계산에 있는 육조스님을 찾아가서 근본을 확철히 깨쳤다는 의미다.
영가 스님이 자기 스스로 조계의 길을 확실히 깨치고 난 뒤에는 나고 죽음에 자재하다고 말씀하셨으며, 자기가 평생동안 연구했던 천태종을 버리고 육조 스님의 조계 선종의 입장에서 법문하였고 저술도 하였다.

 

영가 스님은 육조 스님을 찾아가서 확철히 깨치고 난 뒤 이 <증도가>를 지었는데, 천태종이나 다른 교가의 사상과는 많이 다르다. 그러므로 천태종에서는 교리적으로 볼 때 맞지 않는 것이 많이 있다 하여 이것이 일종의 미친 견해이지 바른 견해는 아니라고까지 혹평하고 있다. 그렇지만 선종에서 볼 때는 <증도가>가 선종사상을 대표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으므로, 그렇게 비난하는 사람들은 선종을 모르는 데서 하는 말이지 바른 길을 아는 사람이면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선(禪)과 교(敎)의 관계가 <증도가>에서 더욱 더 완연히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선(禪)에서는 '한 번 뛰어 넘어 여래지에 바로 들어간다[一超直入如來地]'고 많이 주장하는데 대해서, 교[敎]에서는 '점차 닦아 성불하는 것[漸修]'만을 근본으로 표방하므로 서로가 정반대의 입장에 서게 된다. 그래서 그 당시 영가 스님의 <증도가>에 대해서 천태종에서 가장 많이 공격했지만, 그 공격도 일시적인 것이 되고 말았으며, 영가 스님의 <증도가>는 실제로 도 닦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만고의 표준이 되고 있다.

 

<증도가(證道歌)>의 '증(證)'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증(證)'이란 구경(究竟)을 바로 체득함을 말한다.
깨달음[悟]에도 증오(證悟)와 해오(解悟)의 두 가지가 있다. 해오(解悟)란 견해(見解), 지해(知解)를 말하는 것으로, 알기는 분명히 알지만 실제 마음으로 체득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얼음이 본래 물인 줄은 알지만 아직 녹지 않고 얼음 그대로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얼음을 녹여 물로 쓰고 있지는 못하듯이 중생이 본래 부처인 줄은 분명히 알지만 번뇌망상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어서 중생 그대로인 것, 그것을 해오(解悟)라고 말한다.

 

'증오(證悟)'란 얼음을 완전히 녹여서 물로 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물 자체도 볼 수 없는 경계, 따라서 중생의 번뇌망상이 다 끊어져서 제8 아뢰야 근본무명까지 끊어진 구경각을 말하니 곧 실지로 성불한 것, 견성한 것을 증오(證悟)라 하고 간단히 줄여서 증(證)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가(敎家)에서든지 선가(禪家)에서든지 증(證)이라 하면 근본적으로 체달한 구경각(究竟覺)을 말하는 것이지 그 중간에서 뭘 좀 아는 걸 가지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공통된 사실이다.
그러면 어째서 이 노래에 '증(證)'자를 붙였냐 하면, 선종에서 깨쳤다고 하는 것은 언제든지 '증오(證悟)'를 근본적으로 삼지 '해오(解悟)'로서는 근본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선가에서 깨쳤다고 하는 것,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한다는 것은 '증오(證悟)'이지 '해오(解悟)'가 아니라는 것이다.

