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의 과학기술자, 장영실
이종봉(부산대 사학과 교수)
1.
한국과학사에 있어서 15세기(세종대)는 簡儀臺(7×7×10m)․日星定時儀․해시계(仰釜日晷)․물시계(自擊漏․玉漏)․曆法(七政算內․外篇)․測雨器․水標․醫書․農書․금속활자(甲寅字) 등이 완성되었다. 우리는 과학기술자1)하면 위의 몇몇 제품을 만든 장영실(蔣英實)을 거론하였고, 그는 조선시대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을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게 한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2) 그래서 고액권의 화폐의 인물로도 선정되려다가 무산되었다.
장영실에 관련한 자료는 **세종실록**․**연려실기술** 등에 그의 활동과 비교할 때 너무나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렇지만 장영실에 관한 글은 한반도에서 출판되는 교과서와 모든 위인전에 수록(수십종)되어 있는데, 그러한 내용은 많은 억측과 추측으로 도배되어 있다.3)
본 발표에서는 자료의 사실에 근거하여 장영실을 한국과학기술사의 위상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돕고자 한다.
2.
먼저 장영실의 출생 시기는 현재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활동시점을 고려할 때 조선 태조 말․정종․태종초반 무렵으로 추정된다.
장영실의 출신과 관련한 문제인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3자료가 참고 된다.
**세종실록** 권61, 세종 15년 7월 을미조에는 ‘행 사직(司直) 장영실은 그 아버지가 원의 소항주(蘇杭州) 사람이고, 어머니는 기생(官妓)이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세종실록** 권65, 세종 16년 7월 병자조에는 ‘영실은 동래현 관노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반면 「아산장씨족보**에는 아버지가 고려 말 정 3품 전서(典書)를 지낸 장성휘(蔣成暉)라고 기록하고 있다.
<가계도>
蔣壻(시조)4)→蔣應時(2세)→蔣公秀(3세)5)→蔣崇(4세)6)→蔣世芬(5세)→蔣中之(6세)→???(7세)→蔣成暉(8세)7)→장영실(9세)
→위의 자료들에서 장영실에 대한 기록은 약간 차이가 있지만, **세종실록**과 **아산장씨족보**를 통해 추정한다면 장영실은 아버지(장성휘)와 동래의 관기 사이에서 출생하였고, 동래현의 관노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장영실의 아버지의 출신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가 문제이다. 즉 원의 출신으로 혹은 고려의 관인으로 해석할 것인가이다.
․장영실의 면천 시기는 다음의 자료가 주목된다.
**세종실록** 15년 을미조에 의하면 ‘工巧한 솜씨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으므로 태종께서 보호하시었고, 나도 역시 그를 아낀다. 임인(세종 4년)․계묘년(세종 5년) 무렵에 상의원 별좌에 시키고자 하여 … 시키지 못하였다. 그 뒤에 다시 대신들에게 의논한즉 유정현 등이 '상의원에 임명할 수 있다'고 하니, 내가 그대로 따라서 상의원 별좌에 임명하였다’고 하거나 ‘성품이 정교하여 궁궐 내의 공장을 맡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연려실기술≫ 세종 3년 신축조에는 ‘남양부사 윤사웅, 부평부사 최천구, 동래 관노 장영실을 내감으로 불러서 선기옥형 제도를 토론하여 연구하게 하니, 임금의 뜻에 합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임금이 크게 기뻐하여 이르기를 "장영실은 비록 지위가 천하나 재주가 민첩한 것은 따를 자가 없었다. 너희들이 중국에 가서 각종 천문기계의 모양을 모두 눈에 익혀 와서 빨리 모방하여 만들어라’고 기록하고 있고, 세종 7년 을사 10월조에는 '양각을 준공하여 임금이 친히 내감에 내려와서 두루 보고 이르기를 '기이하다. 휼륭한 장영실이 중한 보배를 성취하였으니, 그 공이 둘도 없다'하였다. 곧 면천시키고자 하니 가자하며 실첨지에 제수하고 겸하여 보루사를 살피게 하고 서울을 떠나지 않게 하며, 감조관 윤사웅 등 세 사람에게 鞍馬를 하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태종대의 도천법, 김담8)의 추천으로 이른 시기에 면천된 것으로 파악하기도 하지만, 신빙성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동래현의 관노시절부터 어떤 물품을 만들어내는 탁월한 능력을 소유하였고, 이러한 능력(재능)이 동래현 관노에서 중앙정부의 관리로 진출하게 되었으며, 면천의 시기는 세종 5년~7년 무렵으로 추정된다.
