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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운 작품/소설 이순신

산케이신문의 영화 <명량> 비판 기사 전문 및 코멘트

일본 우익의 생각을 대변한다는 산케이(産經)신문이 우리 영화 <명량>을 비판하는 기사를 실었다. 이를, 종종 친일로 의심받을만한 기사를 올리곤 하는 조갑제닷컴이 전문 번역하여 올렸다. 코멘트하면서 기사 전문을 올린다.

조갑제닷컴 등 우익지들은 주로 반공-친일 성향을 보이고, 좌익지들은 반미-반일-친북 성향을 보이는 건 우연이 아니다. 나중에 설명할 일이 있을 것이다. <소설 이순신> 작가로서 직접 코멘트한다. 내 코멘트는 초록색으로 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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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명량'(鳴梁) 空前의 히트.. 惡役 후손은 소송>
2014. 10. 2. 産經新聞

<조갑제닷컴으로 가서 보기>

文禄.慶長의 役(임진왜란,1592~98年) 당시, 朝鮮水軍을 이끌며
'도요토미'
(豊臣,1536~98年)軍과 맞서 싸운 李舜臣 장군을 주인
공으로 한 韓國 영화
'명량'(鳴梁)이 空前의 히트를 記録했다.
韓国영화로서는 최초로 관객
동원수 1700만명을 돌파했다. 주요
인기 원인은, '反日色'이 높다는 것인데,
戦果를 과도하게 부풀
리고 수수께끼 같은 'SF식 兵器'가 등장하는 등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

* 전과 과도하다 ; 전혀 과도하지 않다. 자료에 따르면 일본이 동원한 전선은 약 200여 척으로 나온다. 이중 주요 전선인 세키부네는 약 130척이고, 나머지는 전선이 아닌 보급선, 연락선, 작전선 등이었을 것이다. 침몰된 일본 세키부네는 약 31척이고, 1백 척은 반파시켰다는 기록이 나온다.

일본 주장대로 침몰된 일본 군선은 약 31척 뿐이지만 당시 급한 썰물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 수군은 더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조선 수군의 대승이 맞다. 조선 수군의 대승이란 말이 기분 나쁘면 '일본 수군의 전략적 실수에 따른 대패'라고 이해하기 바란다.

 

* SF식 병기 ; 거북선을 가리켜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데 거북선은 확실히 존재했다. 다만 명량해전에서는 없었다.

그리고 화포를 쏘면 포탄이 터지면서 크게 폭발하는 듯한 장면은 다 가짜다. 무쇠탄이 날아가 적선을 깨뜨렸을 뿐이다. 그외 신기전, 조란탄 등은 사실이다. 일본은 이런 무기가 전혀 없었다.

 

- 나는 최대한 팩트를 기초로 이 작품을 썼다. 사료를 해석하는 데서 차이가 있을 뿐

역사적 사실을 가공하거나 변형하지는 않는다.

 

監督은, <日本人은 歴史에 대해 잘 모른다. 이 作品은 日本의 観
衆이 歴史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본다>고 自信에 찬
목소리로 말했지만,
너무도 歴史를 '創造'한 끝에 그 부작용으로,
이 감독은, 영화에서 悪役으로
묘사된 인물의 자손들로부터 명예
훼손으로 고소를 당했다.


韓国で大ヒットの反日映画「鳴梁」の宣伝写真
韓国의 대히트 反日映画 '명량'(鳴梁)의 宣伝写真


■ 歴史活劇? 판타지?

영화는, 李舜臣이 단지 12척의 배(船)로 330척에 달하는 倭軍
(日本)의
공격에 맞서 싸운 명량(鳴梁)해전을 그렸다 - 고 되어
있는데,
歴史的 사실을 反映반영했는지의 여부는 큰 의문이다.
이 海戦에 관한 記録은, 韓国에는 李舜臣 自身이 남긴 <乱中日
記> 등 극히
제한된 자료 밖에는 없는 상태다. 하지만, 日本에
는, <나카가와케(中川家)文書>나
<모리다카무네(毛利高棟)文
書> 등 복수의 자료가 남아있고, 그 記述内容도 精密
度가 높다.

日本側의 기록에 따르면 배(船)의 수(数)는, 朝鮮水軍이 大型船
12~14척
이고, 日本側은 수십 척이다. 朝鮮의 기록(乱中日記)에
따른다 해도, 日本側은 130척
정도로, 330척은 큰 과장에 해당
한다.
日本側 기록에 따르면, 朝鮮水軍은 被害가 경미했는데도
日本側의 本隊到着을
우려하여 신속히 海戦海域으로부터 이탈
했다. 그 후로도 퇴각을 거듭하여 5日
후에는, 全羅道 北端의
群山 앞바다까지 물러나게 된다. 日本側의 被害는 先鋒에
섰던
몇 척이 침몰하고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가 負傷을 입었으
며, 수십 명이
戦死했다. 그리고, 投入된 戦力은 8천명이 안된
다.