보조(普照)스님도 처음에는 선가에서 전한 법을 '해오(解悟)'라고 잘못 보았다가 나중에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이라든가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같은 데서는 선이란 '증오(證悟)'이지 '해오(解悟)'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그와 마찬가지로 선가의 근본 표본은 '해오(解悟)'가 아닌 구경각이며, 선가의 깨달음[悟]이란 구경적으로 체달한 것임을 표현하기 위해서 노래 이름부터도 '증(證)'이라 하였지 '해(解)'라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선종에서는 언제든지 깨친 것을 '돈오(頓悟)'라 하는데, "돈(頓)이란 망념을 순식간에 없애는 것이요 오(悟)란 얻는 바가 없음을 깨닫는 것이라"고 대주(大珠)선사는 설파하고 있다.
근본 무명인 제8 아뢰야는 무기무심(無記無心)의 마계(魔界)까지 완전히 벗어나서 대원경지(大圓鏡智)에 들어가 진여본성을 확철히 깨친 것이 곧 '증(證)'이다. 그러므로 선가에서는 그 중간적인 것을 '깨달음'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여야 한다. 그래야만 앞으로 설명하는 <증도가>를 이해할 수 있지 '증오(證悟)'와 해오(解悟)'를 혼동해서는 영원히 <증도가>를 모른다.

 

이 <증도가>는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해서 부처님으로부터 달마 스님까지, 달마 스님에서 육조 스님까지, 그리하여 오가칠종(五家七宗)으로 내려온 정안종사(正眼宗師)의 증오처(證悟處)를 표방하고 있기 때문에 '증(證)'이라 한다.

 

그러면 어째서 도(道)라 하는가?
도(道)를 보리(菩提)라, 각(覺)이라 하는데 <증(證)>을 근본으로 삼았으므로, 이 도(道)라 하는 것은 증(證)한 도(道)를, 구경각을 성취한 그 구경처(究竟處)를 말한다. 즉 도(道)란 구경을 깨친 '증(證)'한 도(道)이지 중각적인 도(道), 해(解)한 도(道)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구경각인 도란 무엇인가?
"무심이 도라고 일컬어 말하지 말라.
무심도 오히려 한 겹 두터운 관문이 막혀 있느니라.
[莫道無心云是道하라 無心猶隔一重關이니라]"

도는 무심과 통한다. 우리가 실지로 공부해서 대무심지(大無心地)에 들어가서 구경각을 바로 성취하면 그만인데,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지 못하고 제8 아뢰야 무기무심에 떨어지게 된다. 따라서 그 폐단을 막기 위해서 제8 아뢰야의 무심 즉 멸진정(滅盡定)의 무심은 도(道)가 아니라고 말한다. 멸진정의 무심도 아주 벗어나서 제8 아뢰야의 근본 무명까지 끊어진 곳에서 구경각을 성취하여 대원경지가 현발한 이것이 도(道)인 것이며, 진연본성을 바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증(證)'이 곧 '도(道)'이며 '도(道)'가 곧 '증(證)'이라 하는 것이다.

 

달마 스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밖으로 모든 연을 쉬고
안으로 헐떡거림이 없어서
마음이 장벽과 같아야
도에 들어갈 수 있느니라.
[外息諸緣하고 內心無喘
心如墻壁하사와 可以入道니라]"

 

그러면 마음이 담과 벽 같아야 한다고 하니 목석과 같고 장승과 같은 무심지에 들어가 버리면 그것이 도(道)냐 하면, 그것이 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제8 아뢰야 무기무심이 장애가 되어 근본적인 구경무심에는 아직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참으로 구경의 대무심지에 들려면 멸진정의 가무심(假無心), 거기서 한 관문을 더 뚫어서 구경무심을 성취해야 바로 도(道)를 깨친 것이다. 그러므로 앞에서 인용한 달마 스님의 말씀도 구경적인 도를 말씀함이지 중간적인 도가 아니며 증오(證悟)의 '도(道)'이지, 해오(解悟)의 '도(道)'는 아니다. 달마 스님 이래로 선종에서 전해 내려온 것이 구경각을 '증(證)'이라 하고, '도(道)'라 하는 것도 '증(證)'을 근본 내용으로 삼기 때문에 구경각이 도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참된 도는 달마 스님이 말씀하신 무심을 한층 넘어간 도가 되어야지 그 중간적인 것은 도가 아니다.