․중앙으로 진출한 시기는 ≪세종실록≫에 의하면 ‘태종이 그를 보호하였다. 나도 역시 그를 아낀다’고 기록하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태종 후반․세종 초반의 무렵인 것으로 보여 진다.
→여하튼 장영실은 태종과 세종의 총애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관직은 임인(세종 4년)․계묘(세종 5년) 무렵에 왕실의 기관인 상의원(尙衣院) 별좌(別坐)에 임명의 논의가 있었지만 실패하였고, 그 후에 상의원 별좌에 임명되었고, 세종 7년(1425) 이전에 무관직인 사직(司直; 정 5품)으로 전직되었고, 세종 15년(1433)에는 호군(정 4품), 세종 20년(1438)에 대호군(종 3품)에 임명되었다.
→장영실은 세종 중반에 여러 차례 승진하였고, 관직은 무관직에 임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관직의 임명과정은 ≪세종실록≫에 의하면 순탄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9)
3.
․구체적 활동(세종 4년~세종 24년)은 세종 3년(1421) 明에 파견되어 원대의 발달된 과학기술 자료들을 접하였다. 장영실은 중국의 과학 기술과 자료를 직접 접하게 되므로 새로운 과학기술을 실현케 하는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중국에서 돌아온 이후 세종 4년부터 천문기기의 제작을 지시 받음으로써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물시계의 제작
ㄱ. **연려실기술**과 **세종실록**에 의하면 세종 6년(1423)에는 ‘청동물시계’를 제작하였다고 한다. **연려실기술**에는 청동제물시계에 대해 자동으로 시간을 알리는 새로운 모델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세종실록**에는 중국의 체제를 참고하여 주조한 경점(更点)의 기(器)라고 기록하고 있다.
ㄴ.세종 16년에는 새로운 자동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를 만들었다. 김빈과 함께 2년만에 제작하였다 자격루는 청동제 자동물시계를 만든 지 꼭 10년만의 일이다. 이 자동물시계는 경회루 남쪽에 세워진 보루각(報漏閣)에 설치되어 세종 16년 7월 1일부터 공식 국가의 표준시계로 사용되었다.
→조선은 새로운 정밀기계 장치의 자동 표준 시계를 가지게 되었고, 해시계의 단점을 보완하였다.
ㄷ. 세종 20년(1438) 1월에 옥루(玉漏)를 만들었다. 옥루는 글자 그대로 임금님의 물시계인데, 즉 천상시계(天象時計)이다. 세종은 특별히 경복경 천추전(千秋殿) 서쪽 왕의 침실 옆에 흠경각(欽敬閣)을 지어 옥루를 설치하였다. 흠경각에는 또 자동시계의 배경으로 농촌의 4계절의 광경을 그린 화폭을 세우고, 선녀가 방울을 들고 나타나는 모양, 사람․동물․나무 등을 나무로 조각하여 농촌의 자연을 재현하는 등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움직이는 모습을 한 인형이 나타나고 사라지게 만들었다. 이로써 세종대에는 표준시계인 자격루, 천문시계인 혼천의, 그리고 천상시계인 옥루 세 자동시계를 갖추게 되었다.
