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의 부인은 몇이나 됐을까.
우리는 싯다르타의 부인이 아소다라이며, 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라훌라라고만 알고 있다.
그런데 싯다르타는 카필라 왕국을 계승할 왕자이고, 더구나 외아들이다. 경전마다 기록의 차이는 있지만, 싯다르타에게는 여러 명의 여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기록도 있다.
사나굴다(523~600)는 북인도 출신의 불교 승려다. 눈 덮인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중국(수나라)으로 건너간 인물이다. 그는 176권에 달하는 불교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했다. 그중 하나가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이다. 이 경전에 붓다의 여인들이 등장한다. 적어도 세 명이다. 싯다르타는 계절에 따라 궁을 옮겨가며 살았다고 돼 있다.
『불본행집경』에는 제1궁에 아소다라, 제2궁에 마노다라, 제3궁에 구다미란 여인이 살았다고 적혀 있다. 또 다른 경전 『십이유경(十二遊經)』에도 싯다르타의 부인이 셋으로 기록돼 있다. 그래도 자식을 낳은 여인은 아소다라가 유일한 것으로 보인다.
2600년 전 인도의 카필라 왕국은 고대 부족국가다. 샤카족은 근친혼을 유지하고 있었다.
사실 싯다르타가 왕자비로 맞아들인 아소다라는 남이 아니다. 친고모의 딸이다.
싯다르타의 아버지 숫도다나 왕에게는 아미타라는 누이가 있다. 이 누이는 이웃 나라인 꼴리아족에게 시집을 갔다.
싯다르타가 결혼한 꼴리아족 여인 아소다라는 다름 아닌 아미타의 딸이다.
샤카족은 혈육의 순수성을 잇기 위해 사촌끼리 종종 결혼을 한다. 당시 모든 부족국가가 근친혼을 한 것은 아니다. 훗날 샤카족과 꼴리아족이 강물의 소유권을 두고 다툴 때 꼴리야족은 ‘샤카족의 근친결혼’을 거론하며 조롱했다는 기록이 있다.
네팔에 있는 카필라성에서 나는 ‘아소다라의 생애’를 생각했다. 붓다의 여인, 아소다라. 2600년 전, 그는 바로 이곳에서 살았다. 싯다르타의 팔짱을 낀 채 저 오솔길을 걷고, 갓난 라훌라를 안고서 바로 이 벽돌길을 오갔으리라.
그의 삶은 드라마틱하다. 아소다라는 아름답고, 연민의 정이 있고, 지혜로운 여인이라고 기록돼 있다. 그런 아소다라가 아들을 낳자마자 싯다르타는 출가를 했다. 요즘 기준으로 따지면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가장이다. 아무리 지혜로운 여인이라 해도 고개가 끄덕여졌을까. 핏덩이를 낳자마자 남편이 집을 나가버렸으니 말이다. 더구나 머리를 깎고 수행자가 돼버렸다. 아소다라의 가슴에는 피멍이 들지 않았을까.
카필라 성 밖으로 해가 떨어진다. 인도의 평원을 적시는 노을은 아름답다. 아소다라는 저렇게 떨어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남편을 기다리지 않았을까. 저 멀리 들판을 가르며 남편이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리지 않았을까. 그렇게 기다린 세월이 수십 년에 달하지 않았을까.
훗날 자식 라훌라마저 붓다를 따라 출가한다. 나중에는 카필라 왕국마저 이웃나라의 침략에 멸망하고 만다. 우여곡절 끝에 아소다라는 머리를 깎고 붓다의 승가로 출가를 한다. 팔리어 경전에는 그가 결국 깨달음을 얻고 아라한이 됐다고 기록돼 있다. 아소다라의 생애도 파란만장하다.
궁금하다. 그토록 아름다운 부인과 갓 태어난 자식을 뒤로 한 채 싯다르타는 왜 출가를 했을까.
그는 무엇에 목이 말랐을까.
무엇이기에 그토록 절박했을까.
아소다라의 가슴에 남는 피멍과 라훌라가 성장하며 감당할 ‘거대한 원망’을 싯다르타는 내다보지 못했을까.
그렇지 않다. 처자식은 오히려 싯다르타의 가슴에 박히는 대못과 같다.
심지어 아소다라가 아기를 낳았을 때 싯다르타는 “라훌라자토(Rahulajato)”라고 말했다.
“장애가 생겼다”는 뜻이다. 이 소식을 들은 숫도다나 왕이 아기의 이름을 ‘라훌라’라고 지었다. 라훌라는 ‘장애물’이란 의미다.
그러니 싯다르타에게 자신의 출가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 갓난 아들이다. 그럼에도 싯다르타는 집을 떠났다. 수행자가 됐다.
왜 그랬을까. 왕위도, 처자식도, 아버지의 기대도 떨쳐버리고 그는 대체 어떠한 길을 가고자 한 걸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이 카필라 성의 동ㆍ서ㆍ남ㆍ북, 네 성문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른바 ‘사문유관(四門遊觀)’이다. 단순한 문(門)이 아니다. 인간의 삶, 거기서 피어나는 온갖 고통의 풍경을 싯다르타는 이 문을 통해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네 성문은 삶의 바닥을 꿰뚫어보는 신랄한 통로다.
카필라 성의 성문들을 일일이 찾아갔다. 지금도 흔적이 남아 있다.
싯다르타 왕자는 주로 성 안에서 생활했다. 바깥 출입은 흔한 일이 아니다.
하루는 카필라 성의 동문 바깥으로 나갔다. 거기서 싯다르타는 한 노인을 목격했다. 하얗게 쉰 머리에 구부정한 허리, 이빨은 왕창 빠져 있고 걸음을 옮기는 일조차 힘겨워했다. 싯다르타가 시종에게 물었다.
