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깨달음의 길
누가 깨달음의 길을 ‘길 없는 길’이라 말했다. 이는 대단히 흥미로운 표현이다. 인간이 무엇에 대해 알 수 있는 길은 오직 두뇌밖에 없는데, 이 두뇌가 바로 깨달음을 방해하고 있으니 난감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의 두뇌가 만들어낸 경험과 지식 그리고 기억이란 것들이 깨달음을 얼마나 방해하는가에 대해서는 화이트John White의 편저 《깨달음이란 무엇인가》에 실린 크리슈나무르티Jiddu Krishnamurti(1895∼1986)의 대화록을 보면, 실감이 절로 난다.
철학이나 과학 또는 종교 등도 모두가 인간 두뇌활동의 산물이요, 일체의 학문으로부터 획득되는 지식은 모두가 불교에서 말하는 번뇌망상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다. 이런 것들이 얼마나 많았으면, 8만4천 번뇌망상이라 하였을까. 필자가 정리한 소아·대아·무아·진아의 통합체가 참나라고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복잡한 번뇌망상을 하나 더 추가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라고 하는 인식의 주체가 있어서 인식의 대상을 관찰하고, 두뇌활동을 통해 무엇을 알아내며, 그 결과 지식을 쌓는 등의 행위가 일어나는 한, 깨달음의 문은 더욱 굳어져서 열릴 수 없게 된다. 그러니 깨달음의 길이 있을 리 없다.
그런데 깨달음에 대해 불교만큼 많이 그리고 상세히 언급해놓은 종교나 다른 설명서가 없다. 그 가운데에서도 불교의 선가禪家에서 마음을 닦아 ‘참나’를 찾고 깨닫는 과정이라 할까, 길에 대하여 소[牛] 찾기에 비유한, 아주 유명한 십우도十牛圖라는 것이 있어서 참고 삼아 소개하고자 한다.
12세기 초, 중국의 상덕부常德府 양산梁山에 사는 노魯 씨란 성을 가진 곽암廓庵이 지은 제목과 게송偈頌 그리고 그림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물론 곽암 이전과 이후에도 목우도牧牛圖가 없지는 않았던 모양이지만, 일본을 통해 널리 유행된 것은 곽암의 원작이라고 한다.
이에 따르면, 깨달음의 과정을 재미있게 그린 목우도 또는 심우도尋牛圖의 첫 번째 그림은 심우尋牛, 즉 소를 찾아 나서는 과정이다. 성불成佛하여 깨닫기 위해서 참나(한마음·진여·절대자)라고 하는 소를 찾아 나서는 수행자의 천진난만한 모습이다. 거친 들판과 깊은 산 속을 헤매면서 소를 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험한 가시밭길이므로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다. 일찍이 석가모니가 고행苦行을 자청하고 나선 것도 일종의 심우尋牛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깨달음의 두 번째 단계 그림은 견적見跡, 즉 소의 발자국을 찾는 과정이다. 선현先賢들의 수많은 경전經典과 선지식善知識의 가르침에 따라 소의 발자국을 열심히 찾는다. 머리 속에 발자국 모형을 넣고 다니기 때문에 숱한 발자국과 만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발자국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진짜라면 어떤 발자국을 따라가야 할지 알 수가 없다는 데 있다. “조사祖師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이냐?”하는 물음 따위가 바로 이 단계의 탐색인 것이다.
깨달음의 세 번째 단계 그림은 견우見牛, 즉 소를 보는 과정이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소를 찾았으니 얼마나 기쁘겠는가. 흔히들 이 단계에서 소위 “한 소식 했다”라든가 속된 말로 “도道를 깨우쳤다”고 말하기 쉽다.
그런데 애타게 찾던 소를 얼핏 보았으니 깨우친 듯하나, 문제는 소가 있고 그 소를 본 사람이 있는 한,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만물의 근원인 참나가 있고 그것을 본 사람이 있으면, 그것은 의식이 만들어낸 일종의 환영이요, 물거품과 같은 것이다. 깨달은 자가 있고 깨달은 바가 있으면, 즉 주主와 객客이 둘로 나누어져 있어서 의식으로 소를 보고 있는 한, 소를 제대로 본 것이 아니다. 소는 깨닫고자 하는 사람의 의식으로는 볼 수 없는 참나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의 네 번째 단계 그림은 득우得牛, 즉 찾은 소를 놓치지 않기 위해 꽉 붙잡는 모습이다. 소, 즉 참나 또는 한마음을 붙들긴 했지만 야생에서 자란 소라 거칠고 다루기 힘들어서 뛰는 소를 붙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깨달음의 다섯 번째 단계 그림은 목우牧牛, 즉 붙든 소를 길들이는 모습이다. 야생우野生牛를 길들이듯이 수행과 정진을 통해 거친 번뇌망상을 없애고 본래의 한마음으로 돌아가고자 안간힘을 쏟는 단계이다. 마음이 곧 참나라 하여 야생마처럼 살아왔던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다잡기 위해 밤낮으로 참선參禪하며 노력한다.
