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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운 작품/소설 이순신

이순신의 편지

나라와 고을에 어지러운 일이 생기거나, 목숨이 당장이라도 떨어질 것같은 큰일이 닥치더라도 하늘을 부르거나 호국영령, 열사, 의사를 부르지 말라.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 배 부르고, 자기 자식이 사탕 물고 깔깔거리면 온 세상이 다 편안한 줄 안다. 뿐이랴. 헐벗고 배를 곯는 이웃이 눈에 보이지 않고, 아파 울부짖는 사람과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귀에 들리지 않는다.

그러니 날 부르지 말라. 나라고 왜 기치창검이 눈부신 수백 척의 적선 앞에서 무섭지 않았으랴. 속절없이 식은땀을 흘리고, 벌떡거리는 심장 박동에 숨쉬기도 벅찼다. 전선 겨우 열한 척 밖에 줄 수 없는 나라가 왜 내게 수백 척 적선과 싸워 이기기를 바라는가. 난들 왜 안무섭고, 내 목숨인들 왜 아깝지 않겠으며, 눈앞에서 부하들이 죽어나가는 걸 보고 어찌 목석처럼 의연할 수 있겠는가.

 

그대들은 나라에 환난이 닥칠 때마다, 겨우 아픈 기억 묻고 어둠에 갇혀 있는 호국영령을 왜 자꾸만 부르고 또 부르느냐.

그러지 않아도 피를 토하며 죽거나 적의 칼에 베어 죽거나 총탄에 맞아 죽은 영령들을 자꾸만 환난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어 두 번, 세 번 죽게 하느냐. 저희는 한 점 노력조차 안하면서 현충원은 왜 풀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열심하느냐.

행복은 왜 혓바닥이나 놀리는 당신들의 몫이고, 희생은 왜 이미 죽은 영령들의 몫이냐.

 

왜적을 물리친 나 이순신을 부르기 전에 너희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라. 우리는 왜 전선을 짓지 않고, 포탄을 만들지 않고, 성벽을 높이 쌓지 않은 채 날이면 날마다 혓바닥으로만 싸웠는지.

 

깨진 배 열두 척으로 삼백 척 왜적선을 물리친 나를 부르기 전에, 몽골군 기마대를 화살 한 대로 물리친 김윤후 승장을 부르기 전에, 권총 한 발로 왜인 괴수 이토 히로부미를 쏘아죽인 안중근 장군을 부르기 전에, 외로운 안시성 하나로 백만 당군을 물리치고 당태종 눈깔에 화살을 박은 양만춘 장군을 부르기 전에, 너희 스스로 활쏘기를 배우고, 어깨에 총을 메어라.

 

솔직히 말하노니 귀담아 들어라.

이토 히로부미를 총으로 쏴 죽였지만 그 자신은 적들에게 잡혀 컥컥 목 매달린 안중근 의사를 불러 또 다시 목매달고 죽으라 요구하지 말라. 금산성에서 15천 명의 왜군에 맞서 마지막 한 명까지 모조리 전사한 15백 명 의병과 승군더러 그 지옥에서 다시 돌아와 우리 대신 칼맞아 또 죽으라 하지 말라. 난들 왜 내 가슴에 총탄이 다시 박히기를 바라겠느냐. 난들, 우린들 왜 살기를 바라지 않겠으며, 처자식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고 싶지 않았겠느냐.

 

다시 말하니, 제발이지 호국 영령 다시 부르지 말라.

우리 부르지 말고 이제는 너희가 이순신이 되고, 너희가 김윤후가 되고, 너희가 안중근이 되어라. 너희가 금산벌 15백 의병이 되어라.

 

, 죽어서나마 편히 쉬고 싶다. 우리는 쉬고 싶다. 쉬게 좀 두어라.

휘몰아치는 매서운 북풍 같고 쏟아지는 소낙비 같던 우리 호국영령들의 시뻘겋고 시커먼 인생, 이제는 쉬고 싶다. 우리를 부르지 말라. 제발이지 우리를 향해 기도하지 말라.

 

 

5천년 마디마디 끊길 뻔할 때마다

민족을 지켜낸 영령들을 대표하여

이순신

한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