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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의 힘/디지털 史草(사초)

"이갑수 일병, 김용수 일병, 어서 오십시오!"

"이갑수 일병, 김용수 일병, 어서 오십시오!"

 

육이오전쟁 중 개마고원의 장진호 지역에서 중공군과 싸우다 전사한 이갑수 일병과 김용수 일병 등 12명의 국군이 62년만에 돌아왔다.

당시 우리 아버지는 징집 대상자였지만 장티푸스에 걸리는 바람에 가지 못하고, 당숙은 소위로 참전했다가 전투 중 사망했다.

아버지가 만일 장티푸스에 걸리지 않았다면 당연히 전선에 투입됐을 것이고, 시기적으로 보아 우리 큰형 외에 나머지 4형제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큰형은 1950년 9월생이다. 이갑수 일병이나 김용수 일병, 함께 오신 성명불상의 열 분이 모두 아버지 또래시다보니 기사 보면서 울컥하는 감정이 생긴다.

 

<조선일보로 가서 이 기사 전문과 해설 보기>

 

17살 어린 나이에 입대한 김용수 일병과 아내와 아들과 딸을 두고 입대하여 카투사가 되었다가 전사하신 이갑수 일병께서 그 전우들과 함께 오셨으니, 몇 가지 점검한다.

 

- 장진호(長津湖) 전투는 미 해병 1사단 및 유엔군과 중공군 제9병단(휘하 사단 7개) 간의 전투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은 4만 여 명이 전사하고, 미 해병과 유엔군은 2천 500명이 전사했다.

- 장진호는 함경남도 개마고원 내 해발 1000미터 고지에 있는 호수다. 따라서 엄청나게 추웠다. 낮에는 영하 20도, 밤에는 32도까지 내려갔다고 한다.

- 전투 기간은 1950년 11월 26일부터 12월 13일까지 17일간 벌어졌다.

- 김용수 일병과 이갑수 일병 등 한국군은 지원병력인 카투사였다. 카투사는 일본 후지산에 훈련 캠프를 두고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미군은 일본이 만든 한국지도를 쓰고 있을만큼 한국 정보에 어두웠다. 미군은 장진이란 지명을 일본식 발음 Chosin으로 알고 있었다.

-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의 남하를 상당 기간 저지함으로써 20만 명의 흥남철수 작전이 성공할 수 있게 되었다.

- 미국 전사에서는 진주만 사건 이후 최대의 패배로 기록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여러 가지 전투 기록서가 출간되고, 전함에 장진(Chosin)이란 지명을 붙였다. 당시 살아남은 미군 4000명은 'Chosin Few(장진호 전투에서 살아남은 몇 안되는 전우란 뜻)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 장진호 전투를 다룬 3D 영화가 2012년 내에 개봉된다.

 

따라서 이렇게 적는다.

1. 개마고원의 장진호는 어떤 호수인가?

2. 장진호 전투는 왜 일어났나?

   - 지휘관, 병력, 전사상자, 무기 등

   - 13일간의 전투 날짜별 상황

3. 흥남철수작전

4. 장진호 전투에 관련된 영상 자료

 

1. 개마고원의 장진호는 어떤 호수인가?

함경남도 장진군의 장진(長津)이란 물줄기를 막아만든 인공호수다.

장진은 개마고원 내에 있기 때문에 겨울철 날씨가 대단히 춥다. 영하 섭씨 30도를 오르내린다. 장진호 전투는 혹한기에 이뤄져 총상에 의한 사망이나 부상 못지 않게 동상으로 사망하거나 부상한 사람이 많다.

 

2. 장진호 전투는 왜 일어났나?

