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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운 작품/청사홍사

청사홍사 - 풍수 도참의 원조 도선

* <청사홍사>는 1995년에 1년여간 조선일보에 연재한 글이다.

헤아려보니 내 나이 서른아홉살 때인 듯하다.

역사수필과 역사소설의 중간 형태를 취했다.

계속 출간되는 원고이니 퍼나르지는 마시길...

 

청사홍사

- 風水 圖讖의 元祖-道詵 1회

 

전남 광양의 白鷄山(백계산) 玉龍寺(옥룡사).
서기 890년쯤.


이 절에서 35년 동안 제자를 가르쳐 온 고승 道詵(도선) 스님이 首座(수좌) 慶甫(경보)와 속인이자 고향 영암의 후배인 崔知蒙(최지몽) 두 사람을 따로 불러 세상을 논하고 있었다.
“도인이라면 현재만 살아서는 안되지. 과거도 살고 미래도 살아야 하거든.”
옥룡자(玉龍子), 세상에서는 그를 이렇게 불렀다.


옥룡자가 몇 해 동안 애지중지 가르쳐온 제자 경보. 그는 오랫동안 도선이 데리고 지도해온 승려로서 고향 영암에서 발탁해 온 젊은 인재였다. 南朝(남조) 신라 시절이나 고려 시대에는 승려의 신분이 워낙 높아 왕족이나 귀족 출신이 많았고, 그렇지 않은 승려라도 사회적 신분이 매우 높았다. 당시의 승려란, 대체로 그 시대의 문명과 문화를 창조하고 전파하는 엘리트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아시아의 고급 문화는 사찰을 중심으로 들어와 末寺(말사) 조직을 통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말하자면 최신 문화, 첨단 문명은 항상 사찰에서 먼저 유행되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망국 신라의 國師(국사)로, 混世(혼세)를 밝힌 사상의 지도자로, 이 땅에 풍수 도참 사상을 퍼뜨려 천여 년간 신비한 이름으로 전해온 옥룡자, 도선은 누구인가?


속성은 김씨. 신라 왕족이라는 말도 있다. 어쨌든 그는 우리 상고사의 말세 무렵에 태어나 적잖은 혼돈과 변화를 예측하면서 살아야 했다. 신라와 발해가 무너지는 기운을 느꼈고, 새로 발흥하는 고려국을 느꼈다. 그러면서 당나라의 패망과 그 패망 뒤에 이어지는 고원의 돌풍을 보고 있었다. 발해의 멸망으로 이합집산하기 시작하는 고구려의 옛 유민들, 그들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遼-金-元(요금원)의 용트림이 보였던 것이다.
남조 신라 말기에 태어나 국가적 전환기를 살았던 도선은 승려이기 이전에 이 민족의 일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승려의 목표인 成佛(성불)의 길을 버리고 민중 속으로 들어간 지장보살의 길을 갔던 것이다.
*  *  *  *
왕건이 왕위에 즉위하기 10년 전에 세상을 떠난 도선은 불교 승려로서는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던 고승이었으나, 한 인간으로서는 혼탁한 말세를 살다간 불우한 인물이었다.
그로부터 1000여년이 지난 오늘의 시각으로 도선이 처했던 당시 상황을 살펴보자. 어딘가 모르게 1996년에 접어든 현대적 상황과 비슷한 일면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서기 10세기말.
천하 대란이 일어나 중국에서는 당나라가 망하고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가 일어나고, 그 틈바구니에서 송나라가 일어나는 일대 혼란기에 접어들고 있었고, 우리 땅에서는 북으로는 발해가 마지막 숨을 쉬고 있었고, 남조 신라는 바야흐로 후삼국시대를 향하여 서서히 멸망해 가고 있었다.


백제 땅에서 견훤이 일어났고 고구려 땅에서는 궁예가 일어나 미륵을 자처하고 있었다. 궁예가 미륵을 자칭한 것에서 당시 우리 민족이 얼마나 큰 불안에 빠져 있었는지, 그래서 무엇을 원했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즉 당시의 우리 민족은 신라의 멸망 조짐을 보고, 또 발해가 망하고 후삼국시대가 열리는 급박한 동아시아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장차 닥쳐올 대혼란을 예감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시기야말로 말세라고 인식하였으며, 그때가 바로 미륵이 나타나야할 때라고 믿었던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000년 전에 말세라고 믿었던 그 말세는 그로부터 다시 1000년이 지난 오늘날 어쩌면 똑같은 상황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모른다.
북조의 조선은 領主(영주) 김일성이 죽고나서 멸망의 길을 향해 치닫고 있다. 그리고 남조 한국에서는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라는 土豪(토호)가 일어나 일대 결전을 치르고 있잖는가.


“말세로다!”
1000년 전의 우리 조상들은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그 민심을 뚫고 미륵을 자처하는 사람도 나타났고, 새 왕조도 나타났다. 지금 이 순간 우리 주변에서는 때아닌 역술 붐이 일어나고 있으며, 이 시대를 준비한 인물들이 하나둘 그 빛을 더해가고 있다. 백년 전에 이미 正易(정역) 시대의 도래를 외친 김일부, 後天(후천) 시대를 예언한 최제우, 강증산이 있었다.
이처럼 상고시대가 무너지는 절대절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도선은 분명 뭔가를 보았다.
그때 아시아의 엄청난 변화를 읽은 도선은 마침내 佛道(불도)의 길보다는 민족이 가야할 바른 길을 제시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앞으로 말세 1000년이 계속 될 것이다. 그 말세를 준비하려고 나는 대륙과 반도를 두루 돌아다녔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영광된 미래를 위하여 오랫동안 碇泊(정박)할 터를 찾는 일이었다. 중국을 넘나들며 아시아의 모든 문명과 문화, 지리를 두루 살핀 나는 우리 민족을 실은 배가 정박할 곳이 바로 이곳 한반도임을 마침내 확인했다. 명맥이 끊기지 않으며 커다란 환난이 닥치지 않을 땅을 여기서 찾았다.