 

* 일본 수군 인원 8천명 안된다 : 일본 전선 세키부네는 1척 탑 인원이 약 80명이다.

참전 세키부네를 130척으로 계산하면 8천명이 훨씬 넘는다.

 

* 조선 수군은 달아났는가 : 전략적 후퇴다. 당시 일본 군선 중 침몰, 대파 등으로 전력을 상실한 배는 약 130척이었다. 그러고도 일본 수군은 수백 척의 전선을 더 보유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오로지 판옥선 13척(1척 수리중) 뿐이었으므로 일단 후퇴를 하면서 일본 수군의 대응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이 단지 판옥선 13척뿐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경기수군, 황해수군이 더 있기 때문이다.(실제 전력은 모름). 또 판옥선 뒤에서 전선으로 위장하여 늘어섰던 어선들이 있고, 보급 등을 맡은 협선이 수십 척 더 있었기 때문에 일본 수군은 감히 보복에 나서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후 벌어진 노량해전에서 침몰된 일본 세키부네는 약 2백 척이고, 나포된 세키부네는 1백척이다. 

 

* 일본측 피해는 선봉 몇 척이 침몰하고,....수십 명이 전사했다 ; 거짓말이다. 세키부네 중 침몰한 게 31척이다. 탑승인원을 80명으로 잡으면 2400명이고, 절반으로 줄여 잡아도 1200명이다. 침몰한 배에 타고 있던 노꾼도 다 죽었을 텐데, 노꾼만 1척 당 약 40명이 탑승한다. 산케이의 거짓말이다. 반파 전선의 희생자는 잡지 않아도 이처럼 많다.


하지만 韓国에서는, 日本側이 침몰 31척, 大破 92척, 8천명 戦死
피해를 입은
'朝鮮의 大승리'로 되어 있다. 아울러, 韓国의 歴史
교과서를 보면, 李舜臣의
활약으로 <日本軍이 큰 타격을 입어
(日本軍의) 西進이 阻止됐다> <日本의
보급線이 차단됐다>는
등으로 나오지만, 임진왜란 당시 두 차례의 전쟁(文禄
1592년,
慶長1598년) 모두 '도요토미'(豊臣)軍은 朝鮮半島에 원래의
예정대로
상륙했다. 상륙 후에도 '큐슈(九州)-釜山'間의 補給에
애로가 있었다는 記録은
없다. 애초부터 文禄.慶長의 役(임진
왜란,1592~98年)이 끝날 때까지 약 7년간
제해권(制海権)이
朝鮮軍의 수중으로 넘어 간 적은 한번도 없었다.
물론 영화이므로
어느 정도 '創作(창작)'도 있을 수는 있지만, 朝鮮의 입장에서
유쾌하지 않은 歴史的 사실은 모조리 바꾸어 놓았다.

 

* 상륙 후에도 '큐슈(九州)-釜山'間의 補給에 애로가 있었다는 記録은 없다 ;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있는 동안 부산 쪽에 몇 차례 출전한 기록이 있다. 일본군이 우리 수군 측에 언제 보급선을 띄운다고 알려주지 않는 다음에야 무작정 기다렸다가 칠 수는 없다. 이순신 또한 아무 때나 부산 앞바다로 진격하는 무리수를 두지 않았다. 육군 지원 없이 부산의 많은 일본군을 수군만으로 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순신의 임무는 일본 수군이 일본군을 태워 남해-서해를 타고 보급하거나 군사를 수송하는 걸 막는 일이었다.

 

* 약 7년간 제해권(制海権)이 朝鮮軍의 수중으로 넘어 간 적은 한번도 없었다 ; 거짓말이다. 일본 수군이 일본과 부산을 오가는데 애로가 없었을 뿐 일본 수군은 수로를 이용해 서해안으로 들어가본 적이 없다.

예를 들어 명량대첩이 일어날 때도 일본군은 그곳에서 지척인 해남 어란포에 과도직무(鍋島直茂 ;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이끄는 일본군 좌군 별동대 2만 5천 명을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일본 수군이 만일 서해까지 장악했다면 전라, 충청을 침입했을 때 일본군이 도적질한 물건이나 포로로 잡은 백성을 군산, 목포, 당진 등에서 얼마든지 수송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 못하고 남해까지 육로를 통해 내려간 다음에야 수송선을 이용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있는 동안은 울산, 부산, 김해, 진해 등 주로 경상좌도 해안만 이용할 수 있었을 뿐이다.