  미군 : 미해병1사단(병력 1만 7000명, 미 10군단 휘하)

           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 소장

           미해병1사단장 스미스 소장

           - 사단 군수참모 보좌관 아더 챠이데스타 중령

           - 제1해병연대 3대대장 리지 중령          

           - 드라이스데일 특수임무부대장 드라이스데일 중령

           미 7 보병사단 부사단장 헨리 호즈 준장

 유엔군 : 3000명(아마 한국군 전사자는 이 중 일원이었을 것이다)

              영국 코만도부대

 중공군 :제9병단(휘하 사단 7개, 병력 12만 명. 인민군 지원병력이 있었을 것이다)

 한국군 : 하갈우리 방어를 맡은 제1해병연대 3대대 휘하에 소규모 한국군이 있었다. 10명 이내로 구성된 선발대나 파견대일 것으로 추정. 미 10군단과 함께 동부지역을 맡은 한국군은 1군단이었다. 따라서 이갑수 일병과 김용수 일병 등도 1군단 휘하 카투사 요원이었다.

 

38선을 돌파하여 북진하던 유엔군은 맥아더 사령관의 명령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갔다. 이때 유엔군의 가장 큰 관심사는 중공군이 개입할 것이냐, 안할 것이냐였다. 정보기관에서는 중공군이 개입할 것이라는 보고를 수차례 올렸다. 하지만 증거가 부족했다. 맥아더는 중공군의 개입이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런 가운데 미해병 1사단은 북한의 임시수도인 강계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중공군 제9병단이 몰래 장진호 인근에 병력 12만 명을 매복시켜 놓고 있었다. 이때까지도 중공군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따라서 장진호 전투는 강계를 점령하러 안심하고 올라가던 미 해병1사단이 정보 판단 실패로 중공군 9병단의 매복에 걸려 전투를 벌이고, 중공군 30만 명이 이미 참전했으며, 따라서 불가항력이라는 걸 깨달은 뒤

허겁지겁 후퇴, 흥남까지 철수한 것을 말한다. 전사자와 부상자 수로 보면 중공군이 몇 배의 피해를 보았지만 결과적으로 중공군은 미군과 유엔군을 몰아낸 셈이고, 미군과 유엔군은 북한 지역에서 완전히 쫓겨나온 셈이다.

 

 

- 날짜별 전투 상황

 

10월 26일 미국 1 해병사단은 유엔군의 북진에 맞추어 서부전선 부대와 접촉을 유지하라는 명령을 받고 장진호 방면 진출을 위해 원산에 상륙하였다.

이에 따라 처음 동부에 있던 미국 10군단과 미국 1 해병사단은 장진호쪽으로 북상한다. 미국 1 해병사단은 김일성의 조선 정부가 도피중인 임시 수도 강계를 점령하기 위해 장진호쪽으로 북진하게 된다.

 

11월 2일 함흥 북방 수동 일대에서 미국 1 해병사단 7연대 1대대와 북한의 수도 평양에서부터 후퇴한 인민군 344전차대대 잔존 병력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중 일부 중공군 포로가 발견되어 중공군이 육이오전쟁에 개입하고 있다는 첩보가 사실로 확인되었다. 당시 동경의 극동 사령부 (FEC, Far East Command)는 CIA와 기타 정보기관의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압록강에서 160km 후방인 수동에서 발견된 중공군은 소수의 지원병일 것이라고 오판하고 정보참모 윌로비 (Charles A. Willoughby) 소장을 통해 11월 3일 16,500명에서 34,000명 가량의 중공군이 북한에 들어와 있다고 발표하였다.

하지만 중공군은 그 시점에서 제 9병단의 12개 사단과 제 13병단의 18개 사단, 대략 30만명이 이미 북한에 들어와 있었다. 제 7연대는 수동 전투 이후 진흥리까지 진출하는데 꼬박 닷새를 보냈고, 3,000 명의 연대 병력 중 전사 50명, 부상 200명의 피해를 입었고 중공군은 1,500명이 전사한 걸로 파악하고 있었다.

 

11월 7일 ~ 11월 26일 7연대 병력은 별다른 전투없이 11월 7일 황초령 문턱에서부터 15일에는 장진호 남단 하갈우리를 거쳐, 25일에 장진호 서편 유담리에 진출하였다.

