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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태양/허신행을 읽다

[스크랩] 새로운 문명을 맞이하자

새로운 문명을 맞이하자

-  글 / 허신행 박사(전 농림수산부장관)

 

우리나라 국민은 ‘정情’ ‘한恨’ ‘흥興’을 유난히 많이 가진 것 같다. 정도 많고, 한도 많고, 흥도 많은 민족이 우리라면 자생력의 회복도 여기에서 모색해내야 할 것이다.

아시아몬순 지역의 답작지대에서 옹기종기 수많은 가옥들이 한곳에 밀착되어 살다보니 이웃과 정들기 쉽고 다정다감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늦봄의 모내기로부터 한여름의 김매기와 가을의 추수에 이를 때까지 품앗이로 수십 명의 농부와 주부들이 함께 어울려 정답게 일해왔다. 겨울에는 여자들이 모여 앉아 길쌈을 하고, 남자들은 땔감나무를 수집하거나 볏짚으로 지붕을 이는 등 모두가 그룹일이다. 그런 과정에서 이웃이 사촌형제보다 더 가까워질 정도로 친해진다.

 

서구사회는 넓은 면적의 목축업이 주로 성행하였기 때문에 이웃과 멀리 떨어져서 독립적인 영농을 해온 탓으로 정이 결여된 사회라고 볼 수 있다. 끈끈한 정보다는 냉정한 합리성이 지배하는 사회라고 여겨진다.

 

오늘날 농경사회를 지나 산업사회의 핵가족시대를 맞고 있지만, 우리나라 민족은 도시에서도 거미줄처럼 얽힌 복잡하고 밀착된 인간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가족과 친지는 물론 학연, 지연, 혈연, 그리고 직장 등에 따라 많은 인간관계를 정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물론 친한 사이에 오가는 정이 많다. 다정다감한 사회는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

 

다른 한편, 우리 국민은 한이 많은 민족이라고들 일컫는다. ‘한’ 철학과는 거리가 먼 원한의 한, 한탄의 한이라는 의미의 한이 많다는 것은 결코 좋은 현상이라고 볼 수는 없으나 그런 측면을 부정할 수도 없는 것 같다.

 

역사적으로 헤아리기 힘들 정도의 숱한 외침, 굴절 많은 변화와 정쟁, 조밀한 사회 속에서의 갈등, 민족의 분단과 동족상잔, 권위주의 시대의 억압 등으로 맺힌 한이 참으로 많다. 한 많은 인생, 그들의 한풀이는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분출되고 있다.

 

우리 민족은 또 흥이 많은 민족이다. 몇 사람만 모이면 앉으나 서나 흥을 돋우고 노랫가락을 뽑거나 춤을 춘다. 시골의 정자나무 밑이나 사랑방에서 막걸리 한잔씩을 들고 노래와 춤을 곁들이길 잘 한다. 모내기 때도 노래가 구성지게 흘러야 일이 고된 줄 모르게 잘 된다. 유원지에 가서나 관광버스 속에서까지 마이크를 잡고 노래판을 벌여야 흥을 채울 수 있다. 우리 국민은 기분만 좋으면 일을 잘 한다.

 

우리 국민들에게는 정, 한, 흥만 많은 것이 아니라 희비애락의 감정 고저가 심하게 나타난다. 감정의 변화가 심하다보니 화를 잘 내고, 소리가 높으며, 떠들기 좋아하고, 흥분을 잘 한다.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와 같다고나 할까. 우리 문화를 누군가 ‘냄비문화’라고 일컬은 적이 있다.

 

이런 변화무쌍한 국민성은 주로 다양한 기후풍토에서 기인된 것으로 보인다. 연중 뚜렷하게 구분되는 4계절, 그 가운데에서도 3한4온의 변화가 교차하고, 밤낮의 온도차이가 클 뿐만 아니라 겨울에는 눈이 소복이 쌓이고 여름에는 폭우와 태풍이 몰아친다. 겨울철 찬 바람이 세차게 부는 강원도 산간지방의 체감온도는 섭씨 영하 30도보다 더 낮고, 여름의 대구지방 온도는 40도 안팎이어서 변화의 폭이 70도를 오르내린다.

 

기후뿐만 아니라 지형과 지세도 매우 다양하다. 김제 들판처럼 넓은 평야지대가 있는가 하면 설악산과 지리산 같이 높고 험준한 산악지대가 많아 국토의 65퍼센트가 산지로 둘러싸여 있다. 평야와 높은 산 중간에는 구분도 할 수 없을 만큼의 다양한 지형과 지세가 우리의 삶을 감싸고 돈다. 어디를 가봐도 똑같은 모습의 산이나 들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천태만상의 지형과 지세가 신비롭게 펼쳐진다. 강이나 냇가 그리고 호수 역시 많고 다양하긴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다양한 기후풍토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민족의 심상도 자연히 가변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꽁꽁 얼어붙었던 한겨울이 지나고 따스한 봄이 오면 만물이 소생하듯이 우리 국민도 움츠렸던 마음과 정열을 발산하게 되어 있다. 이것은 자연의 순리이다. 이러한 생동력의 분출은 연약한 측면을 뚫거나 치고 나오게 마련이다. 그것이 4·19와 5·16, 5·18 등의 정치적인 대사건들이요, 춘투로 불리는 숱한 노사분규와 학생데모라고 여겨진다.

