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를 만나다(4)-붓다도 사춘기 때 방황했을까
* 이 글은 태이자 이재운이 손질한 것입니다. 원문을 보시려면 맨아래로 가시오.
룸비니에서 그리 멀지 않다. 카필라 성으로 갔다.
현재 카필라 성은 두 군데다. 하나는 인도 땅, 또 하나는 네팔 땅이다. 두 성의 거리는 가깝다. 불과 10여㎞다. 역사가들은 “둘 다 붓다가 어린 시절을 보낸 카필라 성의 일부”라고 말한다. 싯다르타 왕자. 그는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 계절이 바뀔 때마다 궁을 옮겨다니며 살았다니 말이다.
나는 둘 중에서 인도 피프라하와의 카필라 성터로 먼저 갔다.
이곳의 스투파(탑)에서 1971년 출토된 사리함에는 ‘이것은 사카족 붓다의 사리함이다. 그의 형제, 자매, 처자들이 모셨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 팩트가 틀리다.
널따란 잔디밭과 멀리 나무숲이 보인다.
‘그러니까 2600년 전, 바로 이곳에서 싯다르타 왕자가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냈다. 왕자는 저 뜰을 뛰어다니고, 저 언덕의 나무 아래서 쉬기도 했겠지.’
가슴이 뭉클하다. 카필라 성터에는 붉은 벽돌을 구워서 만든 유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멀리서 인도인 관리인들이 일을 하고 있다.
그중 한 사람이 손짓을 하며 나를 부른다.
가 보니 땅바닥을 가리킨다.
그들은 쪼그리고 앉아서 땅을 조금씩 파헤쳤다.
그러자 숯이 된 볍씨들이 나왔다.
나는 카메라를 꺼내서 찍었다.
놀랍다.
‘아니, 이건 고고학 발굴 현장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나도 앉아서 손으로 옆쪽의 흙을 싹싹 흩었다 그랬더니 까맣게 숯이 된 볍씨가 나온다.
“이게 뭘 의미하느냐?”고 물으니 관리인이 답한다.
“부처님 당시에 이곳에서 벼농사를 지었다. 당시에 쌀밥을 먹었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신기하다. 나는 ‘방사선 탄소연대 측정이라도 해봐야 하는 것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다.
한국이라면 그곳이 ‘고고학 발굴 현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곳은 인도다. 인도에는 1000년, 2000년, 3000년 된 유적이 곳곳에 널렸다. 유적에 대한 관리도 아직은 허술하다. 수천 년 전의 불상이 땅 속에 그대로 파묻혀 있는 지역도 있다. 머리만 땅 위에 내놓은 채 말이다.
그러니 카필라 성터에서 찾아낸 숯이 된 볍씨는 아주 놀라운 일은 아니다. 적어도 인도에서는 그렇다.
나는 늘 궁금했다. 붓다의 아버지. 그의 이름은 숫도다나다.
한자로는 ‘정반왕(淨飯王)’이라 쓴다. ‘정반’은 ‘흰 쌀밥’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숫도다나왕을 우리말로 하면 ‘흰쌀밥왕’이다. 참 우스꽝스러운 이름이다.
캐빈 코스트너가 주연한 영화 ‘늑대와 춤을’에 등장하는 아메리칸 인디언의 이름이 ‘주먹 쥐고 일어서’다.
‘흰쌀밥왕’도 그런 식이었을까.
어쨌든 왕의 이름과 숯이 된 볍씨로 미루어 볼 때 우리는 2600년 전 카필라 왕국에서 벼농사를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인류는 3000년 전부터 벼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인더스 문명은 세계 4대 문명이다. 그러니 인도인들은 일찌감치 벼농사를 지었으리라.
나는 카필라 성의 구석으로 갔다. 나무 아래 그늘에 앉았다.
큼직한 연못이 보인다.
수면 위로 커다란 연꽃이 올라와 있다.
한 송이씩이 아니다. 여기저기 무더기로 피어 있다.
인도에는 예부터 연꽃이 꽤 흔한 꽃이었을까.
초기 불교경전 『숫타니파타』에도 ‘연꽃’을 노래한 시(詩)가 등장한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과 같이
철갑코뿔소의 외뿔처럼 혼자서 가라.’
붓다는 연꽃을 보며 그렇게 노래했다.
소리에 놀라지 말고, 그물에 걸리지 말고, 진흙에 물들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철갑코뿔소의 외뿔처럼 오롯하고 걸림 없이 자유롭게 살라고 했다.
그런데 정작 붓다의 어린 시절은 어땠을까.
거기에는 소리도 없고, 그물도 없고, 진흙도 없었을까.
아니다.
붓다의 성장기는 그야말로 뻘밭이었다. 진흙투성이였다.
나는 그중의 하나가 ‘어머니의 죽음, 어머니의 부재’였으리라 본다. 자신을 낳은 지 1주일 만에 어머니가 죽었다. 마야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여동생 마하파자파티 고타미가 왕비가 됐다. 싯다르타의 친이모다.
자매가 함께 시집가는 일은, 2600년 전 고대 인도에서는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 고타미에게는 자식이 있었다. 고타미는 친자식을 유모에게 맡긴 채, 죽은 언니의 아들인 싯다르타에게 자신의 젖을 물렸다고 한다. 그만큼 사랑을 쏟았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언니 대신 조카를 친자식처럼 받아들인 것이다. 고타미는 훗날 불교사에서 처음으로 출가한 비구니가 된다.