 

그러면 '가(歌)'란 무엇인가?
영가 스님 자신이 확철히 깨친 경계를 노래로써 표현한 것이다. 영가 스님이 육조 스님을 찾아가 확철히 깨쳐 구경각을 성취하고 나서 그 경지를 시가(詩歌) 형식으로 노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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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은 이의 노래 증도가>를 성철 대선사가 번역한 글

<출처로 가서 바로보기> * 띄어쓰기만 바로잡음

 


1 君不見
그대 보지 못하였는가.

2 絶學無爲閑道人 不除妄想不求眞
배움이 끊어진 하릴없는 한가한 도인은 망상도 없애지 않고 참됨도 구히지 않으니

3 無明實性 卽佛性 幻化空身 卽法身
무명의 참 성품이 곧 불성이요 허깨비 같은 빈 몸이 곧 법신이로다.

4 法身 覺了無一物 本源自性 天眞佛
법신을 깨달음에 한 물건도 없으니 근원의 자성이 천진불이라

5 五陰浮雲 空去來 三毒水泡虛出沒
오음의 뜬구름이 부질없이 가고 오며 삼독의 물거품은 헛되이 출몰하도다.

6 證實相無人法 刹那 滅却阿鼻業
실상을 증득하여 人. 法이 없으니 찰나에 아비지옥의 업을 없애버림이라

7 若將妄語衆生 自招拔舌塵沙劫
거짓말로 중생을 속인다면 진사겁토록 발설지옥 보를 스스로 부르 리로다.

8 頓覺了如來禪 六度萬行 體中圓
여래선을 단박에 깨치니 육도만행이 본체 속에 원만함이라

9 夢裏 明明有六趣 覺後 空空無大千
꿈속에선 밝고 밝게 육취가 있더니 깨친 후엔 비고 비어 대천 세계가 없도다.

10 無罪福無損益 寂滅性中 莫問覓
죄와 복이 없고 손해와 이익도 없나니 적멸한 성품 가운데서 묻고 찾지 말라.

11 比來 塵鏡 未曾磨 今日 分明須剖析
예전엔 때 낀 거울 미처 갈지 못하더니 오늘에야 분명히 닦아내었도다.

12 誰無念誰無生 若實無生無不生
누가 생각이 없으며 누가 남이 없는가. 진실로 남이 없으면 나지 않음도 없나니

13 喚取機關木人問 求佛施功早晩成
기관목인을 불러 붙들고 물어 보라. 부처 구하고 공 베풂을 조만간 이루리로다.

14 放四大莫把捉 寂滅性中 隨飮啄
사대를 놓아 버려 붙잡지 말고 적멸한 성품 따라 먹고 마실지어다.

15 諸行 無常一切空 卽是如來大圓覺
모든 행이 무상하여 일체가 공하니 이는 곧 여래의 대원각이로다.

16 決定說表眞乘 有人 不肯任情徵
결정된 말씀과 참됨을 나타낸 법을 어떤 사람은 긍정치 않고 정에 따라 헤아림이라

17 直截根源佛所印 摘葉尋枝 我不能
근원을 바로 끊음은 부처님 인가하신 바요 잎 따고 가지 찾음은 내 할 일 아니로다.

18 摩尼珠 人不識 如來藏裏 親收得
마니주를 사람들은 알지 못하니 여래장 속에 몸소 거두어 들임이라

19 六般神用空不空 一顆圓光色非色
여섯 가지 신통묘용은 공하면서 공하지 않음이요 한 덩이 뚜렷한 빛은 색이면서 색이 아니로다.

20 淨五眼得五力 唯證乃知難可測
오안을 깨끗이 하여 오력을 얻음은 증득해야만 알 뿐 헤아리긴 어렵도다.

21 鏡裏 看形見不難 水中捉月爭拈得
거울속의 형상 보기는 어렵지 않으나 물속의 달을 붙들려 하나 어떻게 잡을 수 있으랴.

22 常獨行常獨步 達者同遊涅槃路
항상 홀로 다니고 항상 홀로 걷나니 통달한 이 함께 열반의 길에 노닐도다.