→장영실의 옥루는 그 후 100년이 넘게 신기한 자동시계로 왕들의 사랑을 받아오다가 명종 초에 경복궁의 실화로 불타 없어졌다가 명종 9년(1554) 장영실이 남긴 설계도에 의해 복원되었다.
이로써 세종대에는 표준시계인 자격루, 천문시계인 혼천의, 그리고 천상시계인 옥루 세 자동시계를 갖추게 되었다.
․활자주조
세종 16년 금속활자인 갑인자의 주조에 참여하였다. 특히 갑인자로 인쇄한 책들은 조선 초기에 남겨진 책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인쇄물로 여겨진다.
․천문기기의 제작
세종 14년(1432) 정인지와 정초가 연구하여 정리한 천문고전 자료를 바탕으로 이천(李蕆)과 함께 먼저 나무로 만든 간의(簡儀)를 완성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장영실은 청동으로 여러 의상(儀象)을 부어 만드는 일에 착수하여 7년만인 세종 19년(1437)년까지 여러 가지의 기기를 완성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중시계인 仰釜日晷‘,10) 휴대용 해시계인 懸珠日晷와 天平日晷, 지남침을 쓰지 않아 남북이 스스로 정해질 수 있게 만든 定南日晷(세종 19년에 완성)11), 밤낮으로 시간을 측정하는 기구인 日星定時儀 등의 제작에 참여하였다.
․금속제련과 기계기술의 전문가
세종 14년의 기록에 의하면 '강경순이는 자가 청옥을 얻어 진상하자, 사직 장영실을 보내어 그것을 채굴하도록 하고, 다른 사람들이 채취하는 것을 금하였다'고 하거나 세종 19년의 기록에 의하면 '지원리와 김새 … 임금이 장영실에게 명하여 그 기술을 전습하게 하였다. 새가 말하기를 돌맹이를 제련하여 금과 은을 만들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세종 20년에는 경상도 채방별감으로도 활동함.
→금속제련 기술 전문가로서 활동.
․측우기의 제작.
기존 거의 모든 책에서 측우기는 장영실을 제작자로 파악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 대해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 다음의 자료를 살펴보자. 측우기는 ‘세종 23년 8월에 서운관에서 측우기를 설치할 것을 건의하고, 세종 24년 5월에 부분적으로 완성되었음을 보알 수 있다. 하지만, 세종 23년의 기록에 의하면 세자 즉 문종이 측우기를 직접 창안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문종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근년 이래로 "세자"가 가뭄을 근심하여, 비가 올 때마다 젖어 들어 간 分數를 땅을 파고 보았었다. 그러나 적확하게 비가 온 푼수를 알지 못하였으므로, 구리를 부어 그릇을 만들고는 宮中에 두어 빗물이 그릇에 괴인 푼수를 실험하였는데, 이제 이 물건이 만일 하늘에서 내렸다면 하필 이 그릇에 내렸겠는가. 또 이 물건이 지샛물[簷溜]이 많이 흘러 모여 들어가는 곳에 있는 것도, 또한 송화가 瓦溝에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비를 따라 내려온 것이다. 또 이 물건이 모래와 돌이 流蕩하는 곳에 있지 아니하고 오로지 점밀(黏密) 한 검은 땅에만 있었으니, 그것은 송화임을 알 수 있다.’하였다.12)
호조에서 아뢰기를, “각도 감사가 우량을 轉報하도록 이미 成法이 있사오니, 土性의 燥濕이 같지 아니하고, 흙속으로 스며 든 淺深도 역시 알기 어렵사오니, 청하옵건대, 서운관에 대를 짓고 쇠로 그릇을 부어 만들되, 길이는 2척이 되게 하고 직경은 8촌이 되게 하여, 대 뒤에 올려 놓고 비를 받아, 본관 관원으로 하여금 천심을 척량하여 보고하게 하고, 또 馬前橋 서쪽 수중에다 薄石을 놓고, 돌 위를 파고서 趺石 둘을 세워 가운데에 方木柱를 세우고, 鐵鉤로 부석을 고정시켜 척(尺)·촌(寸)·분수(分數)를 기둥 위에 새기고, 본조 낭청이 雨水의 천심 分數를 살펴서 보고하게 하고, … 또 외방 각 고을에도 경중의 鑄器例에 의하여, 혹은 磁器를 사용하던가, 혹은 瓦器를 사용하여 관청 뜰 가운데에 놓고, 수령이 역시 물의 천심을 재어서 監司에게 보고하게 하고, 감사가 전문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13)
호조에서 아뢰기를, “우량을 측정하는 일에 대하여는 일찍이 벌써 명령을 받았사오나, 그러나, 아직 다하지 못한 곳이 있으므로 다시 갖추어 조목별로 열기합니다.
