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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운 작품/전시재상유성룡의 임진왜란 7년기록

<소설 징비록> 작가의 말

* 2쇄를 찍을 때 초판본의 <작가의 말>에 조금 더 붙였다.

* 그래서 <작가의 말> 1, 2, 3으로 구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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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나는 이 소설 말고도 임진왜란을 소재로 한 <소설 토정비결(해냄출판사 소설 토정비결 1,2)>, <당취(해냄출판사 소설 토정비결 3,4)>, <소설 이순신>을 썼다. 4번째다.

 

가장 먼저 발표한 <소설 토정비결>에서는 토정 이지함을 비롯한 조선 중기의 선각자들이 왜란을 막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다루었다. 전란을 피할 수 없는 백성의 고통스런 운명을 고민했다. 그뒤 임진왜란이 발발한 시기는 승군들의 활약상을 중점적으로 다룬 <당취>를 신문 연재소설로 발표했다. 평양성 수복전투, 행주산성 대첩, 진주성 대첩, 금산벌 전투, 이순신의 수군 전투 등에 굉장히 많은 승군들이 참전했는데, 유학자들이 적은 역사에는 지나치게 소홀히 취급되거나 빠져 있어서 역사 보정 차원에서 공들여 썼다. 그래서 두 소설을 합본한 것이다.

 

이후 청소년 역사소설로 썼던 <소설 이순신>을 다듬어 내놓았는데, <당취>에서 이미 원균과 이순신의 은원 관계를 충분히 다루었기 때문에 이 소설에서는 이순신 개인을 중심으로 썼다.

따라서 이 소설 <징비록>은 임진왜란을 보는 정사 차원의 소설적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주인공인 유성룡은 전시재상으로 불릴만큼 7년 전쟁 내내 조선군의 중심과 핵심의 자리에 있으면서 많은 전투와 전쟁외교, 전술전략 등을 직접 세우거나 체험했다. 명군과 일본군 사정에 대해서도 가장 많이 아는 위치에 있었다.

 

또한 나는 개인적으로 선조 이균과 왕세자 광해군을 처음부터 끝까지 호종한 예조참판 이관, 예조좌랑 이효원 부자의 후손으로서 집안에 전해져오는 <호종일기(임금과 왕세자를 모시고 피난다니면서 매일 기록한 일기)>를 탐독했다. 부끄럽지만 당시 경상좌병사 이각은 이관 할아버지의 동생이자 이효원의 삼촌이다. 병마사로서 동래부를 구원하지 못하고, 또 본영인 울산마저 지켜내지 못한 채 임진강 전선까지 후퇴했다가 왕명으로 참형을 받으셨다. 후손으로서 사죄드린다. 이밖에도 이순신 전사 후 절충장군이 된 의병장이 한 분 계시고,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수군절도사를 네 분이 맡아보았다.

 

선조 시절 승지에 오른 이효원은 광해군 때 대사간이 되지만 곧 당쟁에 휘말려 거제도로 14년간 유폐되고, 이에 우리 집안이 충청도 청양으로 은둔하는 계기가 된다.

 

역사에 영광만 있는 것은 아니다. 유성룡은 7년간 전시 재상(영의정 겸 도체찰사)으로 활약했지만 녹봉을 받아본 적이 없다. 호종한 우리 선대조 두 분도 마찬가지다. 전쟁이 나자마자 끊어진 녹봉은 16011월분부터 지급되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삭탈관직된 유성룡은 녹봉을 끝내 받지 못했다. 큰아들이 먼저 죽는 불행마저 겪었다. 그가 예순여섯 살의 나이로 타계할 때 장례를 치를 돈이 없어 인근 선비들이 추렴해 쓸 정도였다.