23 調古神淸風自高 貌悴骨剛人不顧
옛스러운 곡조 신기 맑으며 풍채 스스로 드높음이여 초췌한 모습 앙상한 뼈 사람들 돌아보지 않는도다.

24 窮釋子口稱貧 實是身貧道不貧
궁색한 부처님 제자 입으로는 가난타 말하나 실로 몸은 가난해도 도는 가난치 않음이라.

25 貧則身常披縷褐 道則心藏無價珍
가난한 즉 몸에 항상 누더기를 걸치고 도를 얻은 즉 마음에 무가보(無價寶)를 감추었도다.

26 無價珍用無盡 利物應時終不
무가보는 써도 다함이 없나니 중생 이익하며 때를 따라 끝내 아낌이 없음이라

27 三身四智 體中圓 八解六通 心地印
삼신. 사지는 본체 가운데 원만하고 팔해탈 육신통은 마음땅의 인(印)이로다.

28 上士 一決一切了 中下 多聞多不信
상근기는 한번 결단하여 일체를 깨치고 중. 하근기는 많이 들을수록 더욱 믿지 않는도다.

29 但自懷中解垢衣 誰能向外誇精進
스스로 마음의 때 묻은 옷을 벗을 뿐 뉘라서 밖으로 정진을 사랑할건가.

30 從他謗任他非 把火燒天徒自疲
남의 비방에 따르고 남의 비난에 맡겨두라. 불로 하늘을 태우려 하나 공연히 자신만 피로하리로다.

31 我聞恰似飮甘露 鎖融頓入不思議
내 듣기엔 마치 감로수를 마심과 같아서 녹아서 단박에 부사의 해탈경에 들어 가리로다.

32 觀惡言 是功德 此則成吾善知識
나쁜 말을 관찰함이 바로 공덕이니 이것이 나에게는 선지식이 됨이라

33 不因謗起怨親 何表無生慈忍力
비방 따라 원망과 친한 마음 일지 않으면 하필이면 남이 없는 자비인욕의 힘 나타내 무엇할건가.

34 宗亦通說亦通 定慧圓明不滯空
종취도 통하고 설법도 통함이여 선정과 지혜가 뚜렷이 밝아 공에 응체 하지 않는도다.

35 非但我今獨達了 河沙諸佛體皆同
나만 이제 통달하였을 뿐 아니라 수 많은 모든 부처님 본체는 모두 같도다.

36 獅子吼無畏說 百獸聞之皆腦裂
사자후의 두려움 없는 설법이여 뭇 짐승들 들으면 모두 뇌가 찢어짐 이라

37 香象 奔波失却威 天龍 寂聽生欣悅
향상은 분주하게 달아나 위엄을 잃고 천룡은 조용히 듣고서 희열을 내는 도다

38 遊江海涉山川 尋師訪道爲參禪
강과 바다에 노닐고 산과 개울을 건너서 스승 찾아 도를 물음은 참선 때문이라

39 自從認得曹溪路 了知生死不相干
조계의 길을 인식하고 부터는 생사와 상관없음을 분명히 알았도다.

40 行亦禪坐亦禪 語默動靜體安然
다녀도 참선이요 앉아도 참선이니 어묵동정(語默動靜)에 본체가 편안함이라

41 縱遇鋒刀常坦坦 假饒毒藥也閑閑
창. 칼을 만나도 언제나 태연하고 독약을 마셔도 한가롭고 한가롭도다.

42 我師得見燃燈佛 多劫 曾爲忍辱僊
우리 스승 부처님께서 연등불을 뵈옵고 다겁토록 인욕선인이 되셨도다.

43 幾廻生幾廻死 生死悠悠無定止
몇번을 태어나고 몇 번인나 죽었던가. 생사가 아득하여 그침이 없었도다.

44 自從頓悟了無生 於諸榮辱何憂喜
단박에 깨쳐 남이 없음을 요달하고부 터는 모든 영욕에 어찌 근심하고 기뻐하랴.