깨달음의 여섯 번째 단계 그림은 기우귀가騎牛歸家, 즉 길들인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이다. 거친 소를 찾아 길들이기까지 숱한 고생을 하였으니 온순한 소의 잔등에 올라 피리라도 불면서 한가히 목가적인 자세로 귀가하는 모습은 도인처럼 의젓하고 여유롭다.
깨달음의 일곱 번째 단계 그림은 망우존인忘牛存人, 즉 집에 돌아가 소를 잊고 사람만 남는 모습이다. 집에 돌아와보니, 소와 목동은 둘이 아니라 하나, 즉 대아大我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그토록 찾았던 소는 사라져 없어지고, 자신만이 깨달은 양 혼자 고요하게 앉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처럼 지금껏 둘로 분리되었던 소는 자취를 감췄지만, 깨달은 자는 여전히 신선한 모습으로 성현처럼 남게 된 것이다.
깨달음의 여덟 번째 단계 그림은 인우구망人牛俱忘, 즉 소와 자기 자신 모두를 잊는 과정이다. 소나 사람이나 모두가 우주의 근원인 본체로부터 생긴 것, 소가 없어지는데 사람만 남을 이유가 없다는 것까지 깨닫게 된다. 우주의 만유가 비었으므로 깨닫고자 수행하는 자도 당연히 비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는 소도, 깨달은 자도, 만유도 없다. 모든 것이 허공처럼 텅 비어버린, 꿈과 같은 것이라는 깨달음에 이른다.
깨달음의 아홉 번째 단계 그림은 반본환원返本環源, 즉 본래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과정이다. ‘나’라고 하는 소아적인 자아의식, 즉 에고가 사라지고 나면, 자기 자신을 포함한 삼라만상은 이전과 다름없이 있는 그대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자연현상은 어느 것 하나 달라진 것이 없으나, 그것을 보는 나는 분명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나란 있되 있는 것이 아니요, 하되 함이 없이 할 뿐이다.
깨달음의 열 번째 단계, 즉 마지막 그림은 입전수수立廛垂手, 즉 시중으로 들어가 중생을 돕는 과정이다.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온갖 욕심과 고뇌로 살던 이전의 이기주의적 자아自我를 훌훌 털고 벗어나 너와 나가 없는 한몸 한마음의 자비심으로 중생을 제도하는 보살행이 시현된다. 이 단계에서는 오로지 이타행利他行의 선행이 베풀어질 뿐이다.
불교에서는 또 수행자들이 깨달음의 길[無道之道·無門之門]을 향해 걸어야만 할 52단계의 수행과정을 제시하고 있다. 십신十信→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廻向→십지十地→무구지無垢地→묘각지妙覺地가 바로 52단계의 길고도 험한 수행의 행로이다.
십신十信이란 열 가지의 믿음을 내야 하는 것으로서 신심信心·염심念心·정진심精進心·혜심慧心·정심定心·불퇴심不退心·회향심廻向心·호법심護法心·계심戒心·원심願心을 가리킨다.
십주十住란 불타佛陀에 안주하는 과정으로서 발심주發心住·치지주治地住·수행주修行住·생귀주生貴住·구족방편주具足方便住·정심주正心住·불퇴주不退住·동진주童眞住·법왕자주法王子住·관정주灌頂住를 포함한다.
십행十行은 관정주에서 진정한 불자佛子가 되었음을 인가받아 확인한 뒤, 이타행利他行을 완수코자 정진하는 지위로서 환희행歡喜行·요익행饒益行·무진한행無瞋恨行·무진행無盡行·이치란행離癡亂行·선현행善現行·무착행無着行·존중행尊重行·선법행善法行·진실행眞實行을 말한다.