 

2

 

유성룡의 <징비록>은 사실상 징비(懲毖)’에 실패한 책이다. <선조실록>에는 일언반구 없다가 서인들이 적은 <수정실록>에서 유성룡 졸기를 넣으면서 처음으로 <징비록>을 언급하는데, ‘식자들은, 자기만 내세우고 남의 공은 덮어버렸다 하여 이를 나무랐다.’며 깡그리 무시했다. 또한 유성룡을 가리켜 국량(局量)이 협소하고 지론(持論)이 넓지 못하여 붕당에 대한 마음을 떨쳐버리지 못한 나머지 조금이라도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면 조정에 용납하지 않았고, 임금이 득실을 거론하면 또한 감히 대항해서 바른대로 고하지 못하여 대신(大臣)다운 풍절(風節)이 없었다.’고 악평을 남겨버렸다. 그뒤 <징비록>이 다시 언급된 것은 숙종 38년인 1712년으로, <징비록>이 일본에서 출간되었다는 사실을 거론하며 금단(禁斷)해달라고 청하는 말이 나온다. 그런즉 왕과 재상, 누구도 <징비록>을 탐독한 적이 없다.

 

대신 적국인 일본 교토(大和屋 伊兵衛)에서 1695년에 출간되어 널리 읽혔다. 조국 조선에서는 일제 강점기인 1936년 총독부 직할 기관인 조선사편수회가 처음으로 300부를 영인 출간하였으며, 1969117일에야 국보 132호로 지정되었다.

 

이 소설에 '전시재상 유성룡'이라고 쓴 타이틀은 사실 적국 일본에서 붙인 별칭이다. 당시 조선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그를 삭탈관직시키고, 그가 쓴 <징비록>은 동인의 시각으로 편향되게 집필된 책이라 하여 서인 정권으로부터 무시되었다. 이들은 선조실록조차 인정할 수 없다 하여 <수정실록>을 만들기도 했다. 적군이 무서워한 유성룡, 이순신, 사명당의 승군, 곽재우 등의 의병장을 정작 우리 조정은 잡아다 죽이려고나 하고 삭탈관직 혹은 역적으로 몰아붙였던 것이다.

 

유성룡은 왜란이 터지던 시기에 좌의정이었는데, 몽진 중인 개성에서 삭탈관직되었다. 그의 이력에는 대부분 왜란 시기의 도체찰사라고 나오지만, 그래서 마치 조선군총사령관쯤으로 묘사되지만 그건 훨씬 뒤 정유재란 때 잠시잠깐의 일이다. 임진년에는 주요 전투가 끝난 이듬해에 겨우 관서도체찰사가 될 뿐이다.

 

임진년, 그는 무보직 상태에서 '백의종군' 형식으로 행궁을 지켰다. 책임감 때문에 그런 것이다. 전형적인 노블리스오블리제였을 뿐이다. 유성룡은 조선군 지휘권이 명나라에 넘어가자 비밀리에 유격군을 운용하기도 했고, 그러다 명군에 저지당하고, 다투고, 무릎을 꿇기도 했다. 그가 전쟁 전 이순신과 권율을 추천해 전선에 보냈다는 엄청난 기적은, 이후의 역사서에서 단순한 우연으로 간주되었다.

 

임진왜란이 숨고르기를 한 뒤 유성룡은 잠시 영의정에 오르지만 정유재란을 치르자마자 막바로 삭탈관직되었다.

왕조실록에도 유성룡은 호종공신 1등이 아니고 2등일 뿐이다. 3등에 내시 24명이 대거 포함된 걸 보면 내시보다는 좀 낫다고 해주었을 뿐이다. 왕 옆에 착 붙어 명나라로 도주할 것을 종용하던 이항복이 1등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유성룡이 징비록을 남겼음에도 이후 정묘호란,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마침내 왜란의 후예들에게 강점되고 끝내 나라가 분단되는 지경에 이른다. 오늘의 일본이 휘두르는 욱일승천기라는 깃발, 임진왜란 때 부산에 처음 상륙한 소서행장, 즉 일본군 제1군이 쳐들었던 바로 그 깃발이다.