우리 민족을 태운 배는 이제 여기 단군조선의 옛땅 요동에 닻을 내린다. 요동을 베고 누워 1000년간 잠을 자라. 험난한 난세에 후손들이 무사히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땅이다. 두고 보라! 당나라 땅에서 한족은 다섯 번에 걸쳐 핍박을 받을 것이오(거란족 遼, 여진족 金, 몽골족 元, 여진족 淸, 영국 등 서양 열강과 왜 日本). 우리 민족이 탄 배에도 도적들이 들이닥칠 것이로되 큰 환난은 없을 것이다. 거란이 오되 한때 소란스러워도 화평할 것이며, 여진이 오되 한때 시끄러워도 조용해질 것이며, 몽골이 오되 한때 사나워도 유순해질 것이며, 왜가 오되 한때 포악해도 勞役(노역)하다 갈 것이다. 거란, 여진은 나라가 없어지고 민족이 흩어지며, 몽골은 1000년간 야인 생활을 하게 될 것이며, 왜는 1000년 죽고 죽이는 싸움을 그치지 않다가 마침내 구름폭탄을 맞아 엄청난 재앙을 입으리라.
우리 민족이 자리잡을 이 땅이야말로 가장 안전하고 화평한 땅이다. 그리고 나의 제자들은 그렇게 되도록 이 땅을 지켜야 할 것이다.”
경보와 최지몽은 도선의 秘密藏(비밀장)을 가슴에 받았다.
“소승 경보, 큰스님의 유지를 받들어 모시겠나이다.”
“후학 최지몽, 큰스님의 뜻을 다치지 않겠다고 맹세하겠나이다.”
“좋다. 나는 지리를 익힌 후에 우리 민족을 1000년간 태울 이 배를 샅샅이 살펴보았다. 풍수, 음양, 역술 등의 학문으로 우리 땅에서 나는 물산에 藥性(약성)이 풍부함을 알고 그것이 곧 이 땅 처처가 명당길지임을, 하늘이 내린 터전임을 깨달았다.
艮方(간방:東北 지방)을 머리로 삼았던 連山易(연산역)에 이어 歸藏易(귀장역)-周易(주역)을 거쳐 문명의 중심지가 바뀌어 간다. 그런 끝에 이 민족을 원래의 연산에 귀장시키는 정역 시대가 찾아올 것이다. 그때 다시 간방의 문화를 꽃피울 수 있게 하기 위하여 피난처로 한반도를 설정한 것이다.
두고 보아라! 이 땅에서 나는 인물의 당참을 보고, 이 땅에서 나는 물산이 보배임을 알게 될 것이다!”
도선의 문하를 떠난 두 제자 경보와 최지몽은 궁예의 진영에 있던 장수 왕건을 찾아간다. 도선이 왕건의 출현을 이 두 사람에게 예고하여 이들은 왕건을 찾아간 것이었다.


두 제자가 떠나간 후 오랫동안 침묵 수행을 한 도선은 마지막으로 道詵秘記(도선비기)를 남기고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기 10년 전에 열반하였다. 도선과 마찬가지로 천문, 복서, 지리에 능통했던 崔知蒙(최지몽)과 중 慶甫(경보)는 왕건과 함께 고려 건국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현재는 과거로 미래를 보아야 할 때이다. 도선은 어떻게 해서 이 민족의 미래를 보았으며, 그가 본 미래는 어떠 했는지 살펴보자.

 

청사홍사

- 風水 圖讖의 元祖-道詵 2회

 

도선은 전라도 영암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이 지역이 서울에서 멀고 먼 한 지방으로밖에 보이지 않겠지만, 경주가 서울이던 당시에 이곳은 당나라와 문물을 교류하던 거점 도시였다. 당나라에서 공부하는 留學生, 留學僧들이 이곳을 통하여 드나든 까닭에 선진 문물에 일찍 눈을 뜰 수 있었고, 국내 정치 변화를 민감하게 느낄 수 있던 정치, 문화 도시였던 것이다.


게다가 도선은 열다섯 살이 되어 月遊山(월유산) 華嚴寺(화엄사)에 출가했다. 이 또한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누가 입산하여 중이 된다는 게 결코 주목받을 일이 못 되겠지만, 이 당시 승려가 누렸던 지위나 백성들의 믿음은 엄청나게 높았다. 또한 절 자체도 고즈넉하고 쓸쓸한 곳이 아니라 신문물이 소용돌이치고 신학문과 신사상이 태동되고 퍼져나가는 학술, 문화의 중심지였다.
그 무렵 불교계에 엄청난 변화가 몰아닥쳤다. 敎宗(교종) 중심으로 수백년간 크게 발달해 오던 신라 불교가 禪宗(선종) 위주로 전환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변화에 힘입어 도선은 선종으로 바꾸고, 당시 당나라에서 아주 유명하던 馬祖(마조:불교계에서는 굉장히 유명한 선사이다.) 선사의 법통을 이은 西堂智藏(서당지장)의 心印(심인)을 받고 돌아온 惠哲(혜철) 선사의 문하로 들어갔다.


九山禪門(구산선문)이 날로 번창하던 무렵, 고향 영암에서 멀지 않은 곡성의 桐裏山(동리산) 선문으로 옮긴 도선은 스무살부터 스물세 살까지 4년간 용맹 정진한 끝에 석가모니가 깨달았다는 비밀한 道(도)를 어느 정도 깨달았다.
846년(문성왕 8년).
동리산의 惠徹(혜철)이 이런 설법을 했다.
“無說한 說, 無法한 法. 끝.”
그러고는 설법을 마쳤다.
교리로는 해석되지 않는 이 말을 들은 도선은 단박에 깨우쳐 그 뜻을 알아차렸다. 나이 스물일 때였다. 당장에 혜철의 심사를 거쳐 깨달음을 인정받고 물러나왔다.
그뒤, 지리산으로 들어가서 손수 초막을 짓고 깨달음의 세계를 갈고닦았다. 깨달음을 갈고닦는 걸 保任(보림)이라고 하는데, 도선은 이때 산과 구름과 새를 벗삼아 억겁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무상 진리를 맛보고 냄새맡고 데 푹 빠져 있었다.


