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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운 작품/사도세자, 나는 그들의 비밀을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던 날의 참담한 기록

<영화 사도>를 보았다. 

딸이 재미있다고 말한다. 

그렇다. 거짓과 사기는 늘 달콤하다. 

이에 비해 진실은 얼마나 쓸쓸하고 재미 없는가.


<영화 사도>는 감히 진실을 말하지 못했다. 이 영화의 감독은, 사도세자 이선의 부인이자 정조 이산의 어머니이면서, 실은 영조 이금을 왕으로 만든 노론세력의 대표 집안인 홍씨 일가의 독점이익을 대리하는 혜경궁홍씨가 임의로 쓴 책 <한중록>을 텍스트로 삼았다고 고백했다. 한중록은 태생적으로 진실을 적을 수 없는 책이다. 박정희가 쓴 유신의 역사, 이완용이 쓴 조선역사를 읽고 싶다면 한중록을 믿어도 된다.


내가 보기에 사도는 두 번 죽는다. 사도가 죽을 때 영조가 죽인 형 경종 역시 두 번 죽는다.

희빈 장씨는 거듭 죽는다.

이 뿌리깊은 권력 게임을 <영화 사도>는 외면했다. 


나는 감히 말한다. 내 소설 사도세자는 그 뿌리를 건드렸다.

영조를 비유하자면, 그 자신 피를 토하는 마음으로 독립운동을 했다지만, 해방 이후 오로지 권력을 잡기 위해 이 나라 겨레의 살을 찢고 피를 뽑아낸 친일세력과 손을 잡은 이승만과 똑같다. 이승만은 해방된 조국에서 척결돼야 마땅한 친일세력을 도리어 전면배치하여 이 나라를 제2의 친일식민지로 만들었다. 일본인이 아닌, 일본인으로부터 교육되고 훈련된 이들 친일파들이 정계, 법조계, 군, 경찰, 학계, 예술계, 산업계, 금융계 등 요소에 포진되어 이 나라를 지배하기 시작하여 오늘날 70년이 되었다. 


<영화 사도>는 거짓말하고 있다. 이승만을 국부로 모시자는 세력들의 사고방식과 같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영화다. 마치 <영화 국제시장>이 비록 천만관객을 모았다지만 대한민국 현대사가 마치 흥남철수, 독일광부간호사파견, 월남전, 남북이산가족찾기 밖에 없는 것으로 거짓말한 것과 같다. 주인공이 죽기까지 4.19혁명, 5.16쿠데타, 10월유신, 10.26사태, 12.12쿠데타, 5.18광주항쟁, 1997년 외환위기 등이 있었다. 사나운 친일정권이 할퀴고 간 아픈 상처들이다. 진실을 외면하는 영화는 단지 오락물에 지나지 않으며, 선전영화나 다름없다. 진실을 추구하는 역사소설가로 살아온 나는 거짓에 속지 않을 것을 외치지만 내 목소리는 멀리 가지 못한다.


소설 사도세자 중 영화가 집중 조명한 부분을 소개한다. <영화 사도>와는 완전히 다르다.

이 글을 읽으면 어쩌면 <영화 사도>가 재미없을지 모른다. 그러니 영화를 본 뒤에 읽기 바란다.


사도세자 / 나는 아버지의 비밀을 알고 있다 

 

- 휘령전

 

“어서 산(祘)이를 데려와라!”

혜빈 홍씨가 급히 소리를 질렀다.

그는 세자빈이다.

“시강원에서 세손 저하를 모시고 휘령전으로 모시랍신다!”

궁녀들의 급한 발걸음 소리가 벽을 타고 후궁을 울렸다.

오래지 않아 경희궁 존현각에 머물던 산이 창경궁 경춘전으로 들어왔다.

날이 덥다 보니 그새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산은 올해 열한 살이고, 조선국 세손이다.

“급히 휘령전으로 오라는구나. 시강원 관리들이 서두는 걸 보니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가 보다.”