십회향十廻向은 십행에서 닦은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의 행行을 중생에게 돌려주는 공덕으로 불과佛果를 향해 나아가는 단계, 즉 구호일체중생이상회향救護一切衆生離相廻向·불괴회향不壞廻向·등일체제불회향等一切諸佛廻向·지일체처회향至一切處廻向·무진공덕장회향無盡功德藏廻向·입일체평등선근회향入一切平等善根廻向·등수순일체중생회향等隨順一切衆生廻向·진여상회향眞如相廻向·무박무착해탈회향無縛無着解脫廻向·입법계무량회향立法界無量廻向으로 짜여 있다.
십지十地는 보살이 성자聖者가 되어 불성佛性을 보고 불지佛智를 길러 중생을 제도하는 다양한 지위로서 환희지歡喜地·이구지離垢地·발광지發光地·염혜지焰慧地·난승지難勝地·현전지現前地·원행지遠行地·부동지不動地·선혜지善慧地·법운지法雲地 등 새로운 세계를 체험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마지막 2단계인 무구지無垢地는 등각等覺의 보살, 묘각지妙覺地는 보살 수행과정의 최후 자리로서 모든 번뇌를 끊고 지혜가 원만하게 갖춰진 자리, 즉 구극究極의 불타佛陀의 자리, 또는 불가사의절묘不可思議絶妙한 무상정각無上正覺의 자리를 말한다.
이처럼 수행하여 깨달음의 길로 들어선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그렇다고 에베레스트 산 등정에 오르는 것처럼 어렵게만 생각할 것도 아니다. 그것은 등산과 같은 육체적 훈련이 아니라 마음의 공부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깨달을 것인가? 아함경阿含經에서는 깨달음의 대상을 12연기설十二緣起說에 두고 있다. 즉, 마음을 가진 범부凡夫로서의 생존이 열두 조건에 의해 성립된다고 보는 것이다. 12연기란 무명無明·행行·식識·명색名色·육처六處(혹은 六入)·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사老死를 가리킨다.
범부에게 괴로움이 일어난 까닭을 열두 지분으로 나누어 ‘연하여 함께 올라온’ 순서별로 종합한 내용이 12연기설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그것이 일어남으로 저것이 일어난다. 즉, 무명無明에 연하여 결합[行]이 있고, 결합에 연하여 식별[識]이 생기고, 식별에 연하여 명색名色이 있고, 명색에 연하여 육처六處가 있고, 육처를 연하여 충돌[觸]이 일어나고, 충돌을 연하여 느낌[受]이 있고, 느낌을 연하여 갈애[愛]가 생기고, 갈애를 연하여 됨[取]이 있고, 됨을 연하여 남[有]이 있고, 남을 연하여 죽음[老死]이 있다고 했다.
인간의 고통은 근원적으로 무명無明, 즉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것이라 본다. 여기에서 무명이란 불교의 진리, 즉 사제四諦에 대한 무지無知를 말하는데, 이것은 갈애渴愛와 표리의 관계이다.
사제四諦는 고성제苦聖諦·고집성제苦集聖諦·고멸성제苦滅聖諦·고멸도성제苦滅道聖諦인데, 이를 약해서 고제苦諦·집제集諦·멸제滅諦·도제道諦라 한다. 이것을 풀어 쓰면, 미혹迷惑의 이 세상은 모두가 고통이며, 고통의 원인은 집착이고, 그 집착을 끊음으로써 고통을 없애는[滅] 것이 궁극적인 이상경理想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고통 없는 열반경에 도달하기 위해 팔정도八正道의 옳은 수행의 길[道]을 따라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그러니까 무명無明에서 벗어나는 것이 나머지 11연기를 없애는 것이고, 이는 곧 모든 고통의 근원을 멸滅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무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4제 12연기를 모르고서는 안되기 때문에, 이들이 모두 깨달음의 대상이다.
팔정도八正道는 바른 소견[正見]·바른 생각[正思惟]·바른 말[正語]·바른 행동[正業]·바른 생활[正命]·바른 노력[正精進]·바른 믿음[正念]·바른 안정[正定]을 말한다.
불교계에서 널리 읽힌 법화경法華經의 수많은 설교는 중생 구제를 위한 형식과 방법들로 가득 차 있다. 석가모니는 듣는 사람의 수준과 근기에 따라 다양한 방법으로 설법하였다. 그 가운데에는 인연설화因緣說話, 악마설화惡魔說話, 범천설화梵天說話, 비유설화譬喩說話가 포함된다.
비유설화에는 일곱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 이야기는 불난 집의 아이들에 관한 것이다. 어느날 장자長子라는 사람의 큰 집에 불이 났다. 아이들은 불 난 사실도 모르거니와 불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에 대해서도 아는 바 없이 그저 뛰놀기에만 정신을 팔고 있었다.