45 入深山住蘭若 岑幽邃長松下
깊은 산에 들어가 고요한 곳에 머무니 높은 산 그윽하여 낙락장송 아래로다.

46 優遊靜坐野僧家 寂安居實蕭灑
한가히 노닐며 절 집에서 조용히 앉았으니 고요한 안거 참으로 소쇄(蕭灑)하도다.

47 覺卽了不施功 一切有爲法不同
깨친즉 그만이요 공 베풀지 않나니 모든 유위법과 같지 않도다.

48 住相布施 生天福 猶如仰箭射虛空
모양과 머무는 보시는 하늘에 나는 복이나 마치 허공에 화살을 쏘는 것과 같도 다.

49 勢力盡箭還墜 招得來生不如意
세력이 다하면 화살은 다시 떨어지나니 내생에 뜻과 같지 않는 과보를 부르리로다.

50 爭似無爲實相門 一超直入如來地
어찌 함이 없는 실상문에 한번 뛰어 여래지에 바로 들어감과 같으리오.

51 但得本草愁末 如淨瑠璃含寶月
근본만 얻을 뿐 끝은 근심치 말지니 마치 깨끗한 유리가 보배달을 머금음과 같도다.

52 旣能解此如意珠 自利利他終不竭
이미 이 여의주를 알았으니 나와 남을 이롭게 하여 다함이 없도다.

53 江月照松風吹 永夜淸何所爲
강엔 달 비치고 소나무엔 바람 부니 긴긴 밤 맑은 하늘 무슨 하릴 있을건가.

54 佛性戒珠 心地印 霧露雲霞 體上衣
불성계의 구슬은 마음의 인(印)이요 안개. 이슬. 구름. 노을은 몸 위의 옷 이로다.

55 降龍鉢解虎錫 兩金環鳴歷歷
용을 항복받은 발우와 범싸움 말린 석장이여 양쪽 쇠고리는 역력히 울리는도다.

56 不是標形虛事持 如來寶杖 親
이는 모양을 내려 허투루 지님이 아니요 부처님 보배 지팡이를 몸소 본받음 이로다.

57 不求眞不斷妄 了知二法 空無相
참됨도 구하지 않고 망령됨도 끊지 않나니 두 법이 공하여 모양 없음을 분명히 알았도다.

58 無相無空無不空 卽是如來眞實相
모양도 없고 공도 없고 공 아님도 없음이여 이것이 곧 여래의 진실한 모습이로다.

59 心鏡明鑑無碍 廓然瑩徹周沙界
마음의 거울 밝아서 비침이 걸림 없으니 확연히 비치어 항사세계에 두루 사무 치도다.

60 萬象森羅影現中 一顆圓明非內外
만상삼라의 그림자 그 가운데 나타나고 한 덩이 뚜렷이 밝음은 안과 밖이 아 니로다.

61 豁達空撥因果 茫茫蕩蕩招殃禍
활달히 공하다고 인과를 없다하면 아득하고 끝없이 앙화를 부르리로다.

62 棄有著空病亦然 還如避溺而投火
있음을 버리고 공에 집착하면 병이기는 같으니 마치 물을 피하다가 불에 뛰어드는 것과 같도다.

63 捨妄心取眞理 取捨之心成巧僞
망심을 버리고 진리를 취함이여 취사하는 마음이 교묘한 거짓을 이루도다.

64 學人 不了用修行 眞成認賊將爲子
배우는 사람이 잘 알지 못하고 수행 하나니 참으로 도적을 아들로 삼는 짓이로다.

65 損法財滅功德 莫不由斯心意識
법의 재물을 덜고 공덕을 없앰은 心. 意. 識으로 말미암지 않음이 없음이라

66 是以 禪門 了却心 頓入無生知見力
그러므로 선문에선 마음을 물리치고 남이 없는 지견의 힘에 단박에 들어 가도다.

67 大丈夫秉慧劒 般若鋒兮金剛
대장부가 지혜의 칼을 잡으니 반야의 칼날이요 금강의 불꽃이로다.