“휘령전이라면…… 세상을 하직할 때 마지막으로 고하는 곳 아닌지요?”

혜빈 홍씨는 똑똑한 아들의 물음에 대답할 겨를도 없이 종종걸음으로 달렸다.

세손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휘령전에 들어서서야 사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아버지.’

그동안 산도 궁중에 파다하게 떠도는 소문을 듣고 있었다. 하나도 믿을 것이 없지만, 믿기 싫었지만, 여기저기서 궁녀나 내관들이 쑥덕거리는 소리가 잦아들지 않았다. 어른들이 쉬쉬하면서 하는 말들이라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뭔가 복잡하고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건 어렴풋이 알았다. 어머니 혜빈 홍씨는 그것이 중상이고 모략이라고 아들에게 가르쳤다.

그 끈질긴 중상과 모략이 끝내 할아버지인 영조 이금을 궁지에 몰아넣은 것이다. 왕인 그로서도 더 이상 선택할 길이 따로 없었다.

지금 노론 대신들에게 잡힌 것은 세자가 아니라 바로 영조 자신이었다...............(중간 생략)

 


휘령전은 영조의 첫 왕비인 정성왕후 서씨의 사당이다. 사도세자의 생모는 영빈 이씨지만 효종, 현종 대의 예송 논쟁 이후 장자가 아닌 세자는 누구나 왕후의 적자로 입양된다. 법적인 절차가 그러하니 세자의 법적인 어머니는 정성왕후다.

“왜 무명옷을 입었느냐? 철없는 것!”

“아바마마, 신은 평소에는 무명옷을 입사옵니다.”

“시끄럽다! 어서 절을 드려라.”

세자는 휘령전으로 들어가 네 번 절했다.

그러자마자 영조가 뒤를 돌아 모여든 신하들을 향해 말했다.

“자네들은 신령의 말씀을 듣지 못했는가? 지금 내게 말하기를 변란이 호흡지간에 있다 하신다.”


세자는 도로 휘령전 앞마당으로 내려가 또 무릎을 꿇었다. 숨을 헐떡거렸다. 세자는 이즈음 병이 있다고 잘 나다니지 않았다. 오늘만 해도 영조가 부르는데도 몇 번이나 꾸물거리다가 겨우 나온 것이다. 누가 보아도 병색이 완연하다.

세자 시강원 관리들이 승지에게 그 사실을 말했다.

승지는 영조에게 귓속말로 전했다.

“전하, 세자께서 병이 있으니 견디시기 어렵겠사옵니다.”

“쓸데없는 소리!”

영조는 승지를 물리쳤다.

“시위 군사 들어오라!”

군사들이 곧 휘령전으로 뛰어 들어왔다.

“칼을 뽑아 들어라.”

시위 군사들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머뭇거렸다. 그러는 걸 영조가 한 군사의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번쩍 쳐들었다.

“왜 칼을 안 뽑느냐! 너희마저 왕명을 우습게 여기느냐!”

그제야 시위 군사들이 일제히 칼을 뽑아 들었다.

“휘령전을 둘러싸되 칼을 높이 쳐들어라. 선전관!”

선전관이 뛰어나갔다.

“지금 즉시 궁궐 수비를 철저히 하라고 일러라. 변란이 호흡지간에 있다고 하시지 않느냐!”

영조는 미친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의 아버지 숙종도 종종 이런 적이 있다. 미친 사람처럼 광포하게 굴어 신하들의 혼을 쏙 빼놓고는 왕명을 마구 뿌려대는 것이다.

격노한 영조가 느닷없이 세자에게 물었다.

“관을 벗어라. 신발도 벗어라. 그러고는 땅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려라.”

그때 대신들이 닫힌 합문을 억지로 열고 몰려들었다. 시강원 주서 이광현이 이 사태에 놀라 조정 대신들을 부른 것이다.