 

 

 

 

■ 일부 韓国人도 싫어하는 '헬(Hell)朝鮮'

文禄.慶長의 役(임진왜란) 당시 朝鮮은, 일부 韓国人들도 '헬
(Hell)朝鮮'
(지옥같은 朝鮮)이라고 싫어할 정도로 最悪(최악)의
時代다. 일부의 귀족(양반)이
대부분의 부(富)를 독점했고, 이들은
권력투쟁에 세월을 다 보냈다. 많은
백성들은 거의 家畜(가축)에
가까운 취급을 받는 奴隷(노예)였다.

 

 

* 조선 백성들은 가축에 가까운 취급을 받는 노예였다 ; 그때는 신분제 사회라서 조선만 그런 게 아니고, 중국, 미국 등 모든 나라가 그러했다. 일본은 더 심했다. 조선은 비록 노비라도 3심제로 처벌이 되지만 일본은 영주의 말 한 마디로 할복할만큼 사법체계가 독재적이었다. 임란 때 들어온 일본군은 성주를 따라온 백성들이었는데, 이들은 사실상 성주의 노예들이나 다름없었다. 성주는 자신의 백성들을 언제든지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은 도관찰사라도 백성들의 목을 벨 수 없었다. 오로지 왕만이 사형 여부를 결정했다.

 

* 이런 이유로 일본군 중에 조선에 항복한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이들만으로 구성된 부대도 있었다. 이를 근거로 일본의 당시 사회 체제를 이제 와서 비판하고 싶지 않다. 나는 무작정 자국 역사를 비호하는 일본인이 아니라 우리역사라도 시시비를 가리는 한국인 작가이기 때문이다.

文禄.慶長의 役(임진왜란)을 계기로, 이러한 일반민중들이,
진격하는 '도요
토미'(豊臣)軍을 환영했다는 記録도 남아있다. 
그중에는, '도요토미'(豊臣)軍
이 到着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않고(도착하기 전에) 反乱을 일으켜 노예(奴隷)
身分을 기록해
둔 호적(戸籍)을 일괄 보관한 建物을 불태우는 등 朝鮮王朝

奴隷制度에 反旗를 든 민중들도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 경복궁 장예원을 불태운 것은, 선조 이균이 한양성 방어전조차 치러보지도 않고 무작정 달아났기 때문에 백성들이 화가 나서 저지른 사건이다. 기타 일본군에 부역한 사람은 실제로 있었다. 태평양전쟁 때 미군을 도운 일본인처럼 이 정도는 어느 전쟁에나 있다. 거꾸로 부산진, 동래성, 진주성에서 기생, 노비까지 결사항전한 것은 왜 안보는가. 또 의병 구성원 중 상당수가 노비들이었다. 천민이던 승려들도 수천 명이 참전했다. 일본 같으면 조선처럼 민간인이 정규군에 맞서 싸운 사례가 없다.

 

* 朝鮮王朝奴隷制度에 反旗를 든 민중들 ; 일본 노비들은 겁이 많아 감히 반역을 못일으켰을 뿐이다. 조선의 노비들은 전쟁이 안일어나도 종종 반란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일본인들이 잘 모르는 것같다.

당시는 文化도 황폐(退廃)한 상태였다. 영화에서 李舜臣 등 朝鮮
朝鮮의 장군은
훌륭한 갑옷(鎧甲) 같은 것을 입고 나오지만, 현재
아있는 朝鮮무장(武将)
의 옷(服)은 면(綿)이 들어간 防寒具 같은
수준 程度의 것이다. 演出도 陳腐
하여, 日本軍 쪽에는 수수께끼
같은 용병(傭兵)이 등장하는 등 1960년대
日本의 어린이用 영웅
活劇에 나오는 악당을 방불케 하는 식으로 느껴졌다.

 

* 文化도 황폐(退廃)한 상태였다 ; 천만의 말씀이다. 일본은 그때 조선에서 무수한 서책, 도자기, 종자, 불구 등을 훔쳐갔다. 일본 같으면 영주나 가지고 있을 법한 물건을 조선에서는 양반가마다 다 갖고 있기 때문에 이런 조선 문화에 일본군들이 충격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 면이 들어간 방한구 정도 ; 병사들의 복장이라면 인정한다. 단지 색깔로 구분했을 뿐이다. 다만 장수들은 그렇지 않았다. 병졸들이 그러했지 장수들은 제대로 된 장수복을 입었다. 도리어 일본군이 훈도시만 입고 왔다가 겨울에 무수하게 얼어죽은 사실이 있다.