이때 또한 도선이 오늘날 우리나라 풍수 도참 사상의 원조로 불리게 되는 인연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 유행하던 선종에서는 일정한 깨달음을 얻은 뒤에는 전국의 가람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고승대덕들과 선문답을 나누고 그 깨달음을 더욱 갈고닦는 수행법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다 보니 도선 역시 신라 곳곳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지금의 요동 지역까지도 두루 踏山(답산)했다. 여기에서 우리나라 선사들이 자연스럽게 풍수지리에 접근하는 환경이 조성되었고, 바로 이 선사들을 통하여 우리나라 풍수지리가 발달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선사들 사이에 은근히 퍼져나간 풍수지리는, 마침 신라가 망국 조짐을 보이면서 슬슬 일어나기 시작한 지방 토호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정치 이념이 될 수 있었다. 九山禪門(구산선문)이 설치된 산만 보더라도 결코 신라에서 정한 명산은 없었다. 그것은 새로운 풍수지리 개념에 따라 명당을 새로 개발했다는 뜻이 되고, 곧 누구나 명당을 개발해 쓰면 地德(지덕)을 누릴 수 있다는 사상이 은근히 계급 타파 의식과 함께 민간에 고조되었던 것이다.
이런 배경을 두고 도선은 깨달음 이전의 세계를 보고 있었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이 한 명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 마지막 한 사람이 천국에 들 때까지 부처가 되지 않겠노라고 서약한 지장보살의 心法(심법)에 통하는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그네 한 사람이 먼 데서 지리산 암자로 도선을 찾아왔다.
“靑眼(청안) 衲子(납자)여!
그대에게 중생 구제의 큰뜻이 섰다면 먼저 우리 민족을 구하라!“
도선이 보아 하니 그 나그네는 風流(풍류)를 닦은 仙人(선인)이 틀림없었다.
“어찌 우리 민족만을 구하라고 하십니까? 인간을 다 구한다 해도 중생을 구제하는 것에 비하면 하찮은 일인데, 저더러 어찌 이 나라 이 민족만을 지키라고 합니까? 그것은 非法(비법)입니다.”
“앞으로 천년 뒤에 우리 민족의 대발흥기인 후천 시대가 시작된다는 걸 아는가?”
“그 정도 셈은 놓습니다. 우리 민족이 상고시대를 연 동북 艮方(간방)을 머리로 잡았던 게 連山易(연산역)이지요. 그후 천지 음양의 도수(地軸 변화에 의한 지구 환경 파괴. 빙하기, 대홍수 등을 일으킴.)가 바뀌면서 귀장역, 주역으로 변하여 이제 선천 말세에 들었습니다. 그 선천 시대, 지금은 혹한에 휩싸인 동북 간방에 歸藏(귀장)하여 바른 역(정역)이 나타난다는 후천 개벽 이야기쯤은 삼척동자도 다 알지요..”
“그러면 이제 선천 말세 천년이 시작된다는 것도 알고 있는가?”
“재미삼아 上元(상원) 甲子(갑자)를 놓아 본 적이 있습니다. 동지 시각이 갑자시가 되고, 그 날이 갑자일이며, 그 달이 갑자월이며, 그 해가 갑자년인 해로부터 따져 보니, 이제 선천 세수가 천년이 남은 걸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불법에서도 말법 시대를 예고했듯 선천 말세가 어지러우리라는 건 알겠지?”
“아직 미래까지 짚어보지는 않았습니다.”
“그건 내가 알려주지.”
“앞으로 몇백 년 내에 이 민족은 몽골이라는 나라에 의해 완전히 말살되지.”
“예?”
“그러니 자네가 예방을 해야지. 그걸 예방하고 나면 이번에는 일본이 일어나 또 한 번 결딴 내지. 그때 여지없이 무너지지.”
“후천 개벽 시대까지 살아남기도 어렵군요.”
“그래. 그걸 자네가 예방해도 곧 발해국의 후신인 청이라는 나라에 의해 초토화되지.”
“끝이 없군요.”
“거기서도 용케 벗어나도 이번에는 또 일본이 다 씹어먹으려 대들거야.”
“힘이 빠집니다.”
“그 사이 후천 개벽을 알리는 바른 역이 이 민족의 손에 의해 나타나지만 그러고도 세상에서 가장 힘센 나라 둘이 나타나 이 민족을 반씩 갈라먹을거야. 거기서 빠져나오는 게 이 민족이 겪는 마지막 시련이야. 자네가 이 모든 환난을 막아야 하네.”
“왜 저한테 그런 짐을 지우시지요?”
“자네만이 이 민족을 후천 개벽 시대까지 잘 이끌고 갈 船長(선장)을 찾을 수 있고, 또한 航海士(항해사)가 될 수 있으니까.
환난 시대에는 씨주머니를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깨지고 다치고 부러지고 썩고 무너지고 삭아문드러져도 그 씨앗만 지키면 어떠한 환난에도 무사할 수 있다네. 이 민족을 모두 안전한 배에 태워서 후천 시대를 도모하게.”
“선인이시여, 이 민족을 다 태울 배가 어디 있습니까?”
도선은 그 선인이 우스운 말을 하는 山客(산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대가 배를 지어야지.”
“저는 조그만 고기잡이 배 한 척도 지어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어찌 수백 만 生靈(생령)을 태울 수 있는 큰 배를 지으란 말씀이십니까? 저를 그만 놀리시고 차나 한 잔 잡숫고 가십시오.”
선인은 도선이 내놓는 차를 한 잔 마시고는 일어섰다.
“내게 작은 술법이 하나 있는데 그대에게 줄 생각이네. 생각이 있으면 내일 남해 바닷가로 나오게.”

 

청사홍사

- 風水 圖讖의 元祖-道詵 3회

 

이튿날까지 도선은 꼬박 참선과 기도로 선인의 말을 생각했다. 그래서 이튿날 약속 장소에 나가 보니 과연 그 선인이 나타났다. 그 장소는 지금의 구례군 화엄사 사도촌이라고 알려져 있다.
선인은 바닷가의 모래 사장에 산과 들을 만들어 놓고 順(순)하고 逆(역)한 산수지리를 가르쳐 주었다. 종이가 귀하던 이 당시, 모래밭은 훌륭한 노트였다. 이 모래밭을 沙圖(사도)라고 하는데, 모래밭에서 풍수지리의 비밀한 법을 주고받는 방식은 오래도록 이어졌다.
“이 배가 천년 항해에 견디려면 지을 때 튼튼히 지어야지.”
선인은 신라와 발해의 지도를 그려놓고 도선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배라는 것은 곧 한반도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도선은 선인의 말귀를 알아들었다.