영조는 대신들이 들어오는 걸 보고도 못 본 척 이리저리 걷다가 갑자기 돌아서서 신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시위 군사들은 어째서 대신들이 무단으로 들어오는데도 막지 않느냐! 내 말이 안 들리더냐! 너희 눈에는 임금이 보이지 않느냐!”

시위 군사들이 벌벌 떨었다. 칼을 쳐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팔이 저린데 자칫하다가 무슨 날벼락을 맞을지 알 수가 없다.

“당신들은 과인이 부르지 않았거늘 왜 여기에 온 거요? 여긴 과인과 세자가 사사로이 할 일이 있어 찾아온 거요. 그대들과는 상관없소.”

영의정 신만, 좌의정 홍봉한, 중추부판사 정휘량, 도승지 이이장, 승지 한광조가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왕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 자체로 금과옥조다. 죽이라면 죽이고 살리라면 살린다.

“영의정, 좌의정, 중추부판사, 도승지 네 사람 모두 파직하오. 물러가시오!”

대신들은 영조의 기세에 눌려 도로 나갔다.

시강원 관리들은 대신들마저 쫓겨나가자 이번에는 세손을 데려오기로 했다. 그래서 급히 산을 부른 것이다.

산이 휘령전에 다다르고 보니, 아버지인 세자 이선이 휘령전 앞마당으로 끌려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얼굴에 핏기가 사라져 하얗게 질려 있다.

오전 10시.

한창 여름이라 벌써 염천이다. 서 있기만 해도 땀이 흐른다.

이산은 눈치를 챘다. 아버지인 세자를 할아버지 영조가 벌하는 것이다. 더구나 정성왕후 사당인 휘령전에서 이러는 것은 죽이겠다는 뜻이다. 열한 살 이산은 한눈에 사정을 다 파악했다.

그러자마자 이산은 관을 벗고 땅바닥에 엎드렸다. 아버지가 그러고 있는데 아들이 서 있을 수가 없다.

“할바마마, 잘못했사옵니다. 우리 아버지를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혜빈 홍씨도 무릎을 꿇고 앉아 머리를 땅바닥에 대고 빌었다.

세손 이산은 울면서 엉금엉금 기어 아버지 세자에게 다가갔다. 병을 앓는다더니 벌써 숨이 차는가 보다.

“아버지, 어서 할바마마에게 살려 달라고 용서를 비세요. 어서 비세요.”

사람들이 차마 보지 못하여 저마다 흐느꼈다.

영조가 별군을 가리키며 냅다 소리 질렀다.

“어서 세손을 안아 밖으로 나가라.”

별군이 달려들어 세손을 안으려 하자 이번에는 세자가 소리를 질렀다.

“하늘은 높고 땅은 낮은 법인데, 세손 스스로 나가는 게 옳지 네가 감히 세손을 끌어내려 하느냐! 네놈 이름이 무엇이냐!”

“저, 김수정이옵니다. 하오나 어명을 받았으니 세손을 모시고 나가겠사옵니다.”

그는 세손을 번쩍 안아 들고 휘령전 밖으로 나갔다.

“흉악한 놈!”

영조는 씩씩거리며 휘령전을 한 바퀴 돌았다. 환관들이 영조를 따라 함께 휘령전을 돌았다.

그러다가 세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더니 큰 소리로 물었다.

“어젯밤 월담하려다가 낙상하였느냐? 네가 감히 아비를 죽이려고 허리에 칼까지 차고 다닌단 말이냐?”

“…….”

“네가 나를 죽이지 못해 내 귀신을 빈소에 가둬 놓았다는 게 사실이냐?”

“…….”