아울러 당시 朝鮮의 軍艦으로서 실재했는지의 여부도 불분명한
<거북선>도
등장한다.
朝鮮의 記録에 따르면, <거북선>은, 敵의
화살을 방어하기 위해 주위(周囲)를
판(板)으로 두르고 지붕을 덮은
戦闘室이 있고, 그 지붕으로는
敵兵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고슴도치
같이 금속의 칼을 촘촘하게 박아 놓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前後左右로는 大砲를 장착하여 당시로서는 최신예
軍艦(군함)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記録은 文章(문장)에 의한 記述만 있을 뿐,
설계도는
커녕 외관조차 나와 있는 것이 없는 상태다. 현재 존재하는
일러스트는 후대의
창작이다.

 

* 거북선은 이순신 장군이 일시적으로 사용했을 뿐, 그의 전사 후 대규모 해전이 일어나거나 날 가능성이 적이 없기 때문에 건조된 바가 없다. 거북선은 무게 때문에 더 많은 노꾼이 필요하여 접근전말고는 효율성이 떨어지는 측면이 있다.



韓国에서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관광용 볼거리로 삼기위해 아주
적은 記述을 의지하여 <復元船>을 제작했지만, 輸送 도중 침몰해
버리는 등
좋지않은 결과로 끝났다. 復原(복원) 계획에 의해, 거대한
돛(帆)을 장착하는 등
想像上의 장비가 추가되기도 했는데, 이런
<거북선>이 映画에도 등장한다.
<거북선>은, 文禄.慶長의 役
(임진왜란) 당시 活躍했다고 하지만, 具体的인
戦果 기록은 없다.
이에 대해 감독은, <거북선은 있었지만, 李舜臣의 라이벌
장수가
태워버리고 말았다>는 스토리를 創作했다.


海戦の約200年後に描かれた亀船の図。この後、いろんな武装が「後付け」されていく
海戦이 있은지 약 200年後에 그려진 <거북선> 모습. 이 이후로
여러가지 武装이 추가된다


■ 소송 발생 

<거북선>을 최신예 軍艦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우수한 배(船)가
있으면서도
왜 日本을 이기지 못했나?>하는 모순이 발생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사실
거북선은 그리 대단한 성능이 아니었다>는
해석도 존재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韓国에서 잘 採用되지 않는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라이벌 李舜臣의 발목을
잡기위한 목적으로
불에 태워버려, 對日本戦에 활약할 수 없었다>는 아이디어가
나온 듯하다.

거북선 放火로 인해 李舜臣의 어려운 처지가 強調된 演出은
영화적으로는 훌륭해
보였을지 모르지만, 이러한 악역(悪役)으로
나온 將軍에게는 자손들이 살아 있다.
<조상의 명예를 더럽혔다>.
中央日報(電子版) 등 現地 언론에 따르면, 映画에서
악역(悪役)
으로 나온 것은, 慶尚右水師 '배설'(裴楔) 장군이라는 人物이다.
(水師란 水軍을 의미하며, 慶尚右水師는 직책명에 해당)

映画에서는, 漆川梁海戦(1597年)에서 朝鮮水軍이 심각한 타격을
받는 중에
도망가는 겁장이 같은 식으로 登場한다. <이길 가망이
없을 것 같다>는 말을
해서 軍兵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李舜臣
장군을 暗殺(암살)하려 하기도 하고,
거북선을 불태우는 등 노골적
악역으로 나온다. 그런데, 거북선을 불 태우는
등의 이러한 여러
악행들은, 日本의 기록을 봐도, 韓國의 기록을 봐도 전혀
나오지 않는
創作이다.

여기에 대해, 배설(裴楔)의 자손들은, <영화가 배설(裴楔)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다>는 이유로 영화의 上映中止를 要請했다.
아울러, 9月15日, 김한민 監督
등을 '死者 명예훼손' 혐의로 慶尚北道
星州 경찰서에 告訴했다. 子孫들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여 허위의
이야기를 반복하여 과도하게 표현하고 있다.
観客의 분노를
이끌어 내기 위한 천박한 상술>이라며 영화를 非難했다.

김한민 監督은 <日本人은 이 영화를 통해 역사를 배웠으면
한다>고 公言했는데,
소송(訴訟)에 휘말린 이후로는 침묵이다. 朝鮮日
朝鮮日報(電子版)에 따르면, 영화제작
회사는, <創作物은 創作物로서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愛国心(反日)에
가득찬 대히트 영화에
뜻하지 않은 흠(소송사건)이 생긴 셈이 됐다.

 

* 배설에 대한 왜곡 등 몇 가지 사실이 거짓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화 <명량>의 영화적 가치마저 폄훼당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알고 싶다면 내 소설만 읽어도 된다. 그러나 내 소설은 영화 <명량>에서 보여준 최민식의 그 묵직한 연기와 명량의 급물살을 따라가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