그럼에도 어린 싯다르타는 가슴 한 편에 구멍이 뚫렸으리라. 자신이 세상에 나옴으로 인해 엄마가 세상에서 사라졌으니 말이다. 그러니 마야 부인의 죽음은 싯다르타에게 진흙이 아니었을까. 아무리 발을 빼려고 발버둥쳐도 좀체 빠져나올 수 없는 진흙 말이다.
비단 싯다르타뿐 만은 아니다. 인류사에서 성인으로 꼽히는 큰 인물들이 종종 그랬다. 가령 예수는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태어났다. 목수인 요셉은 그의 친아버지가 아니다. 당시 유대인의 관습으로는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낳은 여자는 돌로 때려 죽였다. 그래야 가문의 명예가 회복된다고 믿었다.
배가 불러오기 전에 마리아를 데리고 요셉이 급히 동네를 떠난 이유도 실은 거기에 있지 않았을까. 어쨌든 어린 예수는 양아버지 밑에서 자라고, 자신의 ‘진짜 아버지’에 대한 숱한 물음을 던지며 성장기를 보냈으리라. 그게 유년기의 예수, 사춘기의 예수에게는 커다란 진흙이 아니었을까.
혹자는 반박할지도 모른다.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에게 무슨 사춘기가 있느냐고. 처음부터 끝까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예수에게는 오로지 신성(神性)만 있다고.”
그렇게 받아칠지 모른다. 그런데 예수는 ‘100% 신(神)’이자, 동시에 ‘100% 사람(人)’이다. 그러니 사춘기에 우리가 겪는 온갖 신체적ㆍ정서적 변화를 예수 역시 겪었을 터이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가 제자들을, 사람들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힘들지 않았을까.
붓다와 예수만 그런 게 아니다. 공자도 그렇다. 공자의 아버지 공흘은 노나라의 하급 무관이었다. 공자의 모친을 만나기 전에 이미 아내와 자식들이 있었다. 딸이 많고 아들도 하나 있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지적장애자였다.
혼란한 춘추전국 시대에 대가 끊길까봐 노심초사하던 공흘은 70세에 젊은 여자를 맞아들였다. 당시 16세이던 공자의 모친 안징재다. 나이 차이가 무려 54세다. 그리고 공자를 낳았다. 공자가 3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다. 24살 때는 홀어머니도 세상을 떠난다. 공자 역시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성장한다. 그런 근원적 상실감이 공자에게는 진흙이 아니었을까.
이슬람교를 창시한 무하마드에게도 그런 진흙이 있다. 그가 태어나기 몇 주 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무하마드는 유복자다. 어머니는 남편을 잃은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아들을 낳았다. 6살 때는 어머니마저 돌아가셨다. 부모를 잃은 무하마드는 할아버지 집에서 자랐다.
8살 때는 할아버지도 세상을 떠났다. 결국 무하마드는 숙부의 집으로 가야 했다. 상인이던 숙부를 따라 험난한 사막을 횡단하며 자랐다. 그러니 무하마드에게 ‘인간의 죽음’은 어릴 적부터 풀어야 할 커다란 숙제가 아니었을까. 자신의 어깨를 짓누르는 짐이 아니었을까. 그런 진흙이 아니었을까.
불교와 그리스도교, 유교와 이슬람교. 이들 4대 종교 창시자 모두의 성장기에 진흙이 있었다.
나는 그들의 슬픔, 그들의 아픔, 그들의 허무함에서 물음의 싹이 올라왔으리라 본다. ‘죽음이란 뭔가’ ‘태어남이란 뭔가’ ‘삶이란 또 뭔가’ ‘행복이란 과연 뭔가’. 인간의 삶과 존재를 관통하는 직선적 물음들이 거기서 싹을 틔웠을 터이다. 그들은 자연스레 그 물음들을 품지 않았을까. 마치 사자가 소리를 품듯이, 바람이 그물을 품듯이, 연꽃이 진흙을 품듯이 말이다.
진흙에서 연꽃의 대가 올라온다는 붓다의 말. 거기에 가슴을 끄덕인다.
우리는 늘 투덜댄다. 나의 삶은 지뢰밭이라고, 수시로 문제가 터진다고 속상해 한다.
붓다는 그게 아니라고 했다. 그런 진흙이 있기에 우리가 물음을 던지고, 그 물음을 통해서 연꽃이 핀다고 했다. 그러니 일상의 지뢰가 없다면 일상의 물음도 없고, 일상의 물음이 없다면 일상의 연꽃도 없다.
카필라 성터에 바람이 분다. 덩달아 물음이 올라온다.
‘우리가 서 있는 일상은 지뢰의 밭일까, 아니면 연꽃의 밭일까. 어쩌면 우리는 연꽃을 지뢰로 착각하며 살고 있는 건 아닐까. 그윽한 연꽃 향을 화약 냄새로 착각하면서 말이다. ’
붓다는 그게 둘이 아님을 깨치라고 했다. 다시 바람이 분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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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성호 기자>의 글을 원문 그대로 보시려면 아래 링크를 누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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