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0여년 전에 20여 종의 청소년 역사소설을 썼다. 혼자 쓴 게 아니라 후배들과 힘을 모아 일종의 전집으로 마련했다. 두 번씩 출간했지만 지금은 절판되었다. 다만 출판사 요청으로 가끔 재출간을 한다.
지난 번에 <구암 허준>으로 나간 것도 20년 전 작품 <청소년 역사소설 허준의 동의보감>이다. 이번에 명량이 이슈가 되자 <청소년 역사소설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손질하여 <소설 이순신>으로 재출간했다.
임진왜란에 관한 내용은 <소설 토정비결>과 <소설 토정비결 2부 - 당취>에 매우 자세히 나온다. 물론 당취는 조선과 일본에서 벌어진 모든 이야기를 담았고, <소설 이순신>은 이순신 얘기만 한 것이다.
영화 <명량>을 보니 왜 명량인지, 왜 명량 해전에서 조선군이 이겼는지 자세한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함성과 거친 물살, 빗발치는 화살과 조총 등만 보인다. 열심히 싸우긴 했는데 300여 척이 넘는 적선을 어떻게 12척으로 이길 수 있었는지 전혀 설명이 돼 있지 않다. 역사소설에서는 이런 부분이 소홀히 다뤄지면 안되는 법인데 영화는 그냥 넘어가도 그러려니 하는 것같다.
그래서 명량 부분을 <소설 이순신>에 나오는 내용으로 적어본다.
- 서해와 남해 분기점인 명량에서 전투가 벌어진 이유는 원균 통제사의 패전 이후 경상좌수영, 경상우수영, 전라좌수영이 모두 적지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이때 전라우수영인 해남 일대에서 전투 준비를 했는데, 서해와 남해의 관문인 이곳이 뚫리면 서해바다를 일본군에 내주게 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육전에서는 이미 남원, 전주가 함락되고 충청도가 유린될 때다.
- 그는 진도 벽파진에 임시 통제영을 두고, 울돌목(명량)의 조류를 주의깊게 관찰하였다.
<소설 이순신> 293쪽에 명량에 대한 설명이 이렇게 나온다.
명량鳴梁.
명량이란 전라 좌수영 소속도 아니고 빙 돌아 우수영, 그것도 어란포, 해남을 돌아서도 진도와 마주보고 있는 바다의 골짜기, 해협海峽이다. 길이는 1.5킬로미터, 폭은 5백여 미터, 그러나 해안을 빼고 실제로 다닐 수 있는 길은 불과 4백 미터. 그나마도 울돌목에 이르러 폭은 더 좁아져 3백 미터밖에 되지 않는다. 또한 양 언덕에 암초가 많아 항진 가능 거리는 120미터로 병목처럼 쑥 줄어든다. 썰물이 되면 그 암초가 마치 육지와 섬을 잇는 다리 같다 하여 명량의 량梁이 된 것이다. 이처럼 해협이 좁다 보니 밀물이 몰려들 때에는 시속 30킬로미터의 급한 물살로 변해 마치 해룡海龍이 우는 듯하다 하여 명鳴 자가 붙은 것이다.
이 달 9월의 만월滿月 시각은 이틀 전인 14일 오후 7시 44분, 16일의 조수는 오전·오후 7시경에 남해안에서 서해안 쪽으로 흐르기 시작하여(밀물) 오전·오후 10시에 절정을 이룬다. 그 반대로 오전·오후 1시경에는 서해안에서 남해안 쪽으로 흐르기 시작하여(썰물) 오전·오후 4시에 가장 빨라진다.
- 따라서 이순신은 이 날 오후 1시를 전투 시각으로 잡았다.
- 이순신은 이 날 오전 9시경에 일본군 수군이 쳐들어오고 있다는 척후선 군관 임영준의 보고를 받았다.
- 이때 해남 어란포에는 과도직무(鍋島直茂 ;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이끄는 일본군 좌군 별동대 2만 5천 명이 대기 중이었다. 일본 수군이 이순신을 쳐부수면 바로 서해안을 따라 한강으로 진격할 예정이었다. 이순신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영화에 안나온다.
- 이순신이 울돌목 서해 쪽 방향에서 남해 쪽을 향해 늘어선 것은 대략 11시경이었던 듯하다.
- 이순신은 전선 12척을 이끌고 서해 쪽 울돌목에 나란히 섰다. 적선들이 조선 수군이 적은 걸 보고 가까이 다가오라는 유인 전술이었다. 이걸 두고 조선 수군들이 겁을 집어먹고 피했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 겁을 먹은 거처럼 보여야 일본 수군이 울돌목 내로 들어올 것이기 때문에 일부러 그런 것이다.
- 이 시각에는 남해 쪽에서 조류가 들어와 서해 쪽으로 흐를 때다. 즉 밀물이다. 일본 수군들은 조류를 타고 쉽게 들어올 수 있었다.
- 오후 1시가 되자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였다. 나가는 썰물이 들어오는 밀물을 치고 나가면서 바다가 울기 시작하였다. 그제야 이순신은 총공격령을 내린다. 소용돌이가 생기는 건 전투와 별 상관이 없다. 밀물 썰물이 교차하면서 생기는 소용돌이일 뿐 이것이 적선을 깨는 건 아니다. 영화에서는 일부러 관객을 속인 것이다.