26일에 7연대는 장진호를 중심으로 서쪽, 5연대는 하갈우리 북방, 1연대는 후방을 담당하는 형태로 배치되었다. 이 기간 동안 스미스 사단장은 하갈우리에 보급품을 비축과 야전활주로 건설을 지시하였다.

한편, 서부전선에서 중국은 11월 24일에 제 4야전군 예하 13 병단(약 18만명)과 제 3야전군 예하 9병단(12만명)을 미 8군 전면과 미 10군단 1 해병사단 전면에 배치하였고 11월 25일에는 미 8군의 우측을 공격하여 한국군 2군단이 붕괴될 위기에 처하였다. 또한 미 2 보병사단도 공격을 받아 당일에만 4,000 여명의 병력과 사단 포병장비 대부분을 잃었다.

 

11월 27일 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의 명령으로 해병 1사단은 당일부터 5연대를 주공으로 포위기동의 북쪽 날개로써 미 8군을 포위하고 있던 중국군을 격퇴하고 미 8군과 함께 낭림산맥 서쪽으로 공격할 예정이었으나 계획과 달리 포위작전의 방어부대인 미 8군이 중공군의 공격으로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중공군은 9병단 8개 사단 약 6만여 명의 병력을 장진호에 집결시켰다. 이중 3개 사단은 유담리에 대한 공격을 준비 중이었고 1개 사단(80사단)은 하갈우리 포위를 위해 해병 1사단의 우측 방어를 담당하고 있던 미 7보병사단 31연대전투단에 대한 공격을 준비 중이었다. 당일 연합군 병력은 해병과 해군위생병 13,500명과 육군 4,500명에 불과하였다.

 

27일 밤, 중공군 제79 및 제89사단은 유담리에 대하여 공격을 개시하고 이 공격으로 인해 미국 1 해병사단 7연대 E중대와 중공군 제 79사단 235연대가 서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밤 11시경부터 중공군의 공격이 시작되었지만 장진호 동안에 산재해 있던 연대 산하 3개대대는 유무선 통신이 전혀 연결되지 않았아 제각기 중공군과 맞서야 했으며 해병대와 서로 협조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 공격으로 32연대 1대대, 후동 지휘소의 제31연대 전차중대, 제31연대 3대대, 그리고 제57야전포병대대가 큰 피해를 당했다.

 

11월 27일-28일 중공군은 27일 밤부터 28일까지 미 해병 16개 소총중대 가운데 3개 중대를 격멸하고 많은 고지를 탈취하였다.

이틀에 걸친 공격으로 중공군은 3개 사단(79, 89, 59사단)이 미국 1 해병사단을 세 개의 조각으로 분산시켜 각 부대를 유담리, 하갈우리, 고토리로 각각을 고립시겼으며 부대 간의 연결도로도 차단하였다.

제5해병연대와 제7연대는 신속히 방어로 전환하여 병력을 절약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여 해병 5연대 2대대는 오후부터 철수를 개시하여 밤8시에는 서남쪽 산으로 철수를 완료하고, 좌는 제7해병연대 3대대, 우는 제5해병연대 3대대와 연결하여 진지 편성을 마쳤으나 중공군 제58사단이 미 해병 1사단과 보병 7 사단의 사령부가 위치해있고 주요 보급기지 역할을 하고 있는 하갈우리를 포위하고 유담리, 고토리와의 연결을 차단하여 포위된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한편, 이틀에 걸친 공격으로 중공군 제79, 89사단은 전력을 재편성중이어서 미 해병 5, 7연대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실시할 능력이 없었다.