“천년 항해가 끝나는 후천 개벽 시대가 되거든 故土(고토)에 下船(하선)시키게.”
“저는 죽고 없을 텐데요. 누가 배를 이끌지요?”
“아, 천년 후에 날 씨라고 못 뿌릴까? 導船師(도선사)가 날 자리를 미리 점지해 놓으면 되지. 그건 좀 어려운 일이니 내가 직접 함세.”
선인은 그러고도 여기저기 지세와 지형을 보이면서 넘치고 부족한 것을 가르쳐 주었다.
“넘치고 부족한 것에는 단단히 못질하고 땜질을 해야 하네. 그걸 裨補(비보)라고 하네만, 이 땅에 뜸 뜨고 침 놓아 튼튼하게 고쳐야 하네.”
“비보를 어떻게 하지요?”
“자네는 불도를 닦는 수좌이니 혈처마다 못질하듯이 탑과 절을 세우게.”
도선에게 지리 비결을 전해 주었다는 이 산객은 분명 신라인이었다. 그러므로 산의 형세를 주로 보는 중국식만이 아니라 방위 중심의 우리나라 전통 풍수지리를 두루 배울 수 있었을 것이며, 따라서 자생 풍수지리학이 도선에 이르러 활짝 꽃핀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뒤 도선은 고향 땅으로 돌아가 오래된 옛절 玉龍寺(옥룡사)를 고쳐 그곳에 눌러앉기로 했다. 이때 도선의 나이 서른일곱. 그러니까 그때까지 踏山(답산)만 15년을 했던 것이다.
도선은 옥룡사에서 제자들을 모아 가르쳤는데, 모여든 전국의 수재들이 수백 명이나 되었다. 당시 九山禪門(구산선문)에서 수도하던 선사들의 숫자를 보면 많게는 2천명까지 있었고, 대개 천명 안팎의 수좌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땅이 아프다.”
도선이 이렇게 말할 때 옥룡사 수좌들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땅이 몹시 아프구나.”
禪問答(선문답) 같은 이 말을 중얼거리며 천문을 우러르고 지리를 살필 때 사람들은 도선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했다. 이따금 법문 중에 그의 심중을 조금씩 밝혔지만 알아듣는 제자가 없었고, 나중에 천하 주유가 잦아지자 그 연유를 묻는 승도들에게 도선은 이렇게 말했다.
“백성들의 인심이 사납고 안팎으로 환난이 끊이지 않는 것은 산천의 지형과 지세 때문이다. 그러니 병을 치료할 때 뜸을 뜨는 것처럼, 산천이 험하고 거친 곳에 寺塔(사탑)을 약쑥으로 삼아 뜸을 떠 길들이면 국난도 치유할 수 있는 것이야.”
도선의 지혜가 출중하여 온 나라 안에 그의 도력이 알려지자 당시 신라 국왕이었던 헌강왕이 초청장을 보내왔다.


“만나서 세상 이야기나 좀 나눕시다.”
헌강왕은 앞서 도선의 스승인 혜철과도 정치 문제로 대화를 나눈 바가 있었다. 헌강왕이 물을 것은 뻔했다.
나라가 오래 되다 보니 부정부패가 좀 심해졌다, 기강이 좀 문란해졌다, 귀족들이 너무 커서 통제가 잘 안된다. 무슨 수 없겠느냐, 요점은 그랬다.
“그래서 개혁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소?”
도선은 말로는 참 유익하고 진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듣는 헌강왕은 어떻게 하면 聖骨(성골) 眞骨(진골)하는 귀족들을 누르고 왕권을 확립하느냐 하는 데에만 골몰하고 있었다.
“우리 불교계가 교종에서 선종으로 엄청난 자기 변화를 꾀했지요. 그러니 자기 개혁을 한 불교는 앞으로도 5백년 쯤은 이대로 갈만한 밑천을 마련한 셈이라고나 할까요? 그런데 정치는 어떻게 변할 거지요?”
“아, 난 변화니 개혁이니 실상 그런 말보다는 어떻게 하면 왕권을 강하게 틀어쥐고, 요놈들 하면서 떵떵거리느냐 이거요? 눈밝은 선사가 한 수 가르쳐 주시구려. 사실 말이지, 이 놈의 귀족들 때문에 아무 것도 못해먹겠다니깐. 이 놈들은 넓은 땅에 수많은 백성들을 차지하고 앉아서 세금 한 푼 안내고, 손에 흙 한 번 만지지 않으면서 이래라, 저래라 큰소리만 쳐. 신라면 신라지 여기는 이 놈, 저기는 저 놈 하고 갈라먹고 있으니 내 말이 씨가 먹히겠소?”
“대왕께서는 뭘 좀 모르시는군요. 남을 개혁하려고만 들지말고 자기 자신을 개혁할 생각은 왜 안하는 거지요? 나를 개혁하면 세상이 개혁되는 것, 내가 깨달으면 세상이 다 깨닫는 거라고 부처님이 말씀하셨소이다.”
“그거 말은 좋지만 내가 어떻게 나를 개혁합니까? 그랬다가는 저 놈들이 당장 달려들어 내 자리를 뺏으려들 텐데?”
“그것 참, 이래가지고는 數(수)가 나오지 않겠군요.”


헌강왕과 도선은 비록 화기애애하게 대화는 나누었지만 소득이라곤 피차 밥 한 끼 먹은 것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도선이 신라 국왕을 만나고 성문을 나서자 세력을 더 키우려고 안달하던 서울(이때는 서울이라고 하면 서라벌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귀족들이 몰려와서 한 말씀 나누자고 떼를 썼다.
갈 길도 멀어 이 귀족들을 따라 며칠 쉬면서 서울의 정치판을 들여다 보았다. 도선은 이때 결론을 보았다.
“판을 새로 짜야겠군.”
무서운 생각이었다. 어딜 좀 고치고 바꾸고 하는 개혁이 아니라, 숫제 판을 들어엎고 새 판을 짜겠다는 도선의 속셈은 당시 정치인들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경지였다.
옥룡사로 돌아간 도선은 그 뒤 스스로 이 땅을 직접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도선은 요동땅에 건너가 보기도 하고, 발해의 각지를 다니며 지세를 살피는 등 우리 땅을 두루 답사했다. 땅을 진단하기 위함이었다.
“배 한 척 크게 지어 이 백성들을 태워야 한다. 천년 항해에도 난파되지 않는 튼튼한 배를 지어야 한다.”
도선은 우리 민족이 앞으로 겪게 될 1천년 역사를 미리 깨닫고 배를 띄울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도선式(식) 노아의 방주였다.