68 非但能外道心 早曾落却天魔膽
외도의 마음만 꺾을 뿐 아니요 일찍이 천마의 간담을 떨어뜨렸도다.

69 震法雷擊法鼓 布慈雲兮灑甘露
법의 우레 진동하고 법고를 두드림이여 자비의 구름을 펴고 감로수를 뿌리는 도다.

70 龍象 蹴踏潤無邊 三乘五性 皆惺悟
용상이 차고 밟음에 윤택이 그지 없으니 삼승(三乘)과 오성(五性)이 모두 깨치는도다.

71 雪山肥니更無雜 純出醍호我常納
설산의 비니초는 다시 잡됨이 없어 순수한 제호를 내니 나 항상 받는도다.

72 一性 圓通一切性 一法 含一切法
한 성품이 뚜렷하게 모든 성품에 통하고 한 법이 두루하여 모든 법을 포함하 나니

73 一月 普現一切水 一切水月 一月攝
한 달이 모든 물에 두루 나타나고 모든 물의 달을 한 달이 포섭하도다.

74 諸佛法身 入我性 我性 還共如來合
모든 부처님의 법신이 나의 성품에 들어오고 나의 성품이 다시 함께 여래와 합치 하도다.

75 一地 具足一切地 非色非心非行業
한 지위에 모든 지위 구족하니 색도 아니요 마음도 아니요 행업도 아니로다.

76 彈指圓成八萬門 刹那 滅却三祇劫
손가락 퉁기는 사이에 팔만법문 원만히 이루고 찰나에 삼아승지겁을 없애버리는도다.

77 一切數句非數句 與吾靈覺何交涉
일체의 수구와 수구 아님이여 나의 신령한 깨침과 무슨 상관 있을 건가.

78 不可毁不可讚 體若虛空勿涯岸
훼방도 할 수 없고 칭찬도 할 수 없음이여 본체는 허공과 같아서 한계가 없도다.

79 不離當處常湛然 則知君不可見
당처를 떠나지 않고 항상 담연하니 찾은 즉 그대를 아나, 볼 수는 없도 다.

80 取不得捨不得 不可得中 只
가질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나니 얻을 수 없는 가운데 이렇게 얻을 뿐이로다.

81 默時說說時默 大施門開無壅塞
말 없을 때 말하고 말할 때 말 없음이여 크게 베푸는 문을 여니 옹색함이 없도다.

82 有人 問我解何宗 報道摩訶般若力
누가 나에게 무슨 종취를 아느냐고 물으면 마하반야의 힘이라고 대답해 주어라.

83 或是或非人不識 逆行順行天莫測
혹은 옳고 혹은 그릇됨을 사람이 알지 못하고 역행. 순행은 하늘도 헤아리지 못하도다.

84 吾早曾經多劫修 不是等閑相
나는 일찍이 많은 劫 지나며 수행하였으니 부질없이 서로 속여 미혹케 함이 아니로다.

85 建法幢立宗旨 明明佛勅曹溪是
법의 깃발을 세우고 종지를 일으킴이여 밝고 밝은 부처님법 조계에서 이었도다.

86 第一迦葉 首傳燈 二十八代 西天記
첫번째로 가섭이 맨 먼저 등불을 전하니 28대는 서천의 기록이로다.

87 法東流入此土 菩提達磨爲初祖
법이 동쪽으로 흘러 이 땅에 들어와서는 보리달마가 첫 조사 되었도다.

88 六代傳衣 天下聞 後人得道何窮數
육대(六代)로 옷 전한 일 천하에 소문났고 뒷사람이 도 얻음을 어찌 다 헤아리랴.

89 眞不立妄本空 有無俱遣不空空
참됨도 서지 못하고 망도 본래 공함이여 있음과 없음을 다 버리니 공하지 않고 공하도다.

90 二十空門 元不著 一性如來體自同
이십공문(二十空門)에 원래 집착하지 않으니 한 성품 여래의 본체와 저절로 같도다.