장자는 이들을 구하기 위한 방편으로 위험에 처한 아이들에게 염소와 사슴 그리고 소가 끄는 수레를 제각각 줄 테니 문 밖으로 나오라고 외쳤다. 화재의 위험에서 안전하게 벗어난 아이들에게 약속보다 더 좋은 흰 소의 화려한 큰 수레를 주었다.
여기에서 장자는 석가모니요, 아이들은 고통을 받고 사는 중생이며, 불은 온갖 고통을 가리키고, 염소가 끄는 수레는 성문승聲聞乘, 사슴이 끄는 수레는 연각승緣覺乘 그리고 소가 끄는 수레는 보살승菩薩乘에 비유된 것이다. 흰 소가 끄는 수레는 일불승一佛乘이라 한다.
성문승은 고집멸도苦集滅道의 네 가지를 듣고 익혀서 수행하는 사람들이고, 연각승은 열두 인연관因緣觀을 통하여 수행하는 사람들인데, 이 두 부류를 소승小乘이라 한다. 보살승은 육바라밀六波羅密을 통하여 수행하는 사람들로서 대승大乘이라고도 말한다.
어리석은 중생들의 관심과 취향에 따라 세 가지 중 어느 수행이라도 시켜 일단 고해苦海에서 벗어나게 하고, 고난의 화택火宅을 빠져나오면, 흰 소가 끄는 화려한 큰 수레를 준다. 이 수레는 다름 아닌 일승一乘 또는 불승佛乘을 가리킨다. 바로 부처가 되는 것이다.
이들 삼승三乘은 방편이고, 모두가 한정된 틀을 벗어나 일불승一佛乘, 즉 부처로 귀의하여 근본적으로 깨닫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회삼귀일會三歸一이 법화경의 기본정신이다.
유명한 화엄경華嚴經의 기본사상은 해탈解脫이다. 부사의不思議한 해탈의 이상봉理想峯을 향하여 끈기 있게 수행하는 것이 보현행원普賢行願이다. 행원에는 열 가지 큰 원[十大願]이 있다. 모든 중생을 해탈케 하여 불국토佛國土를 이루는 것이 목적이다. 화엄경에서는 일즉일체一卽一切요, 일성일체성一成一切成이라 하여 초발심시 변성정각初發心時便成正覺이라 했다.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진실을 깨달아 참나를 찾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체 중생을 건지겠다고 하는 마음가짐으로 이미 구경究境의 열반涅槃에 이르렀다고 보는 것이다.
임제록臨濟錄에서는 이같은 수행이나 설법이 남아 있어 그에 매달리고 있는 한, 깨달음은 아직도 멀었다고 말한다. 어느 수자修者가 임제에게 물었다.
“스님께서는 뉘 집의 곡조曲調를 부르시며, 종풍宗風은 누구를 이었습니까?”
임제는 대답했다.
“내가 황벽 스님에게 세 번 묻고 세 번 얻어 맞았다.”
무슨 말인지 몰라 다시 물으려 하니까, 임제는 갑자기 큰 소리를 치면서 죽비로 내려치고 일렀다.
“허공에다 말뚝을 박아서는 안된다.”
옆에 있던 좌주座主가 다시 물었다.
“삼승십이분교三乘十二分敎인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 어찌 불성佛性을 밝힌 것이 아니겠습니까?”
임제는 소리 높여 말했다.
“무엇! 불성이라고? 나에게는 그런 것 소용 없다. 나는 무명 망상無明妄想의 거친 풀 그대로를 불성으로 알아서 무명번뇌無明煩惱의 거친 풀을 한번도 벤 적이 없다.”
깨닫고 보면, 어떤 것도 불성을 갖지 않은 것은 없으므로, 무명망상을 없애기 위해 별도로 수행하고 경전에 매달릴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선문답禪問答식 설교이다.
수행도 한 생각에 달렸다. 임제는 “마음이 일어나면 모든 것이 일어나고, 마음이 없어지면 모든 것이 없어진다[心生 種種法生 心滅 種種法滅]”고 말했다. “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면 모든 것은 허물을 갖지 않는다[一心不生 萬法無咎]”고도 했다. 수행이나 깨달음도 마찬가지다.
무심無心 그대로가 깨달음이요, 해탈 열반이다. 고로, 길 없는 길을 따라 무심無心에 이르면, 거기가 바로 깨달음의 종착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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