 

에드워드 알몬드 미 제 10군단장은 이날 하갈우리의 미 사단사령부와 장진호 동안에 위치한 31연대전투단의 맥클린 대령을 방문하여 한반도 북부에 중공군 2개 사단은 존재하지 않으며 전날 공격한 부대는 패잔병들이므로 적에게 빼앗긴 고지를 탈환하고 북쪽을 향한 공격을 재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알몬드는 흥남으로 돌아오는 도중 동경에서 열리는 전쟁대책회의에 참석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 회의에서도 10군단은 계속 진격해야 한다는 의견을 계속 피력하였으나 다음날 새벽에 끝난 회의에서 10군단은 함흥-흥남지역으로 병력을 집중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극동사령부도 중공군의 개입을 워싱턴에 보고하였고 워싱턴도 공세에서 수세로 전환하려는 맥아더 사령부의 계획을 승인하였다. 연합군 사령부 일부는 미 8군이 계속 후퇴함에 따라 흥남에서 미 10군단을 철수시키는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11월 28일 27일부터 공격을 시작한 중공군은 28일 자정무렵부터 중공군 80사단의 예하 부대로 새로운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 전투로 연대장이 포로로 잡혀 전사하고 페이스 중령이 새로운 지휘관이 되었다.

10군단은 이른 아침에 해병 1사단 스미스 소장에게 해병 1개 연대를 유담리에서 하갈우리로 이동시켜 페이스 부대를 구출하고 하갈우리-고토리 간의 도로를 개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오후 8시 27분 기준으로 장진호 지역의 모든 병력은 스미스 소장의 작전통제하에 두게 하였다. 미 7 보병사단 부사단장이 헨리 호즈 준장도 스미스 소장에게 구조요청을 보냈지만 제5, 제7 해병연대는 중공군 3개 사단에 의해 유담리에서 포위 고립되어 있었으며 하갈우리에는 고토리까지의 주보급로를 개통할 병력은 물론 하갈우리 방어에도 병력이 부족하였다. 알몬드 장군은 아직 장진호의 전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스미스 소장은 호즈 준장에게 페이스 부대는 병력을 모아 하갈우리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갈우리 방어는 제1해병연대 3대대가 맡고 있었다. 하갈우리에는 육군, 해군, 해병대, 한국군 등 58개 부대 3,913명이 있었는데 대부분이 10명 이하로 구성된 선발대나 파견대였기 때문에 통합 지휘가 필요하여 이날 오후 3시 경에 3대대장이던 리지 중령이 하갈우리지역 방어작전의 통합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하갈우리 방어 전면은 약 2,200m다. 하갈우리 방어를 위해 제11포병연대의 2대대 D포대가 지원하였다.

남서면 전투는 H중대와 I중대가 중요 전면을 담당하고 있었다. 밤 10시부터 시작된 공격으로 0시 경에는 중공군 172연대가 H중대 전면을 돌파하고 사단장 숙소까지 기관총 사격을 받았다.

0시 30분경에 공병과 운전병으로 편성된 약 50명의 예비대가 역습을 감행하여 일부지역을 회복하고 저지진지를 점령했다. I중대는 진지강화를 한 덕분에 돌파는 당하지 않고 아침6시 30분에 주저항선을 회복했다.
동부고지(이스트 힐) 전투는 제1해병연대 G중대가 방어할 예정이었으나 고토리에서 하갈우리로 들어가다가 중국군의 강력한 공격 때문에 좌절되었다. 제10전투공병대대 D중대를 주축으로 방어를 하였으나 29일 새벽 2시부터 시작된 공격으로 미 제10군단 사령부 경계부대인 한국군 1개 소대를 돌파한 뒤 중국군은 하갈우리 방어진지 관측이 가능한 동부고지에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였다.
포병과 박격포를 동원한 화력 지원으로 중공군의 공격을 막아내었으며 이 전투 와중에도 방어진지 내에서는 활주로 공사가 계속되고 되었다.

 

11월 29일 하갈우리는 2개 중대 병력의 규모가 방어하고 있었으며 동부고지는 3개 소대가 겨우 진지를 유지하면서 중공군과 대치중이었다.

 

하갈우리 방어를 위해 오전9시 45분, 전차 29대와 일반 차량 141대 등 다수의 차량을 보유한 드라이스데일 특수임무부대가 남쪽 고토리로부터 북쪽 하갈우리를 향해 진격을 개시했다. 매복 중인 중공군 제 58사단의 강력한 저항으로 부대는 공격개시 후 4시간 동안 겨우 4km밖에 전진할 수 없었다.

