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달마도를 수십 점 받아 봤는데, 아무래도 몇 가지 내가 아는 상식을 적어둬야겠다. 그 많은 달마도가 내게는 단 한 점도 남아 있지 않다. 받기 무섭게 버리거나 다른 이한테 줘버리기 때문이다. 내게 달마도를 주신 분들은 모르는 일이다. 예의로 받을 뿐, 내가 굳이 지닐 만한 가치는 없기 때문에 버렸다.
- 구글에서 <달마도/이미지>라고 치니까 이런 그림이 저절로 뜬다.
달마는, 붓다의 심법(心法; 붓다의 심법은 주고받을 수 없다. 오직 스스로 깨우쳐야만 얻을 수 있다)을 이어받은 제1조 마하 가섭 존자로부터 제28대 조사이자 인도의 마지막 조사이다.
그가 스승인 반야다라 존자로부터 심법을 받을 때 그의 고국 인도에서는 니란다대학이 세워졌다. 세계 최초이자 최대의 불교대학인 이곳에 신라 승려 혜초가 입학하고, 중국의 현장도 유학했다. 학생은 1만 명, 교수는 1천 명쯤이었다 한다.
이런 시점에 달마는 왜 동쪽으로 떠날 생각을 했을까?
어마어마한 규모의 불교대학이 세워졌으니 인도에서 불교를 더 널리 알리고, 거기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게 옳을 텐데 굳이 혼자서 중국을 향해 떠난 이유는 뭘까.
당시 중국에는 불교가 보급되어 있기는 했으나 사실 붓다를 '깨달은 인간'이 아닌 '神'으로 받아들인 대승불교가 도교를 대체하는 수단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도교의 상제(上帝;하늘의 최고 신) 자리를 불교의 붓다가 바꿔 앉고, 이 불교가 한반도로 건너오면서 굿당의 최고신인 산신 혹은 상제 자리를 붓다가 차지해버렸다. 이처럼 중국과 한국의 불교는 처음부터 기복불교였다.
달마가 중국에 도착한 것은 서기 527년 9월 21일(이하 음력), 양나라 땅 광주에 도착했다.
붓다로부터 법맥을 이은 조사가 왔다는 소식에 양나라 황제 소연(蕭衍 ; 무제, 이하 양무제라고 한다)은 사신 소앙(蕭昻)을 보내어 그를 서울인 금릉으로 영접했다. 지금의 난징이다. 도착 날짜는 10월 1일이다.
- 6세기경 양나라는 장강 이북과 이남을 두루 차지한 대국이었다.
양무제는 불교를 만나기 전 도교를 믿던 사람이다. 게다가 양나라를 창업한 군주다.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그는 황제가 된 이후 불교로 개종하는데, 부처님오신날에 "세세생생 불법을 믿겠다."는 맹세를 조서로 적어 반포할 정도의 광신도였다. 그는 유교의 禮와 도교의 無, 불교의 인과응보설을 엮은 삼교동원설(三敎同源說)을 저술하기도 했다. 이 한 가지 사실만 보아도 그가 믿었다는 불교는 붓다의 가르침이 아니라 현장 등 중국 스님들에 의해 신격화된 부처신을 믿는 기복불교였다는 걸 알 수 있다. 삼교는 절대로 동원(同源)이 아니다.
당시 신라, 백제, 일본에서도 양무제를 보살이라고 불렀으며, 그는 <황제보살>이라고 불리는 걸 아주 좋아했다.
(이무렵 황하 유역을 차지하고 있던 북조 즉 위나라에서는 황제를 여래라고 부르는 방자한 아부까지 나왔다. 그래서 이곳 중들은 황제를 가리켜 황제여래라고 불렀다. 황제가 곧 붓다란 의미다. 이런 신불교가 신라로 들어가 호국불교로 변신한다. 고려불교도 마찬가지다.)
탑을 무수히 세우고, 절을 짓고, 스님들을 공양한 양무제는 달마를 접견하고서 이 공덕이 얼마나 되느냐는 어리석은 질문을 던지게 된다. 붓다의 직계제자이며 심법을 이어받은 달마는 당연히 "없다."고 말한다.
기록으로 남아 있는 문답을 보자.
양무제 / 짐이 왕위에 오른 이후로 절을 짓고 경전을 쓰고 승려들을 만든 일을 가히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어떤 공덕이 있습니까?
달마 / 아무런 공덕이 없습니다.
양무제 / 어찌하여 공덕이 없습니까?
달마 / 말씀하신 것들은 다만 인간이나 천상에 태어날 수 있는 아주 작은 과보일 뿐입니다. 마치 형체를 따르는 그림자 같아서 비록 잠시잠깐 존재할 수는 있으나 실다운 것은 아닙니다.
