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다 칼로 0730+ 1907.7.6
디에고 리베라 1060 1886.12.8
- 프리다 칼로의 사진
프리다 칼로는 멕시코에서 독일인 아버지와 멕시코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7세 때는 소아마비를 앓아 절룩거리며 걸었다.
하지만 18세 때 전차와 버스가 부딪히는 교통사고를 당해, 이때 옆구리를 뚫고들어간 쇠파이프가 허벅지로 삐져나왔고, 이 여파로 척추가 부러졌다. 1년간 깁스를 하고 이후 7회에 걸쳐 수술, 재수술을 거듭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리다 칼로는 그의 꿈을 향한 질주를 멈추지 않았다. 멈출 수 없는 0730이기 때문이다. 운명마저 거부한 프리다 칼로의 인생 역정은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 자화상(1944). 부러진 척추와 온몸에 박아넣은 못이 선명하게 표현되었다. 이 못들은 교통사고 때 박힌 것만이 아니다.
그의 남편 디에고 리베라가 박은 못이 더 많다.
전차 사고가 나기 이전, 그러니까 2년 전인 16세 때, 프리다 칼로는 그의 인생엣 당한 큰 사고 두 건 중의 한 건이라는 남편 디에고 리베라를 만난다.
1923년, 37세인 디에고 레베라가 멕시코시티 국립예비학교에서 <인간의 창조>란 주제로 프레스코벽화를 그리고 있었는데, 마침 프리다가 보고 흥미를 가진 것이다.
"일하는 걸 보고 싶으니 신경쓰지 말고 계속 그리세요."
어린 프리다는 이처럼 당돌하게 리베라에게 말했고, 21세라는 엄청난 나이 차이에도 두 사람은 곧 사랑에 빠졌다. 리베라는 당시 돌싱이었다.
- 디에고와 나(1931). 금슬 좋은 부부의 표정은 아니다. 물론 이렇게 함께 설 수도 없다.
남편의 별명은 식인귀, 호색한....
남편 리베라에겐 이미 아이가 넷이나 있었다. 아이를 낳는 것이 소망이었던 프리다는 끝내 아이를 낳지 못했다. 그럼에도 '호색한' 리베라는 외도까지 잦아 프리다를 마음 아프게 했다. 프리다의 동생까지 그의 상대였다.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던 그는 깁스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미 유명한 벽화화가로 유명세를 얻은 남편이 있었지만, 그는 틈만 나면 그림을 그렸다.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침대에 누워있는 자기 자신 뿐이었다. 남편은 벽화를 그리러 나갔거나 혹은 다른 여자를 만나라 나갔을 것이다.
- 1932년의 프리다 칼로(25세)와 디에고 리베라(46세)
- 헨리포드 병원(1932). 유산 후 침대에 누워 있는 자화상이다. 프리다는 그 몸으로 3번 임신했으나 3번 다 유산했다.
프리다는 이후 공산주의 지지자로 활동했으며, 소련의 레흐 트로츠키를 만나 그를 지지하기도 했다.
그의 가슴 속에서 불타오르는 열정은 21년 연상의 혁명가 디에고 리베라를 사랑하는 힘이 되어 평생 이 남편을 사랑했다(는 건 겉으로 보이는 표현일 뿐 그의 내면에서는 전혀 다르다. 실제 그림 속의 남편은 전혀 사랑스럽지 못하다.)
프리다가 죽은 날의 코드는 0635, 1954년 7월 13일이었다.
프리다의 미술작품은 크게 주목받지 못하다가 1970년대 페미니즘이 대두되면서 세간의 관심을 잡았고, 1984년 멕시코 정부는 그의 그림을 모두 국보로 지정했다.
이제 그의 그림을 감상해보자.
이따금 그가 남긴 말을 덧붙인다.
- 어머니 자궁에서 막 나오는 프리다 카로.
그의 처참한 인생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프리다 칼로는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좋아한다고 말했지만 그림은 이렇게 그려놓았다.
- 0110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 프리다가 안고 있는 건 그의 남편 디에고 리베라다.
우주가 두 사람을 감싸고 있다. 이 우주는 결코 평안한 우주가 아니다.
멕시코도 여성으로 표현되어 젖이 나오고 있다. 이 또한 풍요로운 나라가 아니다.
우주가 포옹하고, 지구가 포옹하고, 프리다가 남편을 포옹하지만....
이 포옹은 결코 포옹이 아니다.
프리다는 이렇게 말했다.
- 광기의 장막 저편에서는 내가 원하는 여인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난 하루 종일 꽃다발을 만들고, 고통과 사랑과 다정함을 그리면서 다른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비웃으리라.
그러면 모두들 말하겠지. 불쌍한 미친 년이라고.
나의 세계를 건설하겠다.
그것은 내가 살아가는 동안 다른 모든 세계들과 조화를 이루리라.
- 디에고와 나(1949)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이마에 그려진 남편 디에고 리베라는 혹시 천형天刑이 아니었을까.
남편 디에고의 호색한 기질은 마침내 프리다의 여동생 크리스티나에 이르렀다.
이때문에 이혼을 결심하고 떠나지만 몇 달 후 어쩔 수없이 돌아온다.
아래는 이 시기의 아픔이 잘 그려진 작품들이다.
- 상처들(1935) 난자당한 프리다가 침대에 누워 있고, 상처를 준 남편 디에고 리베라가 서 있다.
- 자화상(1940) 디에고가 사랑스럽다고 말하던 흑단 같은 머리칼을 잘라버렸다.
- 가슴 아픈 추억(1937)
- 희망은 사라지고(1945)
- 저기 내 치마가 걸려 있다.(1933)
그가 말한다.
- 나를 그린 것은 혼자일 때가 많기 때문이고
내가 가장 잘 아는 소재가 나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만의 현실을 그린다.
나는 그림을 그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림을 그린다.
나는 언제나 별 생각없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을 그린다.
이것이 내가 아는 전부다.
- 죽음에 대하여. 남편 디에고 리베라가 있던 자리에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47세로 세상을 떠나기 전 프리다 칼로는 "이 출발이 기쁨이 되기를...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이라고 소망했다. 남편 디에고는 살아 있었다. 그가 있는 세상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소망한 것이다. 디에고는 3년 뒤인 1957년 70세로 사망한다.
그가 말한다.
- 누구도 다른 누군가와 헤어질 수 있다.
누구도 자신만을 위해 싸우지는 않는다.
만물은 전체인 동시에 하나다.
불안, 고통, 쾌락, 죽음.
이들은 존재를 유지할 유일한 방법이고, 결국은 하나다.
아래는 자화상 모음이다.
두 명의 프리다(1939)
- 희망의 나무여, 우뚝 솟아라(1946)
- 자화상, 원숭이와 함께(1945)
- 자화상, 머리를 늘어뜨린(1946)
- 자화상, 0350 트로츠키에게 바친(1937)
* 나는 인간의 운명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결과라고 믿는다.
전에 <환생탐험대>를 쓰면서 태어나기 전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고, 그 설계대로 살기 위해 인생의 주요 대목마다 마킹을 한다고 그렸었다. 아마도 프리다 칼로는 소아마비, 교통사고, 나이 많은 바람둥이 남편 리베라 등을 마킹해두었는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그럴만한 용기와 불굴의 영혼이 있기 때문이다.
* 프리다 칼로의 작품 100여 점(자화상 6점 포함)이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내 소마미술관에서 6월 8일부터 9월 4일까지 전시된다. 당대 멕시코 화가 10인의 작품 30점이 동시 전시된다. 입장료 성인 기준 1만 3천원. 홈페이지 www.frid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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