도선은 땅에 뜸을 뜨고 침을 놓으면서 전국을 돌아다녔다. 침을 놓는다는 것은 탑을 쌓는 것이고, 뜸을 뜬다는 것은 절을 짓는 것이었다. 그런데 도선이 탑을 쌓고 절을 짓는 자리란 대부분 명당이 아니었다. 도적이 쳐들어올만한 입구에 절을 하나 지어놓고, 위험하다 싶으면 파수 놓듯이 절 한 채 지어놓고, 그리고 환난이 보인다 싶으면 탑을 하나씩 지어놓고 다녔다.
“이제 배를 수리했으니 이 배를 끌고 갈 船長(선장)을 만들어야지.”
도선은 백두산에 올라가 배의 돛대를 보고 선장이 앉을 자리인 松嶽(송악)으로 들어갔다. 그 터에서 미래의 선장이 태어날 자리를 닦아보자는 거였다.
도선은 거기서 作帝建(작제건)의 아들 龍建(용건)과 그의 부인 韓(한) 씨를 만났다. 그 집을 보니 선장이 날 혈처에서 약간 비꼈다.
“기장을 심을 자리에 삼을 심으셨구먼.”
기장은 穄(제)로 도선은 곧 帝를 비유한 것이었다. 제왕이 날 자리는 비켜두고 왜 작은 인물이 날 자리에 굳이 집을 지었느냐는 뜻이었다.


용건은 도선 스님의 풍모를 보고는 바짝 달라붙어 한 자리 잡아달라고 부탁하였다. 두 사람은 곡령으로 올라가서 山水(산수), 天文(천문), 時運(시운) 세 가지를 살핀 다음에 용건의 새 집터를 골랐다.
“이 땅의 지맥은 壬方(북방)에 있는 백두산 水母(수모) 木幹(목간)으로부터 뻗어내려와 馬頭(마두) 명당에 떨어졌습니다. 용건 처사는 水命(수명)을 타고났으니 大數(대수)를 쫓아서 육육은 삼십육, 즉 36區의 집을 지으면 천지 대수에 부합하여 명년에는 슬기로운 아들을 낳게 될 것입니다. 그 아들 이름은 꼭 王建(왕건)이라고 하십시오.”
“임금 왕, 세울 건? 왕을 세우다? 아이쿠, 이런. 이러다가 반역자로 잡혀죽는 거 아니우?”
“아명은 적당히 지어 쓰시고 이 이름은 가슴 속에만 담아두고 있으시오. 때가 되면 쓸 날이 있으리다.”

 

청사홍사

- 風水 圖讖의 元祖-道詵 4회

 

도선은 이 민족을 처음으로 태우고 천년 항해를 떠날 사람이 날 자리를 잡은 다음, 그 사람의 이름까지 지어 주었다. 용건은 백번 절하여 고마움을 표시했지만 도선은 도리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왕건을 위해 즉석에서 편지를 쓰고 삼배를 올렸다.
“삼가 글을 지어 세 번 절하면서, 이 민족을 이끌어갈 미래의 大原君子(대원군자)에게 바칩니다.”
편지는 왕건이 장차 후삼국을 통일하여 고려국을 세울 왕이 될 것임을 예고하고, 일찍부터 그 마음을 닦을 것을 권하는 내용이었다.
“스님, 그러면 우리 부부 合房日(합방일)도 좀 잡아 주십시오. 기왕이면 시각과 자리까지 잡아주면 더 좋구요.”
도선은 허허 웃고는 정성껏 그 이치를 일러주었다.
서기 876년, 신라 헌강왕 2년, 발해 경왕 7년으로서 단기는 3209년의 일이었다.
*  *  *  *  *
여기는 다시 전남 白鷄山 玉龍寺.


그동안 천년 항해를 떠날 배를 수리하고 난 도선은 그 첫 항해에서 닻을 올리게 될 선장이 태어날 씨앗을 뿌렸고, 그 뒤 옥룡사로 돌아와서는 그 선장을 도울 사람 두 명을 찾았다. 하나는 옥룡사의 젊은 승려 慶甫(경보)였고, 또 하나는 고향 영광에서 찾아낸 인물 崔知蒙(최지몽)이다.


도선이 기다리는 송악의 선장 왕건을 위한 것이었다.
“내가 송악에 한 인물의 씨를 심었다. 그 아이가 태어나면 三韓(삼한:당시 우리나라 전체를 통틀어 부르던 말)을 통일할 것이다. 그 아이가 세상을 호령하는 모습을 나는 너무 늙어 직접 볼 수가 없다. 그래서 너희 두 사람으로 하여금 왕건을 도와 첫 항해를 무사히 하도록 하고자 한다. 그러한 즉 내 말을 명심해 듣고 훗날 왕건을 도와 주기 바란다.”
도선의 고향 후배인 崔知蒙(최지몽)과 고향 후배이면서 제자였던 慶甫(경보)라는 중. 이 두 사람은 나중에 왕건에게 발탁이 되어 고려 건국의 기틀을 다질 인물들이었다. 두 사람은 도선과 마찬가지로 천문, 복서, 지리에 능통할 때까지 공부를 했다.
“스님, 신라가 멀쩡한데 왜 망한다고 그러세요? 그러다가 붙잡혀가 경을 치려구요?”
“禪門(선문)을 차릴 정도면 그 정도 미래는 보아야지. 내 눈에 그렇게 보인다.”
“스님, 도대체 당나라도 막강하잖아요? 새나라를 건국해봤자지요. 漢唐(한당) 두 나라가 대륙에 선 이래 우리 신라는 변방 국가로 전락하였잖습니까?”
“두고 보면 알겠지만 당나라는 앞으로 주인과 객이 반반 바뀔 것이다. 즉 삼국지로 요란한 漢 이후를 통일한 북위와 그 북위를 이은 수나라가 우리와 동족인 선비족이요, 지금 북쪽 발해 근방에 일어나고 있는 요나 말갈, 몽골이 모두 우리 민족이다.


하은주의 역사는 결코 당나라의 것이 아니다. 문자도 漢族들이 갖다가 漢字라고 이름붙였을 뿐 결코 그네들만의 고유 문자가 아니다. 사상 철학도 그렇다.
당나라의 시작은 진나라이고, 나라의 체통을 마련한 것은 한나라 때부터이다.
그들이 자랑하는 한나라도 흉노라고 불리던 北夷(북이)에게 초토화되었다. 그 전쟁에서 북이는 “풀도 못 심을 쓰레기같은 땅”이라고 하면서 자진해 물러갔다. 대신 한 왕실은 공주를 바치고 조공을 하는 군신 관계를 맺었지.