양무제 / 그렇다면 어떤 것이 참다운 공덕입니까?
달마 / 청정한 지혜는 미묘하고 원만하여 그 자체가 스스로 空寂하니 이와 같은 공덕은 세상의 일로는 구할 수 없습니다.(아무리 설명해도 당신은 알아듣지 못한다는 의미)
양무제 / 어떤 것이 성스러운 진리로서 제일가는 도리입니까?
달마 / 넓고 텅 비어 있을 뿐 성스러운 도리란 없습니다.
양무제 / 짐을 마주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달마 / 모릅니다.
두 사람은 말없이 결별했다. 두 말할 필요가 없는 멀고 먼 거리가 두 사람 사이에 있었다.
중국불교는 이미 神佛敎로 변해 있었다. 붓다는 신이 아닌 인간인데, 그들은 신으로 떠받들고 있었다.
사실 그가 중국으로 건너온 것은 인도의 원시불교를 재건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인도불교는 비록 니란다대학이 서서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공부하기는 했지만 붓다의 심법은 날로 쇠약해져 신불교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붓다는 승진시켜 주지도 않고 병을 낫게 해주지도 않으며 죽음을 물리쳐 주지도 않았다. 붓다는 죽을 때까지 오직 진리에 의지하라는 말씀만 하셨다. 붓다가 말씀하신 최고의 진리, 즉 지혜는 다이아몬드 같으며, 위없이 뛰어나며, 번뇌를 당장 끊어주며, 악을 물리치는 것이라고 형용하셨다. 하지만 가섭, 수보리 같은 10대 제자 정도는 돼야 말귀를 알아들어 아라한이 되지 나머지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알지를 못했다. 지금도 우리나라 승려의 99.9%가 그 말뜻을 모를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0.01%는 혹시 몰라 남겨둔다.
니란다대학이 중국의 위나라, 양나라, 백제, 신라, 일본, 고구려 승려들, 유학생들이 몰려들어 성황을 이루긴 했으나 붓다가 높이 들어올렸던 진리의 횃불은 이미 꺼져 있었다. 달마는 그것을 보았다.
당장의 고통을 여의어 달라고 소원하던 인도인들은 결국 힌두신으로 돌아갔다. 힌두신들은 아들 낳게 해주는 신, 결혼시켜 주는 신, 직장 얻게 해주는 신, 아프지 않게 해주는 신, 병마를 이겨주는 신, 전쟁을 막아주는 신, 등등하여 인간계에서 일어나는 삼재팔난에 일일이 대응하는 신들이 즐비했다. 그러니 붓다의 정신세계를 이해하기 어려운 인도인들은 아주 쉽게 힌두교로 돌아서버렸다.
안타까운 일이다. 붓다가 금강경을 설할 때 천이백 비구가 참석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붓다 정도의 인물이 세상에 올 때는 그에 준하는 제자들도 다투어 하생했으리라. 하지만 그가 떠난 후 그런 위대한 제자들은 다시 오지 않았다. 아마도 붓다가 계신 천상으로 몰려갔으리라. 그러니 붓다 이후 붓다처럼 깨달은 이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오늘날 금강경을 만독(1만 번 읽으면)하면 기적이 일어난다,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미신을 거리낌없이 말하는 스님들이 많다. 다 거짓말이고 사기다. 금강경 따위 억독(1억 번 읽어도)을 해도 소용이 없다. 연등 달아도 소용없고, 절에 시주해도 소용이 없다. 내 말이 아니고 붓다의 말이다.
신불교에 빠져 있던 양무제는 달마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무지 그 뜻을 알지 못하였다.
힌두교에 무너지고 있는 인도불교를 떠나 신천지를 찾아온 줄 착각해온 달마는 큰 슬픔을 안고 양나라를 떠나 북쪽 위나라로 간다. 그것도 심심산골인 숭산 토굴에 은신하여 무려 9년간 침묵한다. 입을 열면 언제 죽을지 알 수가 없는 나날이었다. 이미 신불교가 널리 퍼져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시주해도 소용없다, 절 지어줘도 복 받지 않는다, 탑 세워도 아무 공덕이 없다, 이렇게 깽판을 놓는 붓다의 28대 정통 제자 달마는 중국 불교의 암덩어리나 다름없는 신세였다.
그뒤 여러 가지 기록이 있지만, 달마는 당시 신불교를 믿던 승려들에 의해 여러 번 독살 위기를 겪었다.
나는 그가 울면서 도로 서쪽으로 돌아갔다고 믿는다.