1. 서울에서는 쇠를 주조하여 기구를 만들어 명칭을 測雨器라 하니, 길이가 1척 5촌이고 직경이 7촌입니다. 周尺을 사용하여 서운관에 대를 만들어 측우기를 대 위에 두고 매양 비가 온 후에는 본관의 관원이 친히 비가 내린 상황을 보고는, 周尺으로써 물의 깊고 얕은 것을 측량하여 비가 내린 것과 비오고 갠 일시와 물 깊이의 척·촌·분의 수를 상세히 써서 뒤따라 즉시 계문하고 기록해 둘 것이며,
1. 외방에서는 쇠로써 주조한 측우기와 주척 매 1건을 각도에 보내어, 각 고을로 하여금 한결같이 상항의 측우기의 체제에 의거하여 혹은 자기든지 혹은 와기든지 적당한 데에 따라 구워 만들고, 객사의 뜰 가운데에 대를 만들어 측우기를 대 위에 두도록 하며, 주척도 또한 上項의 체제에 의거하여 혹은 대나무로 하든지 혹은 나무로 하든지 미리 먼저 만들어 두었다가, 매양 비가 온 후에는 수령이 친히 비가 내린 상황을 살펴보고는 주척으로써 물의 깊고 얕은 것을 측량하여 비가 내린 것과 비오고 갠 일시와 물 깊이의 척·촌·분의 수를 상세히 써서 뒤따라 계문하고 기록해 두어서, 후일의 참고에 전거로 삼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14)
4.
장영실은 세종 24년(1442) 그의 감독 하에 만들었던 왕이 타는 수레 즉 승여(乘輿)가 부러지고 허물어지는 일로 불경죄로 의금부에 투옥되었고,15) 세종의 배려가 있었지만 결국 장형을 받은 이후 파면되어 이후 행적을 알 수 없다.
장영실의 추모 사업은 ‘과학선현 장영실 선생 기념사업회(서울)’를 결성하여 활동하고 있고, 이들에 의해 충남 아산시 인주면 문방리에 있는 장영실의 묘역을 새롭게 단장, 1984년에는 추모 기념비가 제막되었다.
그의 출신지인 부산은 ‘장영실과학고등학교’가 설립되었고, 부산대학교 내에 장영실 동상이 세워져 있지만(2004), 장영실로는 존재하지 않는다(우장춘로 대비됨).
5.
장영실은 15세기 세종대의 과학기술이 동아시아에서 시야에서 볼 때 유례가 없는 발자취를 남길 수 있도록 기여를 하였다.
첫째, 인재를 뽑아 기르고, 두뇌집단을 움직인 결과이고,16) 둘째, 조직적 공동연구의 결과이고, 셋째, 국책과제로서의 과학기술이 정책적으로 전개된 결과이다.
'이재운 작품 > 소설 장영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화 천문을 본 사람들을 위한 친절한 안내 (0) | 2020.01.01 |
---|---|
장영실, 4판본이 나오다 (0) | 2019.12.13 |
드라마 장영실과 <소설 장영실>은 왜 이렇게 다르지? (0) | 2016.01.19 |
소설 장영실을 내며 (0) | 2016.01.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