 

징비록은 슬픈 책이다. 조국 조선에서는 폄하되고 도리어 적국 일본에서 출간되고, 읽히고, 가치를 인정받은 책이다. 조선은 <징비록>을 외면하면서 왜 전쟁이 일어났는지, 왜 패전했는지 따지지 않았지만 도리어 침략자 일본은 <징비록>을 탐독하면서 왜 조선을 병탄하지 못했는지 철저히 연구, 마침내 300년 뒤 더 갈고닦은 전략과 전술로 조선을 단숨에 삼켜버렸다. 이 소설을 재밌게 읽더라도, 나라와 겨레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 쓴 전시재상 유성룡의 참회문이자 사후약방문인 <징비록>은 저술 직후부터 일제에 강점될 때까지 3백여 년간 줄곧 외면받았으며, 오늘까지 그 대가로 남북 분단 중이며, 그래서 왜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 바란다.

 

3 

 

왜란 당시 나라 위해 목숨 바친 이들의 명단을 적는다.

1592년부터 1598년 사이에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하거나 죽은 지휘관들의 명단이다. 이 분들의 부하들은 안타깝게도 이름조차 남기지 못했다. 따라서 전사 지휘관 한 명당 적어도 수백 명의 희생이 있었으리라고만 짐작한다. 이 무명 전사자들의 희생도 잊지 말아야 한다.

지금으로부터 4백 년 전에 있었던 임진왜란 전사자도 이처럼 정확하게 기록할 수 있다. 하물며 백년도 안된 친일 부역자의 명단쯤은 얼마든지 언제든지 정확하게 적을 수 있다.

역사를 두려워 해야 한다. 역사는 반드시 기록한다. 영광스런 이름, 오욕의 이름, 결코 잊지 않는다. 조선 중기 인물들인만큼 자료 가치를 높이기 위해 이름은 한자로 적는다.

 

*날짜는 음력(괄호 속에 양력)

 

1592.04.14.(양력 524) 부산 전투

鄭撥(부산진첨사) * 부산진 민군 3000명 전원 전사

尹興信(다대포첨사) * 1만에 맞서 싸우다 병사 800명 전원 전사

尹興梯(다대포 첨사 윤흥신 아우)

 

1592.04.15.(양력 525) 동래성 전투

宋象賢(동래부사) * 동래부 민군 약 3000명 전사, 500명 포로

洪允寛(조방장)

趙英珪(양산군수)

李彦誠(울산군수) 포로, 1593년 전사

 

1592.04.26.(양력 65) 문경 기습전투

申吉元(문경현감)

 

1592.04.28.(양력 67) 충주 전투

申砬(삼도도순변사)

金汝岉(전 의주목사)

李宗張(충주목사)

 

159257(양력 616) 옥포 해전

韓百祿(지세포만호) * 이때 부상으로 824일에 순직.

 

1592.05.18.(양력 627) 임진강 방어전

申硈(咸鏡兵使, 수어사)

劉克良(조방장)

金百壽(의병장)

金光鋏(의병장)

沈岱(경기감사) * 임진강 방어전 직후 삭령에서 적의 기습으로 전사

 

1592.06.05.(양력 713) 용인 전투

白光彦(방어사, 선봉장)

李之詩(조방장)

李之禮(이지시 동생)

 

1592.06(양력 7) 김화 전투

元豪(전 전라우수사, 경기강원방어사 겸 여주목사) 유격전 중 전사

 

1592.07.07.(양력 813) 전주 웅치전투

鄭湛(김제군수)

姜運(비장)

朴亨吉(비장)

金齊閔(의병장)

金晏(김제민 의병장의 아들)

邊應井(해남현감) 중상

 

1592.07.10.(양력 816) 금산 전투

高敬命(의병장)

高因厚(고경명의 아들)

趙憲(의병장)

霊圭(승군장)

韓諄(남평현감)

 

