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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운 작품/전시재상유성룡의 임진왜란 7년기록

정도전 유성룡이 뜨는 세상의 의미

2008년 <나는 고백한다 -정도전 살해사건>을 쓸 때만 해도 독자들이 과연 이런 소설을 용납해줄까 걱정했었다.

 

 

- 왼쪽이 2008년 판 <나는 고백한다 -정도전 암살 미스터리>이고,

오른쪽이 제목을 바꾸어 재출간한 <정도전>이다.

 

당시까지 우리나라 사극을 보면, 대개 왕이나 왕비 등 궁중 암투를 다루는 것들이었다. 대장금이나 허준은 직업을 놓고 그리는 것이니 사극이 아닌 풍속을 다룬 셈이고, 오로지 역사를 꾸려간 이야기를 하는데 왕이나 왕이 아닌 신하가 주인공이 되는 경우는 이순신 밖에 없었다. 물론 이순신은 박정희 정권이 필요에 의해 부각시킨 인물(태종 이방원이 자기 손으로 때려죽인 정몽주를 만고 충신으로 받든 것처럼 이순신은,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가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라'는 이미지 조작의 산물이다. 실제는 국가는 이순신 잡아다 죽이려 했고, 정몽주는 철퇴로 때려죽였으면서도)이므로 이유를 따져보면 미흡한 점도 있다. 아니나다를까 이순신은 충(忠)의 관점에서만 다뤄졌을 뿐이다.(배우 최민식이나 김명민이나 쉬지 않고 반복한 말이 바로 충이다.)

 

이런 가운데 2014년에 <정도전>이란 인물이 주인공인 사극이 방영된 것은 대단한 의미가 있다. 게다가 이번에 1998년에 내가 이미 신문연재소설로 다루었던 <유성룡>이 주인공이 되어 또다시 대하사극이 만들어지는 것도 매우 의미있는 현상이라고 나는 반갑게 이해하고 있다.

 

- 왼쪽이 1998년부터 경향신문에 연재했던 당취로서,

다섯 권을 나누어 <소설 토정비결 2부>와 <징비록>으로 분권한 것이다.

 

사실 정도전은 이성계의 무력을 등에 업고 조선을 건국한 영웅이지만 조선조 500년 내내 역적으로 몰린 불우한 인물이다. 소설이 발표된 이래, 그동안 이런 시선을 받으며 억울하게 살아온 후손들이 내게 고맙다는 말을 여러 번 하셨다.

또 유성룡도 말년에 삭탈관직되고, 그가 속했던 동인이 완전 몰락하여 죽을 때 장례비가 없어 인근 선비들이 추렴해 장례물품을 마련할 정도로 안타깝고 쓸쓸한 인물이었다. 게다가 곧이어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서인들이 집권, 이후 150년 장기집권을 하는데, 이 과정에서 동인 소속 역사인물들은 철저히 배격되고, 그런 중에 유성룡은 소인배나 자아도취자로 악랄하게 취급되었다. 이명박이 국정원과 검찰을 동원해 노무현을 모욕하고 폄하해댄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런 정도전과 유성룡이 사극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이제야 우리 시청자들이 왕조사상, 봉건사상에서 벗어나 민주시민으로 탈바꿈하고 있다는 의미로 나는 해석하고 싶다.

 

적어도 전두환 시절까지 우리 국민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등을 봉건시대의 국왕처럼 모시다시피했다. 국기하강 때면 가던 걸음을 멈추고 차렷자세로 얼어붙고, 체육관에 불려가 선거를 치르면 100%에 가까운 찬성율을 보이고, 군인들이 투표할 때는 주임상사가 지켜보고, 대학생이라고 해봐야 '눈깔 부릅뜬 짭새들'(이 사람들도 민주시민인양 우리 사이에 숨어 잘 살겠지) 사이를 조심조심 비켜가며 강의실을 드나들고, 초등학생들마저 국민교육헌장을 외워대는 그런 국민이었다.

차지철 같은 하찮은 쓰레기가 박정희 장군을 극진히 모시던 스타일이 바로 <조선시대 간신들이 왕을 모시던 방식>이다. 민주국가에는 있을 수없는 살인, 폭력, 강도, 강탈 등이 죄다 충(忠)으로 미화되던 시절 아닌가.

 

지금도 일부 국민 중에는 박정희를 왕처럼 모시던 (종의) 근성이 남아 그의 딸 박근혜 씨가 나타나면 왕의 거둥을 보듯 달라붙는다. 민주시대 지도자라면 그가 어떤 이념이나 정책을 가졌느냐에 따라 호불호가 갈려야 하는데, 박근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능력이 있는지는 다 필요없고, 군왕이나 다름없던 박정희에게 굽실거리던 (당시 잘 먹고 잘 살던 경찰, 법조인, 언론, 군인, 공무원, 정보원, 유신 당원, 정경유착 경제인들이 아직도 살아 있어 그런 건지는 모르겠다만) 그 유습으로 '왕의 딸 즉 공주' 박근혜의 손이라도 잡아보려고 안달하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정도전, 유성룡이 한 시대 역사의 주체로서 사극에 등장하는 것은, 그래도 이 나라 민주주의의 미래가 결코 어둡지 않다는 반증이라고 확신한다. 물론 박근혜 대통령이 흙으로 죽을 쑤든 모래로 칼국수를 말든 무조건 지지하는 왕조시대 백성 같은 유권자가 대략 30% 내지 40%가 남아 있다는 게 꺼림칙하지만, 그래도 민주주의는 다수결이니 더 좋은 쪽으로 발전해갈 것으로 기분좋게 이해하고 싶다.

 

이런 점에서 나는 소설가로서 <사극의 민주주의 현상(민주주의는 왕이 아닌 민이 주인이라는 사상이다)>을 당긴 작은 공이라도 세웠다는 점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정도전은 약 600년만에, 유성룡은 약 400년만에 비로소 정당한 평가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