- 썰물로 완전히 바뀌자 조류는 시속 30킬로미터의 맹렬한 속도로 울돌목을 빠져나갔다. 조선수군은 이 조수를 타고 나가면 노를 많이 안저어도 빠른 속도로 달려나갈 수 있지만, 반대로 일본 수군은 역류를 맞아 아무리 노를 저어도 조선 수군 쪽으로 다가오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즉 일본 배들이 울돌목에 모두 갇혀 버린 것이다.
- 이순신은 초요기를 올려 12척 판옥선에서 일제히 함포사격을 명령했다. 총통에서 발사한 무쇠포탄은 1.3킬로미터까지 날아간다. 폭발하는 건 아니지만 그 정도 날아가서 적선을 때리면 그대로 구멍이 났다. 거기로 물이 새면 적선은 가라앉는 것이다. 판옥선 한 척당 최대 72문까지 총통이 있다. 이중 한 방향에서 약 30문 정도가 일제히 발사할 수 있다. 12척이 모두 쏘아대면 분당 300발 이상을 쏠 수 있다.
- 게다가 조선군은 일종의 미사일인 신기전을 갖고 있었다. 판옥선마다 보유했기 때문에 여기서 불화살을 날리면 적선은 금세 불이 붙거나 대혼란이 일어난다. 또 조란탄, 비격진천뢰를 발사하기도 했다. 이건 살상무기다. 제대로 맞으면 최대 20명까지 죽일 수 있다.
- 이순신은 초반에 포격전으로 적선 100여척을 부수고, 이어 당파전으로 들어가 판옥선이 삼나무로 만든 일본배를 부딪혀 깨는 전술을 썼다. 조선 판옥선은 무거운 소나무로 지어져 강도가 굉장하지만 일본배는 잘 자라는 무른 삼나무로 지어 가볍기는 하나 잘 깨진다. 이렇게 하여 적선 133척을 깨부수자 나머지 적선들은 달아나버린 것이다.
- 전투 막바지에는 전선으로 위장해 맨뒤에 대기 중이던 어선 100여 척이 달려들어 물에 빠진 일본군의 목을 베거나 조총 등을 수습했다.
- 어란포에 대기 중이던 일본 육군 좌군 별동대 2만 5천 명은 김해로 철수하였다. 이로써 일본군의 한양 공격 계획은 무산되었다.
- 적선이 아직 100여 척 이상 남았으므로 기습을 우려해 당사도(무안 암태면)로 후퇴했다. 피난선 300여 척도 어외도(무안군 지도면)로 피난시켰다.
<조선 수군 주력 전선 판옥선의 제원>
개발연도 : 1555년(명종 10년)
길이 : 30미터
재질 : 소나무, 참나무
층수 : 2층(선실은 비전투요원 위주, 갑판은 전투요원)
탑승 인원 ; 약 130명(노꾼, 의원, 취사병, 승려, 선장을 수발하는 종 등)
노꾼 : 약 100여 명(백병전 시 전투요원이 됨)
포병 : 약 36명(탄약 장전하는 화포장 포함)
궁수 : 약 18명
화포(총통) 24문 이상(거북선은 72문)
일본의 주력 전선인 관선(세키부네)의 제원
개발연도 : 16세기. 일본 전국시대의 대표적인 군선
길이 : 10~20미터 * 높이가 판옥선보다 낮다.
재질 : 삼나무, 녹나무
층수 : 2층(백병전 위해 배 측면이 열려 있어 조선군 함포 사격에 취약)
탑승 인원 ; 약 80명(노꾼, 의원, 취사병 등)
노꾼 : 노는 20~40개, 노 한 개에 2명이 탑승하여 교대. 약 40명.
조총수 : 20명
화포(총통) : 1~2문
- 명량 해전 참전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전사자
전라좌수영 소속 순천감목관 김탁, 이순신의 종 계생,
경상우수영 소속 거제 현령 안위 전선에서 7명
통제사 이순신, 충청수사 권준, 전라우수사 김억추, 경상우수사 없음(배설이나 달아남. 이후 방답첨사 출신 이순신이 맡음)
중군장 미조항 첨사 김응함
거제 현령 안위
녹도 만호 송여종
평산포 대장 정응두
무의공(첨사 출신의) 이순신
영등포 만호 조계종
조방장 배흥립
승군장 혜희(휘하 승군)
군관 송희립, 군관 제만춘, 군관 이기남, 군관 최대성
남해 현령 유형
여도 만호 김인영
김돌손, 일본인 준수, 마하수 및 그의 휘하
* 이 전투에 내 조상이신 이덕일(李德一) 의병장이 참전했다. 무과급제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마자 의병을 모아 이순신 휘하로 들어갔다가, 이순신 전사 후 절충장군이 되었다.
전라 수군과 전남 함평이 본관인 우리 집안은 연고가 깊다.
* 1497년 녹도에 왜구가 쳐들어오자 17대 선조인 이량 장군이 전라좌수사가 되어 이를 평정했다. 그때 흔적으로 여수의 장군섬이 남아 있다. 이후 함경도병마사로 여진족을 막았다.
* 이량 장군 5세손인 황해감사 이배원이 수군절도사가 되어 6세손 형조판서 이해와 함께 장군비를 세웠다.
* 8세손 이삼이 수군절도사가 되어 그 자리에 부임하였다.
* 9세손 이희하가 수군절도사가 되어 그 자리에 부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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