 

오후 1시 50분, 눈보라와 강풍의 악천후 속에서 부대는 F4U 코르세어기 2대의 엄호 하에 전차부대를 선두로 공격을 재개했다.

오후 4시 15분, 부대는 고토리 북방 6.5km지점에서 도로 유실과 노면 상의 탄흔 등의 장애로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 부대장은 스미드 사단장에게 보고하였으나 증원군없이는 하갈우리 방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스미스 사단장은 전진을 계속하라고 명령했다. 극심한 전투 속에 드라이스데일 중령과 부관이 부상을 당했고 종대 중반에 위치한 탄약차량이 공격을 받았다. 이 화재로 인하여 도로가 폐쇄되었고 부대의 절반 가량이 후방에 고립되었다.

 

고립된 후방부대는 영국 코만도부대원 일부, 제31연대 B중대의 대부분, 그리고 사단 사령부 및 보급정비부대의 주력이었다. 최고 선임자인 사단 군수참모 보좌관인 아더 챠이데스타 중령이 차량종대에게 고토리로 돌아갈 것을 명령했으나 고토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그룹의 전차와 트럭을 제외하고는 4개의 그룹으로 분산되어 방어진지를 구축해야 했다.

다행히 후방 2개 그룹은 다음날 새벽 2시 30분 경에 고토리로 귀환하였으나 전방의 2개 그룹은 중공군에 항복하였다.

선두 부대는 후속부대가 포위된 지 모르고 계속 전진하여 29일 저녁7시 15분 하갈우리에 도착하였다. 하갈우리에 약 300명의 보병과 100명의 전차병이 증강됨으로써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을 수 있었으나 드라이스델 특수임무부대는 전투력의 3분의 1을 상실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날은 드라이스데일부대가 하갈우리 남쪽에서 교전한 것 외에 큰 전투는 없었으며 중공군 제58, 제59사단의 일부가 다음날인 30일의 하갈우리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11월 30일 오전 8시에 미군이 소대병력과 배속된 공병 2개 소대로써 중공군이 점령한 동부고지를 공격했지만 큰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밤 0시부터는 중공군이 전날보다 강력한 화력과 인원으로 남쪽의 I중대정면과 동부고지의 G중대 정면을 공격하였다. I중대는 비행장을 직접 방어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뢰, 철조망, 조밀한 화망 구성으로 가장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어 많은 사상자를 내고 후퇴하였다.

동부고지에 위치한 G중대는 중공군의 공격으로 중대장이 부상당하였으나 12월 1일 새벽에 영국 코만도부대를 동부고지에 투입하여 역습을 감행 아침 9시경에는 전날의 진지를 회복하였다. 11월 28일부터 시작된 하갈우리 공격으로 양측은 미군 전사상자 315명, 중공군 전사상자 8,500여 명 가량으로 추정된다.

 

장진호 서쪽의 160Km 지점에서는 미 8군단 보병 제2 사단이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후퇴하고 있었다. 미 8군단의 퇴각과 미 해병사단의 위기로 인해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가 원자폭탄을 쓸 수 있게 허락할 수도 있다고 말하였다. 새로운 전황보고를 받은 10군단은 이날 오후 7시 30분 군단을 함흥-흥남지역으로 집결하고 제1해병사단은 먼저 하갈우리-수동간의 도로를 확보하면서 하갈우리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사단은 제5해병연대가 유담리 방어를 담당하고 제7 해병연대는 하갈우리까지의 도로를 개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해병 7연대와 5연대는 하갈우리로의 철수를 위해 병력을 재배치하였다.

 

 

12월 1일 이날 아침, 미 해병사단은 제5해병연대 3대대를 전위부대로 해서 제 5, 7 해병연대를 유담리-하갈우리 간의 도로를 경유하여 신속하게 하갈우리로 전진하도록 명령하였다. 오전 8시부터 해병 5연대 3대대를 시작으로 철수를 시작하였다.

