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근무 종료 시각에 맞춰 대기하고 있다가 귀향길에 올랐다.
자동차 뒷자리에는 장애견 바니 할머니가 담요에 머리를 묻고 있다. 십수년 째 변함없는 풍경이다. 그리고 그 옆에 딸이 앉아야 하는데, 딸은 오래 전부터 조수석에 앉는다. 다만 그 자리에 함께 있어야 할 리키가 없다. 누나 무릎이 불편하다고 호소하며 아빠에게 소리 질러 항의하던 리키는 이제 설을 쇠지 못한다
시간이 되면 천안 병원에 들러 어머니를 뵙고 시골집에 가야 하는데, 이래저래 면회 시간이 지나버렸다.
어머니 없는 명절은 이번이 처음이다. 내가 명절에 안간 적은 있어도 명절 자리에 어머니가 안계신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내가 태어난 이래 그랬다.
그런데 이번에 나는 가고, 어머니는 못가신다.
어머니 안계신 집에 가는 걸음이 무겁다. 아버지 제사를 드려야 하니 가기는 가야 하지만 가고싶지 않다. 굳이 빨리 가고 싶다는 마음도 안생긴다.
"아차, 아빠가 양말을 안가져왔구나."
"할머니가..."
딸도 그렇게 말하다가 입을 다문다. 명절이면 할머니가 늘 양말을 준비하셨으니 딸까지 그런 줄 알고 있다.
"할머니, 병원에 계시잖아. 할머니 대신 누가 살 리가 없지."
"큰아빠?"
"글쎄다. 그럴 거 같으면 아빠가 집에 가기 싫지 않을걸?"
"그럼, 아빠가 사면 되잖아."
"아무래도 그래야겠다."
마침 천안을 지나는데 O플러스가 보여 차를 세웠다. 어머니의 증손자 건우 양말까지 샀다. 어머니는 명절이면 자식과 며느리, 손자손녀 양말을 꼭 사놓으셨다가 명절 당일에 내놓곤 하셨다. 복불복이라 골라 신어야 한다. 어머니 마음대로 사는 거라 무늬며 모양이 각각이다. 설빔 문화가 사라진 뒤로 어머니가 개발하신 우리 집 '설빔문화'다.
시골집에 다다르니 역시 명절 분위기다. 어머니 안계신 건 다들 까마득히 잊은 듯하다.
조카 두 아이가 결혼하여 각각의 짝을 데려오고, 어머니 증손자까지 있어 제법 떠들썩하다.
설 며칠 전에 내가 어머니를 납치하다시피하여 천안병원에 모신 것에 대해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앞엣글에서 내가 'Just Do It.'이라고 적었다. 그때 근무 중인 막내동생을 조퇴시켜 함께 어머니를 차에 태워 병원으로 옮겨버렸다. 그런데 다들 묵묵히 모른 척한다.
설날, 아버지 제사를 드리고 성묘까지 마친 다음 길을 떠났다. 형제들은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천안 사는 막내만 어머니께 갈 것이다.
어머니께 가니, 나하고 손녀만 온 걸 알고는 마구 화를 내신다.
"왜 다 데려온다더니 너희만 왔어!"
핑계를 댔다. 아마 내일쯤 올 거라고.
"호두나무밭에 사냥꾼들이 차를 타고 드나든대요. 그래서 길 막는다고 다 갔대요."
"그깐 호두나무, 밟든말든 무슨 상관이야!"
어머니가 하도 성화를 하셔 네째에게 전화를 거니, 제수가 대신 받아 호두나무 밭에 갔다길래 그렇게 말씀드린 것이다.
"어머니, 어서 기운내서 작대기 짚고 집으로 가자구요. 증손자 건우도 봐야지요. 청양 장도 훠이훠이 두 팔 저으며 구경합시다."
"증손자 그 자식 있으나마나 무슨 상관이야! 다 필요없어"
어머니는 소뇌에 가벼운 뇌경색이 온 뒤로 발음이 똑똑치 않다. 눈치로 대강 알아듣는다.
저녁 식사를 받았는데, 어머니는 화가 나시는지 반만 잡숫고 숟가락을 놓으신다. 밥맛이 안난다고 물리란다. 그러고는 휠체어를 타고 1층과 3층을 산책했다. 그러도록 내내 화를 내시기만 한다.
그런 중에 딸이 건우 애비인 사촌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목천나들목까지 왔다는 대답이 들린다.
