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 막내아우 재구와 함께 <소설 징비록>에서 유성룡과 함께 임진왜란을 회상하는 화자로 나오는 이효원 할아버지 묘소를 참배했다.
지금으로부터 45년 전, 내가 청양중학교에 입학하던 해 2월, 이효원 할아버지가 사시던 장승개로 들어가 당숙과 형들의 돌봄을 받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따라 처음 장승개에 들어가던 날, 동네에 사시는 어른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큰절을 올렸다. 누가 누군지도 모르고 동네 한 바퀴를 돌며 무릎이 아프도록 절을 해댔다. 그때 우리 집안을 이끌고 처음 청양 땅으로 내려오신 이관 할아버지와 그의 아드님 이효원 할아버지 묘소에도 절을 했다. 그냥 조상이라니 절을 했을 뿐 당시에는 누가 누군지 알지 못했다. 지금이야 인근에 대를 이어온 내 조상들의 무덤이 줄지어 있다는 걸 잘 알지만 그땐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15년 전쯤, 나는 우리 집안의 비밀을 몇 가지 알게 되었다. 내가 역사소설가가 아니라면 알 수 없는 은밀한 내용들이었다.
대략의 역사는 이러하다.
이관 할아버지와 토정 이지함은 서로 잘 아는 절친 사이였다.
이에 대해서는 <나와 토정 이지함의 400년 인연>이란 글로 정리해놓았다.
지금 드라마 징비록에 영의정으로 나오는 이산해는 토정 이지함의 조카인데, 어려서부터 이지함이 직접 가르쳤다. 그가 동인의 영수이니 우리 집안도 자연 동인이다.
임진왜란 발발 무렵, 이산해는 우리 관 할아버지보다 나이가 열어섯 살이나 어리지만 영의정 자리에 올라가 있었고, 관 할아버지는 이조참의에 있었다. 전쟁이 나기 직전에는 직급이 더 낮아 호종명단에도 들지 않았다. 아드님인 효원 할아버지는 직급이 겨우 정6품으로 당연히 호종할 의무가 없었다.
그런데도 관 할아버지는 대대로 녹훈을 받아온 가문이 국난을 피해서는 안된다며 칼 한 자루 들고 굳이 호종을 자처하셨고, 그 아드님인 효원도 어쩔 수없이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호종 길에 올랐다. 다른 사람들은 호종 명단에 들어도 눈치껏 도망갈 때였는데, 이 부자는 자청해서 '일본군의 표적'이 된 것이다. 당시 유성룡과 이산해도 개성에서 삭탈관직되었지만 끝까지 호종했는데, 다 같은 마음이었다.
직급이 낮은 효원 할아버지는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셨다. 이조정랑, 호조정랑, 병조정랑을 번갈아 맡아가며 군마를 담당하거나 군량을 담당하기도 했다. 어떤 때는 서류를 꾸며주기도 했다. 그러면서 매일매일 일어난 일을 적어 <호종일기>를 남기셨다. 아마도 선조실록을 편수할 때 큰 참고가 되었을 것이다.
관 할아버지는 호기 있게 임금의 호종길을 따라나섰지만 길을 떠나자마자 이질에 걸려 당신의 몸조차 운신하지 못했다. 게다가 동생이신 경상좌병사 이각이 동래부를 구원하지 못한 채 울산병영으로 물러났다가, 그마저도 군영을 이탈하여 임진강까지 후퇴했다가 왕명으로 처형당하자 그 충격으로 더 병이 깊어져 호종을 하면서도 큰 공을 세우지 못했다.
또한 나머지 가족들의 행방조차 모른 채 호종길에 올라 내내 근심했는데, 이때 내 직계이신, 효원의 막내동생 복원 등은 어머니, 형수, 아내 등 온 식구를 데리고 지금의 청양땅으로 은거하셨다. 그때는 토정 이지함이 잡아준 선산과 양택에 지은 우거가 한 채가 있었을 뿐인데 그리 피난한 것이다. 이때 전란을 피해 청양 땅에 살던 인연으로 나중에 온 가족이 낙향하는 계기가 되었던 듯하다.
전쟁이 끝난 뒤 관 할아버지는 이조참의직을 그만두고 청양으로 아주 내려오셨고, 효원은 승지를 맡아 일했고, 이후 광해군 대에 대사간이 되었다.
대사간이란 임금을 사사건건 반대하는 자리다. 비판하는 것이 이 직책의 본업이다. 하지만 동인이 소북 대북으로 갈려 치열하게 싸울 때 효원 할아버지는 소북파로서 대북파들과 호되게 맞붙었다. 영창대군 문제 때문이었다.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왕후를 폐위시키려 하자 이를 격렬히 반대한 것이다.
호종 과정에서 낮은 직급임에도 국왕 선조를 가까이서 보필한 공로로 선원공신 1등이 된 효원 할아버지는 선조 이균의 유지를 받들어야 한다는 이론을 폈고, 그게 광해군을 둘러싼 대북 세력들에게는 눈엣가시가 되었던 것이다.
결국 효원 할아버지는 파직되고, 거제도로 14년간 유폐되고 말았다.
여기서 내 피가 가끔 역류하는 그 DNA가 터져나왔다. 효원 할아버지의 아들 해 등 몇몇이 기어이 일을 만들었다. 무력으로 광해군을 뒤엎어버린 것이다. 대북은 모조리 잡혀 죽거나 유배되었다. 특히 효원 할아버지를 거제로 유폐시킨 이이첨, 정인홍 등 40명이 참수되고, 200명이 귀양에 처해졌다. 이때 이해 등 과거 소북이었던 사람들이 몇몇 참여하는데, 우리 집안 참여자 중 이해가 정사공신 2등, 이원이 정사공신 3등이 된다.