 

 오전 9시에는 해병 7 연대 3대대는 도로상의 주력부대가 1542고지의 동쪽을 통과할 때까지 엄호하기 위해 1419고지, 1542고지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정상을 정복하지 못하고 그 동쪽 경사면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중공군 제79사단 235연대의 4개 대대도 이날 아침부터 다음 날 새벽에 걸쳐서 1542고지의 동쪽 경사면의 제7해병연대 3대대에 대하여 공격을 가했다. 이 공격으로 G와 I중대의 병력은 200명 남짓으로 줄어들었다. 중공군은 12월 1일 심야부터 새벽까지 철수 부대와 전위부대인 제5해병연대 3연대에 대해서도 맹렬한 공격을 가해 I중대의 병력이 20명밖에 남지 않을 정도로 타격을 주었다.
- 제5 해병연대 1대대가 북쪽을 향해 진지를 점령하고 유담리분지와 장진호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밤 9시 경부터 중공군 소수병력에 의한 침투는 밤새도록 지속되었다. 대대는 2일 정오가 지나서 진지를 철수하여 주력종대의 좌측방을 엄호하는 임무를 맡았다.


제7해병연대 1대대는 영하 31도의 혹한과 적설을 뚫고 밤 9시에 1419고지로 출발했다. 이때, 1대대는 미군으로는 드물게 야간 산악행군을 감행하여 중공군의 저항을 받지 않았다.제 1대대는 1520고지 동쪽 경사면에서 중공군 약 1개 소대를 격멸하고 12월 2일 새벽 3시 경에 재편성을 완료하였다. 부대를 정지시키자마자 피로에 지친 병들은 그대로 눈 위에 쓰러져 추위도 적탄도 아랑곳 없이 잠을 자려고 하여 장교와 부사관들은 이들을 깨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갈우리의 야전활주로가 완성되어 부상자에 대한 후송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중공군은 12월 1일 자정무렵부터 공격을 개시하여 31연대 3대대의 방어선을 돌파하였다. 오전 9시 경에 가진 연대 참모들과의 회의에서 페이스 중령은 약 30대의 트럭과 3,000여 명의 병력을 하갈우리로 철수시키기로 결심하고 제 1해병단의 근접항공지원에 맞춰 오후 1시 경에 바탕으로 하갈우리로 출발하였다.

출발과 동시에 도로 양편에 위치한 중공군의 사격을 받았고 항공지원을 한 코르세어기가 네이팜탄을 너무 빨리 터트려 아군 행렬 내에서 폭발하였다. 이로 인해 부대의 전술적 통제가 무너지고 퇴각 도중에 밤이 되어 항공지원이 끊기자 페이스 중령을 포함한 부대원 대부분이 사살당했다. 육군이 아닌 해병 전방 항공통제관인 스탬포드 대위가 남은 병력 1000여 명을 인솔하여 하갈우리에 간신히 도착하였다.


12월 2일 새벽 6시경, 해병 7연대 1대대는 5일동안 고립되어 있던 F중대 구출을 위해 1653고지(덕동산)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여 F중대와 합류에 성공하였다. F중대는 5일동안 전사 26명, 실종 3명, 부상 89명의 총 118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중대 장교의 7명 중 6명이 부상을 입고 사병 전원이 동상과 설사로 고통을 겪었다.

 

해병 5연대 2대대는 1276고지를 중심으로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주력이 통과한 후에는 그 후위가 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이날 0시경부터 중공군은 1276고지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해병 좌측 1개 소대가 포위되기도 했으나 전투기의 야간 근접지원으로 정오까지 중공군과 능선 쟁탈전을 되풀이하면서 차량종대의 통과를 엄호했다. 이후 대대는 코르세어 전폭기의 엄호를 받으면서 후위로 출발했다.

도로를 통해 후퇴하는 부대 중 해병포병은 3개 대대(제1, 3, 4대대)로서 합계 48문, 차량 400~500대였다. 중공군은 주요 고지를 점령한 미군과 미 항공단의 공중지원으로 도로 주변에서 소규모 공격에 주력하였다. 이날 밤에도 포병 제3대대를 공격하여 105mm포 1문과 차량 여러 대를 파괴했다.