여름은 또 얼마나 덥고 습한가. 폭우와 뙤약볕이 번갈아 쏟아진다. 먹구름과 천둥번개, 태풍과 폭우, 다량의 습기, 그래서 여름에는 불쾌지수라는 재미있는 수치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가을이 되면 천고마비에 오곡이 풍성해지고 인심도 부드러워진다. 잔인한 5월과 무더운 7월이 언제 지났는지 까마득하게 잊고 만다. 그러다가 겨울이 오면 다시 움츠러드는 북풍한파가 몰아친다.

 

이런 독특한 기후풍토와 국민성을 가진 나라는 우리나라 외에도 이탈리아가 있다. 비슷한 위도와 3면의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라는 측면에서 이탈리아는 한국과 유사하다. 국가의 크기나 생김새 등에서도 두 나라는 비슷한 데가 많다. 그래서인지 한국인들의 기질이 이탈리아인들과 너무나 흡사하다. 두 나라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대화를 시작하면 5분 이내에 오랜 친구처럼 금방 친해져버린다. 서로가 깜짝 놀랄 정도로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런 시각에서 이탈리인들을 주의깊게 살펴보면, 눈에 띄는 것이 우선 매우 시끄럽다는 점이다. 어디에서나 큰 소리로 떠들고 노래를 부르기 좋아하며 격정적이다. 냉철하면서도 조용하고 합리적인 북부 유럽인들과는 대조적으로 이탈리인들은 지하경제를 선호하고, 작업을 적당히 해치우며, 통계의 정확성을 꺼려 한다. 농수산물 도소매시장의 운영에서도 우리나라와 유사한 점이 너무나 많다. 컴퓨터에 의한 경매방식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농안법 파동과도 관련된 대목이다.

 

그러나 이탈리아인들은 세계를 제패한 대로마 제국을 연상할 것도 없이 뛰어난 용감성, 예술성, 창의성 그리고 단결력을 가지고 있다. 월드컵 축구에서 세 번이나 우승을 하는 진기록만 보아도 무서운 투지력과 조직력을 가진 민족임에 틀림이 없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다양한 국민성 가운데 부정적인 것을 억제하고 이탈리아인들의 선조들처럼 장점을 되살려 우루과이 라운드 이후의 넓은 세계를 향해 전진하는 일이다. 우리 국민에게는 무한한 잠재력이 내재되어 있다. 그것을 폭발시켜 신바람나게 일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각계의 지도자들이 우선 주변사람과 국민들에게 아낌없는 정을 베풀고, 한을 풀어주며, 흥을 돋우어야 할 것이다.

 

위와 같은 기본자세를 가지고 구성원들과 함께, 첫째 세계적으로 넓고 크게 생각하면서 자기 사업적으로 섬세하게 행동해야 할 것이다. 세계적으로 흐르는 변화의 물결은 경제통합, 무한경쟁, 스피드화, 편의화, 다양화, 첨단기술화, 고부가가치화, 고품화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둘째, 장기적인 전망을 우선하여 확실한 방향을 설정하고 나서 단기적인 사업조정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느린 마차를 탈 때에는 바로 옆의 가까운 곳을 오래 살펴도 잘 보이고 어지럽지 않지만, 초고속 비행기를 탈 때에는 멀리 내다보아야 안정감을 찾을 수 있다. 그렇듯이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는 고속화시대에서는 가능한 장기전망이 요구된다. 중앙정부나 지방자치단체는 최소한 100년 계획을 줄기차게 구상하면서 단기사업을 시행해야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셋째, 각계의 지도자들이 먼저 변화되어야 나라가 발전할 것이다. 오늘날처럼 격동하는 전환기에는 지도자들이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국민의 공감대를 형성하며, 신바람나게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지 않으면 사회와 국론이 분열되고 힘이 집중되지 않고 흩어지기 쉽다.

 

넷째, 각계에서 수평적인 팀으로 새 바람을 일으킬 필요가 있다. 과거 새마을운동이 산업사회를 일으키는 데 필요불가결한 정신적인 구심체였다면, 새로운 문명시대에는 모든 구성원들이 자율적으로 참여하는 ‘수평팀’을 통해 힘을 모으고, 아이디어를 개발하며, 조직을 활성화시켜야 할 것이다.

 

수평팀을 모범적으로 운영하여 좋은 성과를 거둔 기업체나 각계의 조직에 대해서는 후한 상을 주고 국민들에게 알려서, 이 시대를 이끌어가는 주역으로 인정하고 기록해둘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 것, 한국적인 것을 많이 개발하여 세계적인 것으로 만들어나가는 꾸준한 노력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상품과 서비스의 개발은 말할 것도 없고, 문화와 철학에 이르기까지 우리 것을 발전시켜 대한민국을 세계의 중심지로 만들어야 한다.

출처 : 용인타임스
글쓴이 : 개마고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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