1592.08.02.(양력 97) 언양 전투

金虎(의병장)

 

159291(양력 105) 부산포 해전

鄭運(녹도만호) 6

 

1592.09(양력 10) 인동 전투

張土珍(의병장)

 

1592.10.10.(양력 1113) 1차 진주성 전투

柳崇仁(경상우병사)

鄭得說(사천현감)

朱大淸(가배량 권관)

 

 

金時敏(진주목사)

柳崇仁(전라우병사)

鄭得說(사천현감)

 

1593.06.28.(양력 726) 2차 진주성 전투

崔慶会(경상우병사)

成永達(경상우도병마우후)

徐禮元(진주목사)

金千鎰(도절제사)

李宗仁(김해부사)

金千鎰(의병장)

沈友信(의병장)

黃大中(의병장)

高宗厚(금산 전투 전사 의병장 고경명의 아들)

吳宥(의병장)

閔汝雲(의병장)

高得賚(병마사 부장 겸 전 군수)

黃進(충청병마사)

鄭名世(해미현감)

南景誠(회덕현감)

李禮壽(남포현감)

宋悌(당진현감)

李義精(보령현감)

成守慶(진주판관)

張胤(사천현감)

金應鍵(결성현감)

金俊民(거제현령)

柳夢說(황간현감)

李潛(첨정)

 

1597.06.10.(양력 723) 안골포가덕도 해전

金軸丸(평산만호)

安弘国(보성군수)

 

1597.9.16(양력 1025) 명량해전

金卓(순천감목관)

戒生(전라우수영 노비)

 

1597.07.16(양력 828) 칠천량 전투

元均(삼도수군통제사)

元士雄(원균의 아들)

李億祺(전라우수사)

崔湖(충청수사)

斐興立(흥양현감 겸 조방장)

安世熙(조방장)

李應彪(가리포첨사)

孫景祉(함평현감)

柳海(별장)

 

1597.08.16.(양력 927) 남원성 전투

李福男(전라병마사) * 조선군 1000

任鉉(남원부사)

金敬老(조방장)

申浩(별장

呉應井(방어사)

李徳恢(남원판관)

李春元(구례현감)

呉應鼎(순천부사)

鄭期遠(접반사)

閔濬(접반사)

李元春(광양현감)

馬應房(진안현감)

 

명군(부청병 양원 휘하) * 명군 3000

李新芳(중군장)

毛承先(천총)

蔣表(천총)

 

1597.08.17.(양력 928) 황석산성 전투

郭䞭(전 안음현감)

趙宗道(전 함양군수)

白土霖(전 김해부사)

 

1598.10.02.(양력 1031) 순천 해전

黄世得(사도첨사)

 

1598.11.18.(126) 노량해전

李舜臣(삼도수군통제사)

李英男(가성포첨사)

方徳龍(낙안군수)

高得藏(흥양현감)

宋希立(지도만호)

 

포로

臨海君(왕자)

順和君(왕자)

李弘業(경성판관)

韓克誠(함경북도병마사)

柳永立(함경도관찰사)

 

비전투 사망자

李珏(경상도좌병사) 1592.05.12. 처형

申恪(부원수) 1592.05.18. 처형

宋儒眞 1593.01 서울 수복 전 처형

李山謙(의병장) 1593.02. 서울 수복 전 반란 혐의로 처형(연좌로 처형된 의병 呉允宗, 金千壽, 李春福, 金彦祥, 宗萬福, 李秋, 金永)

李夢鶴(반란) 1596.07 처형

金徳齢(의병장) 1596.07 반란 혐의로 처형

禹性傳(의병장) 1593.07 과로사

金練光(회양부사) 1592.05

金悌甲(원주목사) 1593.06.29 유격전 중 전사

緒沫(성주목사) 1593년 유격전 중 전사

孫仁甲(전 첨사) 유격전 중 전사

李渾(함경남도병사) 백성에게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