91 心是根法是塵 兩種 猶如鏡上痕
마음은 뿌리요 법은 티끌이니 둘은 거울 위의 흔적과 같음이라.

92 痕垢盡除光始現 心法雙亡性卽眞
흔적인 때 다하면 빛이 비로소 나타 나고 마음과 법 둘 다 없어지면 성품이 곧 참되도다.

93 嗟末法惡時世 衆生 薄福難調制
말법을 슬퍼하고 시세를 미워하노니 중생의 복 얇아 조복받기 어렵도다.

94 去聖遠兮邪見深 魔强法弱多怨害
성인 가신 지 오래고 사견이 깊어짐이여 마구니는 강하고 법은 약하여 원해(怨害)가 많도다.

95 聞說如來頓敎門 恨不滅除令瓦碎
여래의 돈교문 설교를 듣고서는 부숴 없애버리지 못함을 한탄하는도다.

96 作在心殃在身 不須怨訴更尤人
지음은 마음에 있으나 재앙은 몸으로 받나니 모름지기 사람을 원망하고 허물치 말지어다.

97 欲得不招無間業 莫謗如來正法輪
무간지옥의 업보를 부르지 않으려거든 여래의 바른 법륜을 비방하지 말아라.

98 檀林無雜樹 鬱密深沈師子住
전단향 나무 숲에는 잡나무가 없으니 울창하고 깊숙하여 사자가 머무는도다.

99 境靜林閒獨自遊 走獸飛禽 皆遠去
경계 고요하고 숲 한적하여 홀로 노니니 길짐승과 나는 새가 모두 멀리 달아나도다.

100 師子兒衆隨後 三歲 卽能大哮吼
사자 새끼를 사자 무리가 뒤따름이여 세 살에 곧 크게 소리치는도다.

101 若是野干 逐法王 百年妖怪虛開口
여우가 법왕을 쫓으려 한다면 백년 묵은 요괴가 헛되이 입만 엶이로다.

102 圓頓敎勿人情 有疑不決直須爭
원돈교는 인정이 없나니 의심있어 결정치 못하거든 바로 다툴지어다.

103 不是山僧 逞人我 修行 恐落斷常坑
산승이 인아상을 들어냄이 아니요 수행타가 단(斷). 상(常)의 구덩이에 떨어질까 염려함이로다.

104 非不非是不是 差之毫釐失千里
그름과 그르지 않음과 옳음과 옳지 않음이여 털끝만큼 어긋나도 천리길로 잃으리로다.

105 是卽龍女頓成佛 非卽善星 生陷墜
옳은즉 용녀가 단박에 성불함이요 그른즉 선성(善星)이 산 채로 지옥에 떨어짐이로다.

106 吾早年來積學問 亦曾討疏尋經論
나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쌓아서 일찍 주소를 더듬고 경론을 살폈도다.

107 分別名相 不知休 入海算沙徒自困
이름과 모양 분별함을 쉴 줄 모르고 바다 속 모래 헤아리듯 헛되이 스스로 피곤하였도다.

108 却被如來苦呵責 數他珍寶有何益
문득 여래의 호된 꾸지람을 들었으니 남의 보배 세어서 무슨 이익 있을건가.

109 從來 覺虛行 多年 枉作風塵客
예전엔 비칠거리며 헛된 수행하였음을 깨달으니 여러 해를 잘못 풍진객(風塵客) 노릇 하였도다.

110 種性邪錯知解 不達如來圓頓制
성품에 삿됨을 심고 알음알이 그릇됨이여 여래의 원돈제(圓頓制)를 통달치 못함이로다.

111 二乘 精進勿道心 外道 聰明無智慧
이승은 정진하나 도의 마음이 없고 외도는 총명해도 지혜가 없도다.

112 亦愚癡亦小駭 空拳指上 生實解
우치하고도 겁이 많으니 빈 주먹 손가락 위에 실다운 견해를 내는도다.