 

비록 합문 밖에 있기는 하나, 문무백관이 모두 이 광경을 숨을 죽이며 지켜보고 있다. 그들 대부분은 노론 벽파에 속한 신하들이다. 방금 전까지 세자의 비행을 시시콜콜 고해 바치며 죽여야만 한다고 핏대를 올린, 이 나라의 실질적인 주인들이다. 비록 국왕이라도 이들이 가리키는 곳만 봐야 하고, 이들이 하는 말만 들어야 한다. 그들은 거침없이 말한다. 천한 무수리의 자식을 왕으로 만들어 준 것은 바로 노론이고, 그를 지키는 것은 벽파라고. 하여, 오늘 그들의 말을 왕이 잘 알아들었는지 지켜보는 중이다.

 

세자는 영조의 물음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미 역사는 기울었다. 기운 것을 일으켜 세울 힘이 그의 아버지 영조에게는 없다.

임금과 세자의 싸움이 아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싸움이 아니다. 이것은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싸움이다.

영조는 비록 아들인 세자에게 묻고 따지는 것이지만, 사실은 노론 벽파 신하들이 쫑긋 세우고 있는 그 귀를 향해 말해 주는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말을 해 주지 않으면 다음에는 그가 죽을지도 모른다. 그는 형 경종이 어떻게 죽었는지 잘 안다. 이들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떻게 자신을 죽일지 아무도 모른다.

 

어린 세손도 합문에 매달려 휘령전 안팎을 돌아보았다. 대신들은 눈을 번뜩이며 할아버지 영조를 위협하고 있다. 영조는 그들을 상대로 힘에 부치는 싸움을 벌이고 있다. 저 부릅뜬 눈들, 할아버지조차 그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다.

‘제발 아니라고 한마디만, 한마디만…….’

영조도 세손도 속으로는 이렇게 빌고 있었다.

나약한 왕권으로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아슬아슬하게 지켜 온 그의 머릿속으로 조선의 역사가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얼마나 많은 국왕들이 권신들에게 조롱당하고 쫓겨나고 죽임을 당하였던가?

이 순간, 세자 문제를 잘 처리하지 못하면 저들은 분명코 영조 자신의 왕권마저 짓밟을 것이다. 형 경종이 게장과 감을 함께 먹고 시퍼렇게 죽은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경황이 없어 노론 신하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지만, 그들의 패악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경종의 어머니인 대빈 장씨를 죽인 것도 그들이다. 그 사악함을 두 눈으로 보았다. 물론 영조 자신도 그 사악함의 한가운데에 있었지만 막상 왕위에 앉고 보니 조석으로 불안하고, 밤이 되면 위사들이 제대로 서 있는지 내다보곤 한다.

수많은 생각이 그 짧은 순간에 일어났다 사라졌다.

 

영조는 다시 물었다.

“세자는…… 대답을 하라!”

속으로는 처참한 심경이건만, 영조는 문무백관을 의식하여 억지로 목소리를 드높였다. 그 목소리는 이미 피 끓는 절규로 바뀌었다.

“…….”

세자는 땀을 비 오듯이 흘렸다. 스물여덟 살인데도 더워서 힘든데, 그의 아버지 영조는 예순아홉 살이나 된다. 그런데도 아침부터 이러고 있다.

이 자리에서 아니라고 한들 노론 벽파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아버지 영조마저 위태롭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가 살기 위해 그가 죽어야 한다.

영조는 그런 아들을 내려다보며 고민했다.

어떻게 할 것인가. 한 번 더 기회를 주어 다시 세자를 친국할 것인가, 아니면 용서할 것인가.

합문 밖에 떼를 지어 모여 있을 노론 벽파 신하들을 생각해 보았다. 잔인한 사람들이다. 지금 당장 목을 베라는 듯 사뭇 날카로운 눈빛들일 것이다.

‘빌어먹을! 선왕 누구도 제 자식을 친히 죽인 분은 안 계셨다. 내가 어쩌다 세자를 죽여야만 하는 왕이 되었을꼬.’

 

결론은 의외로 쉬운 곳에서 났다. 영조의 눈에 합문 밖 문틈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세손 산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 내 세손이 있지!’

