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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운 작품/가짜화가 이중섭

미안하다, 나의 이허중!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제대로 검증되지도 않은 채 오로지 박정희의 딸이란 이유만으로 온 국민이 4년간 시달렸다. 박근혜가 만일 운명의 시험을 받은 것이라면, 그의 인생은 철저한 실패작이다.


오늘 갑자기 내가 창조한 인물 이허중이 그립다.

미안하고 미안해서 늘 짠한데, 특히 5.16도로 건설현장에서 생을 마감하게 만들어 더욱 미안하다. 하지만 어쩌랴. 소설은 늘 현실보다는 관대하다.


나이를 먹으면서 내가 만든 인물들 생각하느라 밤잠을 설칠 때가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내 머리에서 나온 가공의 인물이지만 나는 이 캐릭터들과 약 1년에서 2년 정도 가까이 지내 마치 실존하는 사람처럼 느낀다. 두뇌가 실존인물로 인지할 정도다. 혹시라도 내가 치매에 걸리면 이 인물들을 찾거나 보고 싶다고 호소할지도 모른다.


<천년영웅 칭기즈칸>의 초희와 제베, <소설 토정비결>의 희수와 두무지, <바우덕이>의 바우덕이, <정도전>의 정도전 아들 정진, 소설 토정비결 2부 <당취>의 불두와 여진, <사막을 건너는 사람은 별을 사랑해야 한다>의 도담 동자, <하늘북소리>의 무사와 여진, 이 끝에 <가짜화가 이중섭>의 이허중이 있다.

이러고도 나는 종종 내가 기르다 먼저 보낸 나의 애견들을 불러 대화를 나눈다. 슬퍼서 그 이름을 적는 것도 힘이 들 정도다.

내가 가끔 넋을 잃고 뭔가 생각하고 있다면 이처럼 이 세상에 없는 가공의 인물이나 내 곁을 떠나간 애견들 추억을 꺼내 되돌아보는 것이다.


- 이허중이 떠나간 이야기

(가짜화가 이중섭 중)


운명은 가혹했다. 이허중이, 사회정화운동이랍시고 벌인 쿠데타군의 국토건설단에 배속된 것이다. 딱히 오래 징역을 살릴 범죄가 아니라고 본 듯했다. 주로 깡패를 잡아 국토건설단을 조직한다고 했지만, 막상 깡패가 모자랐다. 여기저기 도로 건설에 동원하자면 상당한 수의 깡패가 있어야 하는데, 막상 잡아들인 진짜 깡패만으로는 건설 인력을 조달할 방법이 없었다. 특히 이허중에게 배속 명령이 내려진 제주도 516도로 건설은 엄청난 토목공사라서 깡패를 더 많이 만들어내야만 했다. 덕분에 이허중도 깡패가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회 불만세력, 사상 불순세력 같은 모호한 혐의를 덮어씌워 평소 경찰 검찰의 눈 밖에 난 사람이나 법정에 끌려온 잡범들이 그 대상이 되고 말았다. 억지로 수효를 맞추자니 이허중 같은 재소자가 가장 많이 동원되었다.

이허중은 이미 체념의 경지를 넘어섰는지 말없이 군대를 따라 제주도로 건너갔다. 차출된 건설단원은 500명이었다. 이허중은 제주도로 끌려갔지만 다른 죄수들은 남강댐 건설 현장 도로 16킬로미터, 양구-화천 간 도로 11킬로미터, 강원도 정선 철도공사, 영주 경북선 선로공사, 섬진강댐 건설 현장 도로공사, 울산공업도시 간선도로 등 주로 도로 건설 현장에 나누어 각각 투입되었다.