(탄허 스님 법문에는, 신격화한 불교를 퍼뜨린 광통율사와 보리유지선사 두 사람이 양무제에게 달마의 '불립문자 직지인심 견성성불은 정법이 아니라고 참소를 하여, 양무제가 사약을 내려 죽이고, 웅이산에 묻어버렸다고 한다. 승려는 화장을 하는 법인데 사약을 받고 죽은 죄인이라 묻었다는 의미다. 달마 설화와 맥이 통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런 달마건만, 오늘날 대한민국 스님들은 달마도를 그려 팔아먹으면서 시험에 척척 붙고, 승진운이 몰려오며, 돈 많이 벌게 해준다고 새빨간 거짓말을 한다. 사악한 마구니들이다. 달마 그림 그려 파는 모든 이가 다 사악한 이들이다.
다만 이런 말을 달마 그리는 스님에게 대놓고 하지는 마시라. 팔만대장경이라도 지키는 공덕이 그들에게 있다. 아프가니스탄이나 파키스탄, 이라크, 시리아 같은 데 있던 팔만대장경 등 붓다의 가르침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버렸다. 먼먼 후세에 아무리 눈 밝은 자가 그 나라에 나타나도 붓다의 음성이 적힌 불경을 접할 길이 없다. 이에 비해 한국에는 팔만대장경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덕분에 나도 25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붓다의 말씀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렇다. 더러 미신으로 불교를 지키는 스님이라도 <붓다의 말씀이 적혀 있는 불경>을 수호하는 공덕은 확실히 짓고 있다. 기복 불교라도 그런 공덕이 있다는 뜻이다. 나도 연등 달고, 불전함에 시주금 넣는다. 팔만대장경에 불 안지르고, 이교도에게 절 안뺏기고, 소중한 붓다의 말씀을 인연 있는 사람이라면 언제든 만날 수 있도록 지키고는 있으니 어찌 고맙지 않으랴. 이런 스님들이라도 안계시면 언제 다른 종교의 광신도들이 몰려와 불당에 불을 지르고, 팔만대장경을 태워버릴지 모른다. 그래도 지혜로 불에 타 없어지는 건 아니지만, 있는 길 한 번 없어지면 새로 내기가 너무 어려워진다. 아마도 불교가 다 없어진 뒷날 붓다의 지혜를 다시 가져올 이가 미륵이란 뜻일 거다. 지금은 미륵이 오지 않아도 불경이 충분하다. 붓다의 가르침은 확실히 살아 있고,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한 가지 사족.
달마 존자가 한 마디로 깔아뭉갠 황제보살 양무제 소연은 그뒤 어떤 공덕을 받았을까.
공덕이 하나도 없다던 달마의 말은 맞았을까?
그렇다. 양무제는 불교를 신불교로 이용하고, 정치권력에 이용했을 뿐 붓다의 심법과는 천리 만리 밖에 있었다. 그는 548년 북조 중 하나이던 동위(東魏)에서 도망쳐온 장수 후경을 받아들였다. 적장을 후대하면 안된다는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동위를 함락시킬 목적으로 후경을 중용했다. 그를 가장 중요한 하남왕으로 봉했다. 황하 이남, 장강 북쪽의 호랑이로 임명하는 어리석은 짓을 저지른 것이다.
결국 이 후경은 치라는 동위는 안치고 기수를 남쪽으로 돌려 금릉의 양무제를 쳤다.
양무제는 결국 황성이 포위된 상태에서 유폐되고, 마지막으로 꿀물이라도 달라는 그의 청마저 무시되었다. 참다하지만 그는 굶어죽었다. 그가 평생에 갖다 바친 재물이 산같이 높건만 막상 위기에 이르자 터럭만한 공덕도 그에게 주어진 것이 없다.
왜냐하면 붓다는 오직 지혜로써 문제를 해결하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는 지혜는 구하지 않고 있지도 않은 허망한 복을, 아무도 주지 않는 막연한 공덕을 추구했을 뿐이다.
- 말년의 양무제. 황제이건만 반란을 당해 굶어죽었다.
이런 점에서 인도에서 중국으로 왔다가 도로 인도로 돌아간 달마 스님의 노심초사가 새삼 읽혀진다.
달마 존자여, 걱정 마시기 바란다. 불경이 다 불타 없어지더라도 바이오코드는 있다. 바이오코드는 이치를 간단하게 밝힌다. 누구나 쉽게 배워 익힐 수 있으니 혹 없애려 한다고 해서 없어지질 않는다. 바이오코드를 뒷받침하는 현대 과학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나는 진리를 추구할 뿐 붓다를 추구하지 않는다. 달마도 그랬다고 믿는다. 그러니 어느 하늘에 계시더라도 걱정하지 않으셨으면 한다. 한국 땅에서 달마도가 유행하더라도 그저 웃고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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