영조는 의소세손이 요절한 뒤라 산이 태어난 그날 즉시 세손으로 정하였다. 그러니까 영조가 죽으면 세자가 왕위에 오르고, 세자가 죽으면 세손이 왕위에 오르는 것이다. 손이 귀해 미리 정한 것이다.

세손 이산은 사리를 분별할 줄 아는 열한 살이다. 게다가 워낙 영특하다. 영조가 몇 년만 더 살아 주면 산은 거뜬히 스무 살이 된다. 그의 아버지 숙종 이순은 불과 열네 살에 왕이 되었다. 그에 비하면 세손은 더 잘할 수 있는 나이까지 그가 버틸 수 있다고 믿었다.

스무 살, 그러면 왕위를 너끈히 지켜 낼 수 있을 것이다.

세자는 적이 너무 많다. 그놈들을 다 죽이면 모르되 그러지 못하면 세자가 죽는다. 그의 형 경종이 신하들에게 죽는 걸 똑똑히 보았다. 경종은 세자 시절부터 살해 위협을 받으며 겨우 왕이 되었지만, 불과 5년 만에 독살되었다. 게장과 감을 갖다 준 것은 대비 인원왕후였지만 의관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내관이나 궁녀들이 어떤 짓을 했는지 영조도 다 모른다.

그럴 바에야 세자를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안전하게 세손에게 왕위를 전하는 것이 맞다.

‘그렇다, 종묘사직은 우리 세손이 이어 가면 된다. 내 아들 세자야, 네가 종묘사직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다오.’

영조는 마침내 세자에게 칼 한 자루를 집어던졌다.

“자결하라!”

그의 목소리는 비장했다.

합문 밖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는 노론 벽파 신료들도 그렇게 들었다.

칼자루가 툭 하고 세자의 발 앞에 떨어졌다.

“세자는 그 칼로 자결하라!”

휘령전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하다. 숨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모두 긴장했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 자들도 있으리라.

영민한 세손은 휘령전 밖에 운집한 권신들을 하나하나 찬찬히 둘러보았다. 그 얼굴을, 그 이름을 낱낱이 기억해 두고 싶었다.

세자는 어처구니가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햇빛에 반짝거리는 마당의 흙을 들여다보았다. 날은 왜 이렇게 더운가. 속에 입은 베옷을 타고 땀이 줄줄 흐른다. 입술은 바짝 타오른다. 영조는 물 한 모금 주지 않았다.

할아버지 숙종대왕이 대빈 장씨더러 자진하라고 명했다더니, 지금 아버지 영조는 세자인 그더러 자진하라고 한다.

한 상궁은 그렇게 말했다. 숙종대왕은 대빈 장씨를 너무나 사랑했지만, 노론 신하들이 무서워 하는 수 없이 자진하라는 어명을 내렸다고.

일국의 왕이 사랑하는 여자도 지키지 못하여 신하들의 눈치를 보아 가며 자진령을 내린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숙종대왕은 대빈 장씨가 자진하자 그 어떤 상례보다 더 극진하게 치렀다. 세자이던 경종에겐 3년 동안 상복을 입으라고도 지시했다. 숙종대왕은 대빈 장씨의 무덤을 정하는 일도 어찌나 신경을 썼는지, 자리가 나쁘다고 천장하는 일까지 손수 살폈다.

 

그러니 지금 아버지 영조가 세자더러 죽으라는 게 뜻밖의 일은 아니다. 한 상궁, 이 상궁 말대로 궁에서 일어나는 일은 조석으로 변하고, 낮밤으로 뒤바뀐다고 했다. 충신이 역적이 되고, 역적이 다시 충신이 되는 일이 반복해서 일어나고 있다는 뜻이다. 궁궐은 언제나 먹구름이 자욱한 곳이라 천둥이 칠지 비가 내릴지 아무도 모른다.