그 다음 한족이 찢긴 다음에 일어난 한족의 국가가 지금의 당나라이다. 당나라도 고구려에 질질 매다가 우리 신라와 연합하여 겨우 고구려를 멸망시켰으나 고구려는 곧바로 발해를 건국했다. 고 씨 왕조가 대 씨 왕조로 바뀌었을 뿐 강역이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도 당나라는 역시 강하지 않습니까?”
“중국은 한 번도 동이를 이기지 못했다.
진나라의 만리장성이 누구 때문에 세운 것인지 알아야 한다. 그 뒤 한나라가 조선을 멸망시켰다는 기록이 있으나 부여나 고구려의 강역이 이미 전날의 조선 강역을 넘어섬으로써 한나라 대 조선의 전쟁이 무의미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 태종이 이끄는 수십만의 군대가 안시성 등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끝내 실패하였다. 나중에 신라와 협공하여 백제를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멸망시켰으나 백제는 일본으로 떠나가고, 고구려는 그 자리에 고구려 강역 그대로 발해를 세워 200년간이나 존속하였다.”
“그런데도 당나라에서는 우리 신라를 변방 국가로 얕보잖습니까?”
“중토에 기록된 이족의 역사만을 보자.
하은주 이 세 나라는 조선의 변방 국가였으나 나중 사마천 사기에서 중국의 역사로 편입되었다. 춘추전국시대에는 비로소 이족의 활동으로 중토에 역사가 서기 시작했다.
북위 등 북방 이족은 진을 멸망시키고 생겨난 선비족의 국가로 나중에 수나라를 건국했어. 이 수나라가 고구려를 300만대군으로 침략했으나 패퇴하여 그때문에 결국 망하기까지 했잖으냐.”
“역사까지 빼앗아 간 한족이 다른 것인들 그냥 두었겠습니까?”
“물론이다. 역학, 풍수, 의학, 천문 등을 마치 한족이 다 발명한 것처럼 꾸미고 있다. 세계 최초의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이 천문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고구려 땅에서 그린 것임을 알 수 있고, 또한 고구려의 강역을 볼 수 있다. 이 천문도를 작성한 위치가 있을 게 아니냐?
팔괘를 그은 복희와 문왕, 의학을 연 신농, 황제에게 경전을 주어 중토에 도교를 전한 자부선인, 유교를 연 이족 성인 공자, 은대의  문자, 그리고 그 이전 900년 앞선 용산문화 유적의 문자는 무얼 말하느냐?”
“그러고 보면 우리 신라 사람들은 한족에 대해 지나치게 우호적인 것 같습니다. 일본에 대해서는 사사건건 시비를 걸지만 당나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안하거든요.”
“우리는 일본이 자주성이 없다고 하지만 사실 한족이야말로 자주성이란 일점도 없는 민족이다.
내 것이 없이 동이족 걸 훔쳐갔기 때문에 아무도 믿지 않는다. 한국 같으면 말 한 마디로 서로 계약이 되지만, 중국인들은 끊임없이 탐색하고 궁리한 다음에 계약한다. 한국인들은 내일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지만 중국인들은 땅속에다 돈을 묻어 둔다. 내일이 걱정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우리의 역사를 다 훔쳐가지고 있다. 우리 조상을 그들의 조상이라고 우긴다. 중국 땅에서 일어난 모든 역사는 곧 중국사라는 거야. 이같은 이치로 우리 사상을 그들의 사상이라고 우긴단 말이야.”
“반환 소송을 해서라도 찾아오지요.”
“그렇게 할 것까지는 없다. 우리 것이 좋으니까 그들이 쓰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선천 말세에는 그보다 더 신경 쓸 일이 많아진다.”
“당나라 되놈들을 어떻게 한다지요?”
“첫째는 턱없이 중국을 미화하지 말자. 달에서 보이는 유일한 건축물이 만리장성이라는 말도 하지 말라. 보이기로 말하면 백두대간의 선명한 등뼈가 더 잘 보일 것이다.
만리장성도 그렇지 다 무너지고 헐어서 형체도 잘 알아볼 수 없는 곳이 많고, 그나마 끊어진 곳도 많다. 폭조차 시골 동네 마차길 만하다.
더군다나 중국 역사가 비로소 시작되는 진나라가 죽을 힘을 다하여 쌓은 이 만리장성, 왜 쌓았겠느냐? 바로 장성밖에 그만한 힘을 지닌 어떤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조선이다. 만리장성은 당시 한족과 이족의 국경선일 뿐이다.
어차피 夷민족의 혈통은 한국에 와 있다. 고구려의 후예인 몽골과 발해의 후예인 여진족(만족)의 역사는 우리 역사로 편입시켜야 한다. 마땅히 연대적으로 조선과 신라 사이에 존재했던 하은주, 위, 수 등의 역사를 신라사로 포함시켜야 한단 말이다.”
“그러고 나면 우리나라의 뼈대를 제대로 찾는 셈이군요?”
“그렇지. 서두르지는 마라. 어차피 후천의 하늘이 열리면 저절로 알게 되리라.”
도선은 수백 명 제자들에게 늘 이런 식으로 법문을 했다. 그러면 그중에서도 수제자 경보는 拈花微笑(염화미소)로 그 속뜻을 알아차렸다. 그러고 나면 속인 최지몽에게도 以心傳心(이심전심)으로 이 뜻이 전달되었다.

 

청사홍사

- 風水 圖讖의 元祖-道詵 5회

 

서기 894년.
도선은 마지막으로 열일곱 살난 왕건을 찾아가 직접 만났다. 예전에 자리잡아 주었던 집터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장성해 있는 船長(선장) 감을 찾는 일은 더더욱 쉬웠다.
“할아버님 존함이 뭐냐?”
“作帝建(작제건)입니다.”
“아버님은 용건(龍建)입니다.”
“끝자가 다 建(건)이구나. 네 성이 뭐냐? 작 씨냐?”
“아닙니다. 王氏(왕씨:왕이 될 씨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집안에 있던 용건이 왕씨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라서 뛰어나왔다.
“이 녀석아, 왕 씨라니 애비 죽이려고 환장을 했구나. 네 놈 성은 작 씨야!”
그러자 도선은 18년 전에 보았던 용건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
“두시오. 이 아이의 성은 왕 씨가 맞소이다. 나 모르겠소?”
그제서야 용건은 그가 도선인 줄 알아차리고 한숨 놓았다.