113 執指爲月枉施功 根境塵中 虛捏怪
손가락을 달로 집착하여 잘못 공부하니 육근. 육경. 육진 가운데서 헛되이 괴이한 짓 하는도다.

114 不見一法 卽如來 方得名爲觀自在
한 법도 볼 수 없음이 곧 여래니 바야흐로 이름하여 관자재라 하는도다.

115 了卽業障 本來空 未了還須償宿債
마치면 업장이 곧 공함이요 마치지 못하면 도리어 묵은 빚 갚으리로다.

116 飢逢王膳不能飡 病遇醫王爭得差
굶다가 임금 수라 만나도 먹을 수 없으니 병들어 의왕 만난들 어찌 나을 수 있 으랴.

117 在欲行禪知見力 火中生蓮終不壞
욕망 속에서 참선하는 지견의 힘이여 불 속에서 연꽃 피니 끝내 시들지 않는도다.

118 勇施犯重悟無生 早是成佛于今在
용시비구는 중죄 짓고도 남이 없는 법을 깨달으니 벌써 성불하여 지금에 있음이로다.

119 師子吼無畏說 深嗟 頑皮
사자후의 두려움 없는 설법이여 어리석은 완피달을 몸시 슬퍼하는도다.

120 只知犯重障菩提 不見如來開秘訣
중죄 범하면 보리를 막는 줄만 알 뿐 여래께서 비결 열어 두심은 보지 못하도다.

121 有二比丘犯淫殺 波離螢光 增罪結
어떤 두 비구 음행과 살생 저지르니 우바리의 반딧불은 죄의 매듭 더하였고

122 維摩大士頓除疑 還同赫日消霜雪
유마대사 단박에 의심을 없애줌이여 빛나는 해가 서리. 눈 녹임과 같도다.

123 不思議解脫力 妙用恒沙也無極
부사의(不思議)한 해탈의 힘이여 묘한 작용 항하사같아 다함 없도다.

124 四事供養 敢辭勞 萬兩黃金 亦銷得
네 가지 공양을 감히 수고롭다 사양하랴. 만냥(萬兩) 황금이라도 녹일 수 있도다.

125 粉骨碎身未足酬 一句了然超百億
뼈가 가루되고 몸이 부숴져도 다 갚을 수 없나니 한 마디에 요연히 백억 법문을 뛰어 넘도다.

126 法中王最高勝 河沙如來同共證
법 가운데 왕 가장 높고 수승함이여 강 모래같이 많은 여래가 함께 증득하였도다.

127 我今解此如意珠 信受之者皆相應
내 이제 이 여의주를 해설하오니 믿고 받는 이 모두 상응하리도다.

128 了了見無一物 亦無人兮亦無佛
밝고 밝게 보면 한 물건도 없음이여 사람도 없고 부처도 없도다.

129 大千世界 海中 一切聖賢 如電拂
대천세계는 바다 가운데 거품이요 모든 성현은 번갯불 스쳐감과 같도다.

130 假使鐵輪 頂上旋 定慧圓明終不失
무쇠바퀴를 머리 위에서 돌릴지라도 선정과 지혜가 두렷이 밝아 끝내 잃지 않는도다.

131 日可冷月可熱 衆魔不能壞眞說
해는 차게 하고 달은 뜨겁게 할지언정 뭇 마구니가 참된 말씀 부술 수 없도다.

132 象駕觴嶸漫進途 誰見螳螂 能拒轍
코끼리 수레 끌고 위풍당당히 길을 가거니 버마재비 수레길을 막는 걸 누가 보겠는가.

133 大象 不遊於兎徑 大悟 不拘於小節
큰 코끼리는 토끼 길에 노닐지 않고 큰 깨달음은 작은 절개에 구애되지 않나니

134 莫將管見謗蒼蒼 未了吾今爲君決
대통같은 소견으로 창창히 비방하지 말라. 알지 못하기에 내 이제 그대 위해 결단해 주는도다.

 

원문 번역 : 퇴옹성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