아버지 영조가 미친 짓을 자주 벌이는 것도, 신하들이 임금의 생각을 읽지 못하게 하려는 술수라고 했다. 그래야만 왕이 신하들을 다스릴 수 있다고 한다.

도대체 이토록 어처구니없는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누가 이 사건을 뒤에서 사주하는 것일까. 묵시적으로 동조한 자는 또 누구인가? 그 자리에서 세자를 죽일 수밖에 없도록 임금을 몰아간 자들이 누구인가?

세손은 눈을 부릅뜨고 사태를 지켜보았다. 누가 아버지 왕세자를 죽이려 하는가, 누가 살리려 할 것인가. 세손은 머릿속에 그 장면들을 생생하게 집어넣었다.................(중간 생략)

 

세자는 영조의 명을 받지 않았다.

자꾸만 이마에서 눈으로 흘러내리는 땀을 주먹으로 훔쳤다.

‘이것이 왕권인가? 아바마마는 자식을 죽일 수밖에 없는 나약한 왕인가? 나는 여기서 죽어야 하는가?’

세자는 스스로 결론을 내지 못하고 고개를 수그린 채 생각만 했다.

영조는 휘령전을 한 바퀴 다시 돌더니 세자를 재촉했다.

“어서 자결하라! 날이 덥구나.”

이로써 세 번째 명령이다.

임금으로서 네 번이나 같은 명령을 내릴 수는 없다. 세자도 그것을 잘 안다.

세자의 아들인 이산도 그것을 안다. 그는 울음을 터뜨리면서 영조가 들을 수 있도록 소리쳤다.

“할바마마, 제발 어명을 거두어 주소서! 아바마마를 살려 주옵소서!”

영조는 멈칫했다.

세자도 고개를 들어 아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합문 쪽을 바라보았다.

“아버지, 어서 살려 달라고 하세요!”

영조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안 된다. 이미 내 권한을 넘어섰다. 세자야, 아비의 힘은 그것밖에 안 되느니라. 내가 아무리 너를 살려 두고 왕위를 넘겨준다 한들 저 사악한 신하들이 너를 살려 두지 않으리라. 어차피 죽는다. 내가 이만큼이나 목숨을 보전한 것은 저놈들 비위를 적절하게 맞춰 왔기 때문이다.’

보다 못한 시강원 관리들이 합문 밖에서 세자를 살려 달라고 입을 모아 악을 쓴다.

“주상 전하, 세자를 살려 주소서!”

“주상 전하, 신들이 잘못 모신 죄를 벌해 주소서!”

그들의 목소리는 가늘다. 무겁게 내리누르는 노론의 눈빛을 거스르기에는 역부족이다. 번번이 묵살당한 똑같은 주장이라 힘이 없다. 목소리에 힘이 없으니 금방 꺼진다.

세자와 세손은 문무백관들의 이야기를 똑똑히 들었다. 시파들이 한마디 하면, 혹시나 하여 벽파가 나서서 처벌의 불가피성을 이야기했다.

어쨌든 결론은 이미 난 것이다.

세자는 끝내 자결할 생각이 없다.

‘왕권을 찾아야 한다!’

영조는 마음속으로 다지며 합문 쪽으로 걸어가 울고 있는 손자에게 분부했다.

“산, 이리 오너라.”

영조는 합문을 열게 하여 가까이 다가온 손자를 와락 끌어안았다.

큰아들 효장세자는 오래 전에 죽었다. 가까스로 아들을 낳아 세자로 삼은 게 하나뿐인 세자 이선이다. 세자를 죽이고 나면 혈육은 이 손자 하나만 남는다. 이 손자마저 지키지 못하면 왕통은 여기서 끊어진다.

아마도 벽파들은 그것을 바랄지도 모른다. 전에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을 때, 그들은 소현세자의 증손자인 밀풍군 탄을 왕으로 삼으려 했다. 아마도 이 벽파들은 손자인 산까지 죽여, 저희들 입맛에 맞는 왕족 하나를 잡아다가 마음껏 부려먹을지도 모른다. 놈들이 해 온 짓으로 볼 때 그러고도 남는다.