“이제부터 당신도 왕 씨로 성을 바꾸시오.”
“자식 성따라 애비 성 바꾸는 건 우리밖에 없을 듯하오.”
“왕건의 목숨을 지키고 왕건이 해야 할 일을 무사히 마치기 위해서는 하는 수 없소. 당신은 이제 王隆(왕륭)이라고 합시다. 그러고 나면 왕건이라고 불러도 성이 그러려니 하고 의심하지 않을 것이오.”
(고려사에서도 왕건의 성씨 문제에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왕건, 그대는 이 혼란한 때에 태어났으니 이 시대에 감응해야 한다. 사나이란 모름지기 그 시대가 필요하여 부른 것, 시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깨달아야 할 것이다. 하늘이 정한 터를 빌어 태어났으니 선천 말세의 蒼生(창생)들을 구제해야만 할 것이다.”
왕건은 도선이 말하고자 하는 뜻을 알아들었다.


“그대가 세운 나라에서는 함부로 땅을 파서 인간 쓰레기를 묻는 일이 없도록 엄히 다스려야 할 것이다. 돈 좀 있다고, 권세 좀 있다고 여기저기 명당길지의 혈을 파헤쳐 놓고 도둑놈, 역적, 졸부, 살인자 등을 자꾸 묻어두면 이 나라의 국기가 흐려져서 장차 큰 환난을 부를 것이다. 덕 있고, 공덕 있는 자를 묻는 데도 땅을 가려써야 하거늘 함부로 여기저기 파헤치면 필시 재앙을 입을 것이니 명심하라.”
도선은 본론으로 들어가 첫째 사람을 부리는 법을 가르쳤다. 아마도 여기에서는 命理(명리)를 가르쳤을 성싶다. 둘째, 陣法(진법)을 놓는 奇門遁甲(기문둔갑)을 가르쳤다. 기문둔갑은 蚩尤天皇(치우천황)과 黃帝(황제)간에 벌어졌던 탁록대전(?鹿大戰)에서 황제가 神人(신인)으로부터 얻은 부적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 부적에서 1800가지의 陣法(진법)이 개발되었던 것이다. 이것을 후에 유방을 도와 한왕실을 창업한 張良(역학자들은 흔히 張子房이라고 부른다. 조선 세조 시절의 한명회가 이 장자방을 흉내내었다.)이 72국으로 줄였고, 제갈공명은 18국으로 줄였다. 따라서 열여덟 가지 진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전투에 임하면 승리할 수 있다는 병법의 비결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셋째, 전투에 유리한 지형을 찾아내는 법을 가르쳤다. 개성 출신의 화담 서경덕이 조선식 기문둔갑을 지은 책이 洪煙眞訣(홍연진결)인데 이로 미루어 보아 우리나라에서도 일찍부터 이 진법이 이용된 듯하다. 넷째, 적당한 시기를 선택하는 天時法(천시법)을 가르쳤다. 이것은 天文(천문)을 가르쳤다는 뜻이다. 천문을 보아 택일을 하는 것으로, 전투할 날짜나 시각을 정하는 술법이다. 천시법을 잘 쓴 사람으로는 임진왜란 때의 이순신 제독이 유명하다. 이순신 제독은 출전에 앞서 반드시 택일을 하였고, 점을 쳤다고 한다. 다섯째, 感通保佑(감통보우)의 비밀법을 가르쳐 초인간적인 힘을 이용하는 術(술)을 전수시켰다. 이 부분은 구체적으로 알 수 없는 부분이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스님.”
“내가 곧 두 사람을 보낼 터이니 그들에게 묻고 행하라. 천문, 지리, 병법에 능통한 사람들이다. 이 민족을 잘 이끌어가기 바란다.”
도선은 왕건에게 경보와 최지몽을 미리 천거해 두었다.
“그리고 너는 나중에 후삼국 시대가 되어 각각 패권을 다툴 때라도 반드시 그들을 품안에 끌어들이도록 해라. 그래야만 이 나라 백성들이 다투지 않는다. 아무리 대권을 잡는다지만 민족을 갈라놓으면 천고의 역적이 되느니라.”
(왕건은 나중에 후백제의 왕 견훤과 신라의 경순왕으로부터 각각 항복을 받아 건국에 동참하도록 벼슬을 준다.)


“새 나라가 일어설 때는 그 시대의 生氣(생기)를 끌어들여야 한다. 신라가 敎佛敎(교불교)로 정치 이념을 삼았다면 장차 그대는 禪佛敎(선불교)를 내세워야 할 것이다. 한 시대를 도모하는 자는 항상 그 시대의 생기가 자신의 편이 되도록 힘써야 한다.”
도선은 왕건에게 고려국을 세우라는 밀지를 남기고 옥룡사로 돌아가 <도선비기>라는 책을 썼다. 그리고 왕건의 뒤를 이을 후세 선장이 태어날 자리를 예언했다. 국난에서 나라를 구해낼 영웅들을 기를 혈처, 그리고 그 영웅들을 도울 인재를 생산해 낼 자리를 기록한 것이다.
“因(인)이 있어 맺은 緣(연), 그 인연이 다 하였으므로 나는 간다.”
말년에 오랫동안 침묵 수행을 한 도선은 마침내 <道詵秘記>를 남기고 죽었다.
신라 효공왕 2년인 898년.
효공왕은 도선에게 ‘공을 깨우친 분’이라는 뜻으로 了空(요공)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옥룡사 선문은 수제자 경보가 맡았다. 경보는 도선의 유지를 받들어 옥룡사 선문을 더욱 중흥시키다가 나중에 왕건을 돕기 위해 송악으로 갔다. 최지몽은 그에 앞서 왕건의 최측근으로 들어가 고려 건국에 참여했다.
지는 가운데 뜨는 것이 있고, 무너지는 가운데 솟아나는 것이 있다.

 

청사홍사

- 風水 圖讖의 元祖-道詵 6회

 

왕건이 얼마나 도선을 믿었느냐 하면, 그의 후손들에게 비밀리에 내린 訓要十條(훈요십조) 제2항에 ‘여기 새로 지은 절은 모두 도선의 산수지리의 순조로움과 거슬림을 점쳐서 개창했다. 도선은 ’내가 정한 곳 외의 땅을 함부로 파서 절을 지으면 地德(지덕)을 손상시켜 왕조가 오래가지 못한다’고 하였다. 후세의 국왕은 절대로 마음대로 절을 짓지 말라. 신라 말엽에 사탑을 함부로 지어 지덕을 손상시켰으므로 마침내 신라는 망했다. 경계해야 한다.’라고 했다.