“저 사람은 왜 저런가?”
“늙어서 그렇습니다.”
“누구나 저런 늙음을 겪게 되나? 나도 그런가?”
“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늙습니다. 거기에는 귀한 이와 천한 이의 구별이 없습니다.”
그제야 싯다르타는 깨달았다. 팽팽한 피부, 풋풋한 젊음, 솟구치는 혈기가 얼만 안 가 무너지는 것임을 말이다. 우리가 누리는 푸름은 영원한 푸름이 아니다. 봄이 영원한 봄이 아니고, 여름이 영원한 여름이 아니듯이 말이다. 청춘도 그렇다. 그렇게 싯다르타는 ‘삶의 시듦’을 봤다.
또 하루는 성의 남문으로 나갔다. 거기서 병든 사람을 보았다. 시종은 말했다.
“누구나 병으로 고통을 받습니다. 아무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싯다르타는 또 충격을 받았다. 늙는 것도 서글픈데, 병에 걸려 육신의 고통까지 감당해야 한다. 인간의 숙명이란 이 얼마나 힘겨운가.
성의 서문으로 나갔을 때는 장례 행렬과 마주쳤다. 사람들은 시신을 들 것에 싣고 화장터로 향하고 있었다. 이른바 ‘죽음’이다. 모든 사람이 한 번은 밟아야 하는 삶의 마침표다. 그게 죽음이다. 사라짐이다. “내가 있다”고 생각하며 평생 살아온 사람들이 처음으로 겪게 되는 ‘나의 없어짐’이다. 그래서 두렵고, 그래서 겁이 난다. 그런데도 피할 수가 없다.
동문과 남문, 그리고 서문에서 싯다르타는 ‘절망’과 만났다. 그에게 삶이란 그저 절벽을 향해 내달리는 폭주기관차에 불과했으리라. 분명히 끝이 있고, 거기서 추락해야 하는데, 그걸 뻔히 알면서도 달릴 수밖에 없는 고통의 기관차 말이다.
싯다르타는 생각하지 않았을까. ‘이런 게 삶이라면 왜 살아야 할까. 시들 수밖에 없는 꽃이라면, 왜 굳이 피어나야 할까. 저물 수밖에 없는 태양이라면, 왜 떠올라야 할까. 무엇을 위해 꽃이 피고, 무엇을 위해 해가 뜨고, 무엇을 위해 사람은 살아야 하는 걸까.’ 그는 이런 물음을 수도 없이 던지지 않았을까.
어느 날 싯다르타는 성의 북문으로 나갔다. 거기서 그는 낯선 사람을 만났다. 발우를 들고서 땅만 바라보며 걷고 있는 수행자였다. 당시 인도에는 온갖 종류의 고행과 요가와 수도를 하는 수행자들이 많이 있었다. 싯다르타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물음을 던졌다.
“당신은 집을 떠나와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마음을 다스려 영원히 번뇌를 끊고자 합니다. 출가는 그걸 위함입니다. 수행자는 자비의 마음으로 모든 중생을 사랑하고 괴롭히지 않습니다. 마음을 비우고 오직 이치에 따라 살고자 합니다.”
이 말을 듣고서 싯다르타는 가슴이 뻥 뚫렸다. 아무런 출구도 없는 삶, 사방이 꽉 막힌 벽. 거기에 느닷없이 창(窓)이 생겼다. 그리고 바람이 들어왔다. 싯다르타의 심정도 그랬다. 영문도 모르고 태어나, 살다가 늙고 병들고 죽는 게 모든 인간의 숙명이다. 그런데 수행자는 연어처럼 숙명의 강물을 거스르고 있었다. 역동적으로 꼬리를 흔들며 삶의 유속(流速)에 맞서고 있었다. ‘이 모든 고통과 이 모든 허무함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소리치며 말이다.
싯다르타에게는 분명한 과녁이 있었다. 그것은 생로병사라는 삶의 궤도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다. 출가의 뜻을 밝히자 아버지 숫도다나는 강하게 반대했다. 그러자 싯다르타는 이렇게 항변한다.
“아버지, 제게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는 길을 알려 주십시오. 그럼 저는 출가를 포기하겠습니다.”
왕은 “그런 길은 없다”고 잘라 말한다.
그러자 싯다르타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저는 출가를 하겠습니다.”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는 길. 세상에 그런 길이 있을까. 그러니 싯다르타가 가고자 하는 길은 ‘길 없는 길’이다. 그의 앞에는 아무런 발자국도 나있지 않다. 어떠한 이정표도 없다. 바닥 없는 바닥을 밟고, 방향 없는 방향을 잡아야 한다. 그럼에도 싯다르타는 그 길을 택했다. 나고, 늙고, 병들고, 죽어야 하는 이 거대한 삶의 허무를 향해 그는 도전장을 던졌다. 그가 출가하던 날은 아들 라훌라가 태어난 지 겨우 7일째 되던 밤이다.
카필라 성에 해가 떨어졌다. 어둑어둑해졌다. 2600년 전, 싯다르타는 이런 어둠을 뚫고서 성문을 나갔다. 동쪽문이다.
나는 동쪽문이 있던 자리로 가서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저 어둠 속으로 싯다르타의 뒷모습이 멀어졌겠지.’
후세의 사람들은 싯다르타의 출가를 ‘마하비닛카마나(Mahabhinikkhamana)’라고 부른다. 그건 ‘위대한 포기’라는 뜻이다. 싯다르타의 포기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의 삶에서는 무엇을 내려놓는 게 ‘위대한 포기’인가,
그를 통해 무엇을 찾는 게 ‘위대한 포기’인가.”
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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