- 창의문과 정사공신 명단. 세검정에서 모의하고, 이 문을 거쳐 들어온 반군이 왕성을 들이쳤다.
인조반정에 대한 설명을 보면 서인이 일으킨 반정이라는 설명이 나오는데, 우리 집안같은 소북이 참여했다는 설명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대사간으로서 할 말을 다 하다가 거제도에 13년이나 유폐되었던 효원은 즉시 풀려나 공조참판에 제수되었지만 벼슬을 사양하고 아버지인 '관 할아버지'를 모신 땅 청양으로 낙향해버렸다. 이 무렵 효원의 어린 막내동생이던 내 직계 할아버지 복원은 진사가 되었지만 형의 거제도 유폐로 출사의 길이 막혀 역시 청양에 은둔 중이었다. 이후에도 효원 복원 형제는 이곳에 아주 뿌리를 내렸다.
이후 우리 집안은 해가 솟구치는 듯했지만 내 직계 할아버지 중 불행한 가정사를 당한 뒤 장승개에서 보이는 칠갑산 넘어 운곡이라는 심심산골로 아주 들어가버렸고, 아들의 아들, 그 아들의 아들, 또 그 아들의 아들을 거쳐 나마저 하늘만 빼꼼히 보이는 그 산골짜기에서 태어나 자라야만 했다.
- 앞에 보이는 집은 영모당으로 종택이었다. 선영에서 내려다본 것으로, 멀리 흐릿하게 보이는 곳이 칠갑산이다.
이곳 장승개마저 우리 선조들이 살던 하남이나 서울에서 보자면 멀고도 먼 땅인데,
내 줄기의 선조들은 저 깊은 산 깊은 계곡으로 은둔해버렸다.
- 이곳이 바로 사자산 자락에서 내려다본 운곡 마을의 끝.
고개를 들면 아래 사진이 찍힌다.
- 저 끝에 보이는 산이 보령 홍성 지역의 오서산이다. 그 다음이 백제의 마지막 왕 부여풍이
백제부흥군을 이끌고 싸우던 산으로, 청양에서 예산으로 이어지는 차령산맥의 지맥이다.
소나무에서 보이는 첫번째 산과 두번째 산 사이에 내가 태어난 집이 있다. 구름이 늘 걸려 있는 산골짜기,
그래서 운곡이다.
- 함평이씨 세거비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 함평이씨 16세손인 장포공(長浦公) 효원(效元), 진사공(進士公) 복원(復元) 형제는 한양에서 충청도 청양 장승개로 내려와 터전을 삼고, 진사공파 20세손 희식(喜植)이 운곡으로 옮겨와 일족이 매우 번창하였다.
한편 조선의 새 도읍지를 찾아 계룡산에 오른 무학대사가 서쪽으로 서기어린 산이 있어 가보니 그곳이 오늘의 사자산이다. 대사가 국사봉에 올라 서쪽을 바라보니 운곡이 왕궁터로는 비할 바 없이 좋은 명당이나 도읍이 되기에는 터가 좁다고 아쉬워하면서 그 기운이 곧고 힘차 장차 세 번 크게 흥왕하리라고 예언하였다 한다.
그뒤 운곡에 대찰가람이 들어차 불국토를 이루어 한 번 그 뜻을 이루고, 또 금광이 개발되어 팔도의 장정들로 북적거리고 엄청난 양의 금이 생산되었으니 두 번째 뜻을 이루었다고 한다. 한 번의 기회가 남아 있으니 운곡 마을 동민들과 우리 함평이씨 일가가 힘을 합쳐 그 영광을 일으켜야 할 것이다
운곡은 수많은 병란에도 단 한 차례 적의 침략을 받은 적이 없는 승지(勝地) 중 승지이니 후손 만대에 걸쳐 복락을 누리기 바라는 마음으로 이 비를 세우니, 마을을 드나들 때마다 경건한 마음으로 선조들의 뜻을 기리고 우리를 길러온 이 땅을 만대에 이르도록 잘 지켜주기 바란다.
2010년 4월
함평이씨 29세손 이재운 짓고, 이재정 쓰고, 28세손 이은범 세우다
물론 이후 우리 집안은 동인을 아주 버리고 서인으로 당을 옮겼으며, 이후 서인이 노론 소론으로 갈릴 때는 소론이 되었고, 소론이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뉠 때는 온건파가 되어 큰 당쟁에 휩쓸리는 일이 거의 없었다.
이 마을에 들어온 이후로는 다들 이름없이 소리없이 그림자처럼 구름처럼 살다 가셨다.
- 맨위가 토정 이지함이 자리 잡아준 우리 입향조 이관 할아버지의 묘소.
두번째 줄은 아들 이효원, 우리 직계 할아버지 복원의 묘소는 여기서 먼
공주 굴티에 계시다. 아래 불룩한 것은 할아버지들이 타시던 말의 무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은둔처사가 되지 않았다.
우리 집안에 무인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을 어릴 때부터 알았다.
또한 숙명적으로 뭔가를 비판해야 하는 대사간의 피가 흐른다는 것도 나이 서른살쯤에 알았다.
굴복하지 않고, 기어이 바로잡고야 마는 반정의 피가 흐른다는 것도.
그것이 나의 Y유전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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