이허중이 배속된 516도로는 제주도 남북을 가로지르는 43킬로미터 비포장 흙길로 제주의 산남과 산북을 정확히 가른다. 제주도의 전체 차량이 300대에 불과한 상황이었다. 이 도로를 낼 가치가 없다는 반대가 많았지만 군부세력은 그대로 밀어붙였다. 43사건을 겪은 군부로서는 남북 관통 도로 건설을 한라산 기슭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좌익 세력의 근거지를 파괴하는 사업이라고 여겼다. 결국 국토건설단은 맨손으로 길을 닦아야만 했다.

 

이허중은 이중섭의 체취가 묻어 있는 서귀포에서 북쪽으로 내는 도로 공사에 동원되었다. 낮에는 노동을 하고 밤에는 숙소에 돌아가 그림을 그렸다. 식당 벽에도 그림을 그리고 텐트에도 그렸다.

하지만 그는 516도로 건설 현장에서 오래도록 일을 하지 못했다. 종일 계속되는 고된 노동을 감당해낼 정신력이, 체력이 모자랐다. 군대에서는 약을 제대로 주지 않았다. 그들은 양극성장애가 무슨 병인지도 알지 못했다. 다리 부러지거나 머리가 깨지거나 발작하거나 기절해야 병인 줄 알았다. 정신과 약이 떨어졌다고 호소했지만 누구도 귀담아들어주지 않았다. 군인들은 이허중이 약을 달라고 호소할 때마다 멀쩡한 놈이 꾀병을 부린다고 악다구니를 썼다. 형무소라면 간수라도 있어 말귀를 알아들을 텐데 도로 건설 현장은 한글도 모르는 병사들이 감시감독을 했다. 그런 데서 이허중의 질병쯤은 감기만도 못한 것이었다.

약마저 끊어지니 조증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등짐을 지고 가다 쓰러지기 일쑤였다. 군인들은 그런 이허중의 등짝에 매질을 가했다.

몇 해 전, 이중섭을 따라 배우겠다고 서귀포에 들렀던 그 시절 그 시간이 참으로 행복했다는 걸 새삼 느꼈다. 남의 불행을 따라서 겪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아무리 애써도 거짓이다. 하지만 지금 이허중이 처한 실제 상황은 이중섭이 서귀포에 들어와 살던 시절보다 더 혹독하고 고통스럽고 처절하다. 아침저녁으로 죽음을 물고 산다. 하늘이 찢어지고 땅이 갈라지는 것만 같다. 귀에서는 무슨 뜻인지 모를 환청이 그치질 않는다. 엉뚱한 곳으로 흙을 지고 가다가 군인에게 잡혀 얻어맞기도 했다. 헛것이 보이자 43사건 때 죽은 귀신들이라며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약 대신 매가 주어졌다.

 

4월 중순, 봄 햇살이 유난히 따사로운 날 오후에 그는 숙소의 벽면 가득 그림을 그려놓은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세수하고 양치질을 한 다음 목을 맸다. 도로 공사 현장인 만큼 목을 맬 수 있는 끈은 충분했다. 아침 노동에 동원되는 점호에서 그가 누락된 사실이 알려지고, 이내 시신이 수습되었다. 목숨이 끊어지는 시간은 채 5분도 안 걸렸다. 시신은 이중섭이 살던 서귀포, 그래서 바다에 떠 있는 섶섬을 향해 매달려 있었다.

시신이 발견된 뒤 진작에 정신병원으로 옮겼어야 했다고 누군가 아는 체하며 중얼거렸지만, 그도 죄수 출신 건설단원이고, 막상 매가 두려워 말 한마디 도와주지 못한 자의 비겁한 후회일 따름이었다. 516쿠데타 후 사형수가 넘치는 상황에서, 더구나 도로건설 현장에서 정신질환자까지 보살필 여유나 상식이 군인들에게는 없었다. 시신이 수습된 뒤 이허중이 남긴 그림은 국토건설단원들이 나눠 갖거나 혹은 버리거나 벽에 남아 침묵했다.


- 위는 섶섬을 찍은 사진이고, 아래는 이중섭이 자신이 살던 마을에서 섶섬을 바라보며 그린 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