또한 왕건이 도선의 心法(심법)을 받아 실천하려고 한 흔적이 이 훈요십조에 잘 나타나 있다.
첫째, 佛道(불도)를 닦음으로써 자기 직책을 다하라.
셋째, 왕위를 큰아들에게만 계승시키지 말고 가장 똑똑한 아들을 찾아 정통을 잇게 하라.
넷째, 중국과 우리는 사람이 다르고 지리가 다르니 억지로 맞추려 애쓰지 말고 독창적으로 풍속을 밝혀라.
다섯째, 국왕은 춘하추동의 중간달을 골라 1년에 100일 이상 西京(평양)에 머물러 그곳 水德(수덕)을 입어야 한다.
여덟째, 공주강(금강) 이남은 산형과 지세가 반대 방향으로 뻗어 있으며 백제를 통합한 한이 크니 비록 양민이라도 관직을 주어 정치에 참여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라.
열째, 역사 서적을 널리 읽어 옛일을 교훈으로 삼아라.
*  *  *  *  *
왕건은 신라, 발해를 잇는 통일 민족국가 고려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도선을 유용하게 이용했다. 왕건 입장에서 보자면, 도선은 매우 요긴한 몇 가지 정치 논리를 제공한 것이다.
첫째, 왕건만이 새 나라를 창업할 만한 큰 인물이라는 점을 도선을 통해 확인했다.
둘째, 신라의 서울 서라벌을 중심으포 판이 짜여져 있던 정치, 사회, 문화, 경제의 구조를,  개성 중심으로 바꾸기 위해서 도선의 풍수지리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즉 과거의 명당인 신라의 고도 경주를 地氣(지기)가 쇠한 쓸모없는 땅으로 규정하고 生氣福德(생기복덕)하는 새로운 명당 길지인 송악이야말로 천하에서 가장 좋은 서울의 터임을 홍보했다.
셋째, 당시의 지식인 그룹이자 오피니언 리더였던 구산선문의 禪師(선사)들을 創業(창업)에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 당시 선종의 대표급 지도자였던 도선을 적극적으로 받들었던 것이다.
이래저래 왕건은 도선의 제자들까지 받아들이고, 도선이 떠나간 뒤 무사히 고려를 일으켰다. 그리고 宋(송)에 맞서는 강국으로서 국제 무대에 등장하였다.
*  *  *  *
그러나 그 뒤 요-금-원으로 이어지는 옛 고구려 땅에서 일어난 돌풍으로 시련을 겼었다. 그리고 고려 역시 신라처럼 귀족주의에 빠져 흔들릴 때 홀연히 이성계라는 무인이 나타나 조선을 창업하였다. 이때에는 무학이라는 승려가 있어서 도선의 뜻을 이어 주었다. 그래서 도선의 풍수지리는 큰 손상없이 조선에 전해졌다.
고려에 이어 등장한 조선이 무너진 뒤 오늘의 한국 정부가 섰지만, 이제는 더 이상 도선의 풍수지리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아니, 문헌으로야 여전히 전해지고 있다. 그렇지만 고려나 조선처럼 왕조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우리 땅을 지키고 훼손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정부가 나서서 여기저기 함부로 파헤치고 무너뜨리고 깎아내고 있다.


더 안타까운 일은 이른바 명당 길지라는 곳에 썩어문드러진 쓰레기만 자꾸 묻는다는 점이다. 도둑놈, 정치모리배, 졸부, 탐관 오리 따위들이 다투어 더러운 제 몸을 명당에 자꾸 묻어대어 그야말로 그 못된 핏줄이 혈처를 타고 흘러다니고 있는 것이다. 돈 좀 있다고, 힘 좀 있다고 좋다는 명당은 다 차지하고 앉아서 그 더럽고 못돼먹은 송장을 파묻어대니 이 민족의 장래는 도대체 어떻게 될까 두렵다. 적어도 풍수지리가 맞는다면 말이다.
지금 같아서는, 이 땅이 정말 도선이 말한 대로 큰 배(船)라면 깨지고 부서지고 갈라져서 도무지 배 구실을 더는 못할 것만 같다. 배를 버리기로 작정했다면 몰라도 더불어 살아야 할 이 땅을 이토록 마구잡이로 파헤친 적은 역사적으로도 없었다.
버릴 배로 작정했다면, 그렇다면 우리 민족이 내릴 곳은 어디란 말인가?
* * * * *
도선은 1천년 뒤의 오늘을 보고 배를 띄웠다.
이제는 그 배에서 우리 민족이 모두 내려야 할 때이다.


노아가 方舟(방주)를 지어 생명을 보존했듯이 도선은 이 나라 한반도를 배로 고쳐 천년 항해를 시켰다. 이제는 그가 예언했던 後天(후천) 시대가 되었다.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그 이전의 문화, 문명과는 전혀 다른 후천 세상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그 후천이 100년 새벽을 거쳐 이제 바야흐로 본격적인 후천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1895년에 정역을 발명한 김일부 선생이 예언한 후천개벽의 시대가 열린 지 이제 백여 년이 되었다. 이른바 후천의 새벽이 온 것이다.


이 순간 우리나라는 더 이상 배가 아니다. 이제는 배에 타고 있을 수만은 없다. 이 배를 우리 민족이 내릴 터에 이끌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타고 있는 이 한민족號(호)가 내릴 곳, 모세가 찾았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같은 우리의 미래의 터전은 어디인가? 혹자는 말하기를 뱃머리가 가리키는 곳, 곧 조선과 부여, 고구려가 흥성했던 우리 상고사의 터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다. 누군가 그 역할을 할 사람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야말로 오랫동안 기다려온 이 민족의 지도자요, 정도령이요, 三敎(삼교) 통합하는 眞人(진인)이 될 것이다. 다만 그 실질적인 역할을 보자면, 한반도라는 이 배에서 우리 민족이 안전하게 내리도록 이끌어줄 導船師(도선사:士를 師로 쓴 것은 그 역할의 중대성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가 진정한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導船師(도선사) .
그렇다. 우리 민족에게 필요한 진정한 지도자는 바로 도선사이다. 1000년 전에 배를 띄운 사람이 道詵(도선)이었다면, 이제 그 항해를 마치고 귀환할 인물 또한 導船(도선)인 것이다. 이 도선이 어디선가 꿈을 키우고 있을 것이고, 힘을 기르고 있을 것이다. 그 도선에게 엎드려 말한다.
- 이 민족은 천년 항해에 멀미가 심하니 어서 좀 내려 주소서.
내가 죽기 전에 ‘導船(도선)’을 볼 수 있다면 여한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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