12월 3일 전선에 눈이 내려 약 13cm의 적설량을 기록하였다. 이날 아침 해병 7연대 1대대는 덕동고개의 동쪽 고지에 위치한 중공군 1개 대대를 공격하여 오전 10시 30분 경에 진지를 점령하였다.

오후1시, 해병 5연대 3대대는 덕동고개에 도착하여 해병 7연대 1대대와 합류했다.

11월 30일부터 시작된 작전으로 전위대대는 약 56%의 병력 손실을 잃었다. 덕동고개에서 하갈우리까지는 항공지원단의 엄호를 받으며 해병 7연대 1대대를 선두로 하여 철수하였다. 저녁 8시 경에 선두부대가 하갈우리에 도착하였다.

 

 

 

12월 4일 맨 후위인 해병 7연대 3대대가 하갈우리진지에 도착 완료한 것은 이날 오후 2시 경이다. 해병대가 유담리에서 하갈우리까지 약 22km를 돌파하는데 선두는 59시간, 최후미는 77시간이 소요되었다. 한 시간에 약 286m 내지 370m, 즉 1km를 전진하는데 평균 2시간 40분에서 3시간 30분이 걸린 셈이 된다.

부상자는 약 1500명(이중 약 600명은 들것에 실려야하는 중상자였다)이었는데 한명도 남기지 않고 전원 후송했으며 그 중 3분의 1은 비전투 손실로서 주로 동상환자였다. 155mm야포 9문과 골짜기에 굴러 떨어진 지프차 몇 대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장비를 철수 시킬 수 있었다. 한편, 같은 날인 12월 4일 대한민국 국군이 조선의 수도이던 평양에서 철수했다.

 

12월 5일 장진호에서 흥남으로 향하는 후퇴로 하갈우리에서는 1일부터 이날 밤까지 약 4,000여 명의 부상자가 일본으로 후송되었다. 서부전선의 미 제8군은 평양-원산간의 방어선 형성이 불가능하여 이날 평양에서 철수하였다.

 

12월 6일 이날 오후 2시 40분 경 하갈우리 통신 중계설비가 해체되었다. 오후 6시에는 야전활주로가 폐쇄되었다. 그때까지 4,312명이 후송되었으며 시신 173구도 함께 후송되었다. 미 수송기를 통해 보급품을 지원받은 미국 1 해병사단은 차량 1,000대를 이용해 중공군 9병단의 포위망을 뚫고 하갈우리에서 고토리로 후퇴하였다. 그리고 한국군이 12월 4일에 가장 마지막으로 후퇴 함으로써,  조선이 수도 평양을 수복하였다.

 

12월 9일 미 10군단은 모든 유엔군은 흥남지역으로 철수하라는 작전명령을 하달하였다.

 

12월 10일 오전 6시, 미국 1 해병사단의 행군 행렬이 함흥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12월 11일 저녁까지 최종부대가 함흥에 도착했다. 흥남에서는 14일부터 24일까지 유엔군 12만명과 피난민 10만명이 해상으로 철수하였다

 

3. 흥남철수작전

 

기세 좋게 38선을 돌파했던 유엔군은 갑작스런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선이 교착되었다.

이 과정에서 동부전선을 맡았던 미해병 1사단은 병력 면에서 열 배가 넘는 중공군 12만 명의 포위를 뚫고 미 10군단과 한국군 1군단이 흥남부두를 통해 무사히 철수할 수 있도록 했다.

흥남에서는 군인 10만 명, 남한으로 피난하려는 북한 주민 10만 명이 193척의 배로 탈출했다.