"할머니, 선재오빠가 건우 데리고 오고 있대요. 거의 다 왔대요."
"그려?"
어머니 얼굴이 확 펴진다. 잔소리가 사라지고 언제 오느냐만 자꾸 묻는다.
다행이다. 손자 중에 어머니에게 가장 잘해온 건우 애비가 기어이 오고 있었던 것이다.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아들 보여주려고 오는 조카가 고맙다.
얼마 전 어머니가 아직 시골집에 머무실 때 큰조카가 장가를 갔는데, 엊그제서야 겨우 병원에 다녀갔다. 그때도 어머니는 "그 녀석 장가 들든지 말든지 다들 집에 다녀가야지, 왜들 아무도 안와!" 하시면서 역정을 내신 적이 있다. 각자의 인생관이지 내가 조카들에게 뭐라 이르겠는가. 내 아들, 내 딸이라면 머리채 잡아서라도 데려오겠지만 조카만 돼도 벌써 남이다.
마침내 돌 지난 지 얼마 안되는 어머니의 증손자가 나타났다. 어머니는 괴성을 지르시며 좋아하신다. 어린것의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아~! 아~! 우리 건우 이쁘다! 우리 건우 이쁘다! 아~! 아~!"
마구 소리를 지르시며 좋아하신다. 같은 병실 할머니들도 함께 좋아하신다.
아마도 내년 설, 역시 어머니가 안계신 집으로 무거운 걸음을 해야만 할 것이다. 처음 몇 해는 아마 슬픔을 삭이기 위해 가기는 갈 것이다. 하지만 기어이 고향에서 차츰 멀어질 것이다.
이 달이 가기 전에 장모님께 성묘 드리러 김해를 다녀와야 한다. 1월 초에 어머니 추도식을 가졌지만 그 정도로는 아픔이 가시지 않는다. 마지막 어느 시기, 사위를 잠시잠깐 알아보다가 그만 기억을 놓쳐버린 장모님의 그 안타까운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누굴까, 누굴까, 그러다 어머니는 눈길을 돌리셨고, 그로부터 머지 않아 하늘로 가셨다. 그러니 나라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머니가 나를 잊으셨는데 나까지 어머니를 잊을 수는 없다. 30초반에 남편을 여의고나서 억척으로 다섯 딸을 길러낸 장모님 나이 61세 무렵, 못난 나를 사위로 보셨다. 어머니를 장모님으로 뵌 건 8년 남짓, 가신 지 여러 해건만 늘 머릿속을 맴돈다. 내 입으로 추도 기도를 드리고 싶은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종교가 다르다보니 마지막의 아멘 밖에 없다. 내 장모님을 생각하면 언제나 가슴이 미어진다. 리키 떠올리면 가슴이 무너지듯 차마 고개를 쳐들 수가 없다.
어제, 어머니를 휠체어에 태우고 병원 복도를 오가는데 휴게실 의자에 털퍼덕 주저 앉아 통곡하던 한 할머니를 보았다. 명절인데 자식들이 아무도 오지 않는다고 슬피 우셨다. 돈이 없는 모양이야, 그런 사설까지 하셨다. 병원이라서 환자들간에는 은근히 문병객 많고 적음이 비교되는 모양이다. 막내며느리가 거의 매일 드나드는 우리 어머니도 설날에는 그처럼 노여워하시는데, 하물며 인적없는 분이라면 오죽 하시랴.
사람은 사람을 의지해야 살 수 있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공주야, 아빠가 늙어 할머니처럼 아프면 넌 어떡할래?"
"내가 모시지."
"오줌똥 받아내면서?"
"그럼."
그러기 전에 내가 알아서 품위를 지키는 길을 찾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인생을 품위있게 마무리할 수 있을지 연구를 해야만 한다. 그리스의 한 약사는 국가적 재정위기로 연금이 줄어들자 인간으로서 품위를 지킬 수 없다며 자결해버렸다. 몇년 전 방송에서 유명세를 타던 한 부부 역시 투병 중에 호텔에서 동반 자살을 했다.
내가 원하기로는, 책에나 나오는 전설인지는 모르겠지만 앉은 채 선정에 들었다가 그 길로 열반하는 것이다. 좌탈입망(坐脫入亡)이라고 한다. 시신 안남기고 모래처럼 먼지처럼 흩어지면 더 좋을 텐데 그게 안되는 게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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