이 과정에서 미 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 소장은 메러디스 빅토리호(7600톤급) 내 무기를 모두 버리고 그 대신 피난민 1만 4천 명을 더 태우도록 명령하였다. 이 결정에 참여한 10군단장 알몬드 소장, 레너드 라루 선장, 10군단 민간 고문 현봉학은 영웅으로 기려지고 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1950년 12월 부산에 물자를 내려놓은 뒤 12월22일 흥남부두(흥남항)로 갔다. 당시 흥남부두는 미군과 한국군 10만5천명과 피난민 9만명으로 혼잡한 상태였다. 미국 군함과 비행기가 중공군에 폭격을 하는 동안 군함과 상선 약 200척이 흥남 철수 작전에 동원됐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정원은 60명이었고, 이미 선원 47명이 타고 있었기 때문에 원래는 13명만 더 태울 수 있었다. 당시 미 육군 제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의 민사고문으로 있던 한국인 의사 현봉학씨가 피난민들을 모두 태워달라고 간곡하게 요청했고, 레너드 P. 라루 선장은 배에 실려있던 무기를 모두 버리고 피난민을 최대한 태우라고 명령했다. 피난민들도 자신의 짐을 버리고 승선해 모두 1만4천명이 탈 수 있었다. 피난민이 승선하는 동안 미 육군 3사단은 후방을 방어하다 세명이 죽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28시간 동안 항해해서 부산항으로 이동했다. 음식과 물, 이불, 의약품이 모두 부족했고, 적이 공격하는 와중이었지만 희생자는 한명도 없었다. 선원들은 옷을 벗어 여성과 아이들에게 줬지만 상태는 심각했다. 한때는 젊은이들이 음식을 달라며 폭동을 일으키기 직전까지 갔다.

12월 24일 부산항에 도착했지만 이미 피난민으로 가득찼다는 이유로 입항이 거절됐다. 같은 날 알몬드는 흥남부두에 내려놓은 무기를 중공군에게 뺏기지 않도록 흥남부두를 폭파시켰다. 라루 선장은 할 수 없이 50마일을 더 항해해서 크리스마스인 25일 거제도 장승포항에 피난민을 내려놓았다. 항해 도중 아기 5명이 태어났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흥남 철수 작전이 끝난 뒤 시애틀로 갔다가 베트남전에 투입되기 전까지 수년간 워싱턴주 브레머턴(Bremerton, WA)에 정박해 있었다. 1971년 퇴역하고, 1993년 중국에 팔려 고철로 분해됐다. 이 배는 미국 의회에서 갤런트상(Gallant Award)을 받은 몇 안되는 배 중의 하나이다. 미국 교통부(DOT)는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구출을 한 기적의 배'라고 선포했다.

2004년 9월엔 기네스에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구조'를 한 배로 기록됐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 메러디스 빅토리호 모형이 만들어졌다.

 

한편 라루 선장은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나고, 바다에서 22년을 보냈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대서양에서 상선을 타고 작전에 참가했다. 1952년 작전 참가 업무가 끝났고, 1954년 바다를 떠나 뉴저지주 뉴턴시에 있는 베네딕토회의 성 바오로 수도원(St. Paul's Abbey in Newton, N.J)에 들어가 '마리너스'(Marinus)라는 이름의 수사로 2001년 10월 87세로 숨질 때까지 평생을 봉헌했다. 마리너스는 "바다(marine)가 아니라 성모 마리아에서 따왔다"고 한다. 라루 선장은 흥남 철수 작전 당시 상황을 "나는 쌍안경으로 비참한 광경을 봤다. 피난민들은 이거나 지거나 끌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항구로 몰려들었고, 그들 옆에 닭과 겁에 질린 아이들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또 당시 항해를 "때때로 그 항해에 대해서 생각한다. 어떻게 그렇게 작은 배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태울 수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한사람도 잃지 않고 그 끝없는 위험들을 극복할 수 있었는지. 그해 크리스마스에 황량하고 차가운 한국의 바다 위에 하느님의 손길이 우리 배의 키를 잡고 계셨다는 명확하고 틀림없는 메시지가 내게 와 있었다"라고 회고했다. 라루 선장은 이때의 경험으로 베네딕토회 수사가 된 것으로 보인다.

 

4. 장진호 전투에 관련된 영상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