 

“산아, 너는 여기 있으면 안 된다.”

영조는 혜빈 홍씨에게 흉한 일이니 세손에게 보이지 말라고 당부했다.

궁인들에게 이끌려 가는 손자의 울음소리가 멀어지자, 영조는 세자 시강원 관리들까지 다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너흰 세자를 잘 뫼시지 못한 죄인들이다. 썩 나가라!”

세자 시강원 스승인 윤숙, 임덕제는 영조 앞으로 달려가 무릎을 꿇고 세자를 살려 달라고 곡을 하다시피 소리를 질렀다. 숫제 목숨을 걸었다.

“시끄럽다, 어서 나가!”

영조는 날이 너무 더워 휘령전 마루에 걸터앉아 잠시 쉬었다. 지친다. 힘들다.

아침부터 벌써 몇 번째인가. 힘들면 들어가 쉬고, 기운이 나면 또 나와 소리를 질렀다. 그러기를 벌써 놀이 보이는 저녁이다.

마지막으로 한림 임덕제가 하는 수 없이 울음을 그치고 물러나오는데 지친 세자가 그의 옷자락을 잡고 일어났다. 정신이 혼미하여 세자도 나가라는 줄 알고 따라 나가다가, 신하들이 어서 돌아가라고 하여 발길을 돌렸다. 그러고는 담장 아래로 가서 소변을 보고는 거기 주저앉았다.

환관이 청심환을 찬물에 풀어서 한 바가지 올리자 세자는 목이 말랐던지 벌컥벌컥 들이켰다.

합문 열린 틈으로 시강원 관리들이 세자더러 어서 휘령전 마당으로 돌아가라고 손짓했다.

세자는 휘령전 앞마당으로 가 다시 무릎을 꿇었다. 영조는 다시 돌아와 있는 아들 세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도 하루 종일 생각 중이다. 죽여야 하나 말아야 하나, 다른 수는 없나……. 이 처지가 화가 나면 길길이 날뛰다가도 세자가 너무 지쳐 헐떡거리면 마음이 짠하여 일부러 휘령전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면 또 시강원 관리들이 합문을 열고 들어와 물을 주고, 수건을 건네 땀이라도 닦게 했다. 그 사이 소변도 보고 간단히 요기라도 하는 것이다.

 

오후 8시, 막 해가 져서 그나마 시원하다.

영조는 환관이 가져온 죽을 조금 떠먹었다.

그러고는 변소에 다녀오더니 환관을 불렀다.

“뒤주를…… 대령하라.”

한참 있다가 어디선가 뒤주가 들어와 휘령전 뜰에 놓였다. 가져온 사람을 보니 장인이자 좌의정인 홍봉한이다. 그는 세자를 측은하게 돌아보더니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돌아선다. 사위를 살려 달라는 말 한마디 안 하고 그는 합문 밖으로 나가 버렸다. 합문 밖에서 세자의 스승인 윤숙, 임덕제가 홍봉한에게 대들었다. ‘세자를 죽이려는 흉한 자’, ‘사위 죽으라고 뒤주를 갖다 바치는 놈’이라는 규탄이 시끄럽게 들려왔다.

영조가 마당으로 내려서서 뒤주를 살펴보더니 세자를 바라보면서 속삭였다. 목소리가 낮으니 담장 아래 서 있는 환관이며, 합문 밖 대신들은 영조가 뭐라는지 들을 수가 없다.

“세자는 뒤주로 들어가라.”

“아버지! 살려 주십시오!”

세자의 간절한 목소리는 담장을 넘어간다. 혜빈 홍씨도 울고 세손 이산도 운다. 영조는 다시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바보 같은 놈, 넌 스스로 명을 재촉했다. 아비라고 무슨 대단한 힘이 있는 줄 알았느냐? 이 아비가 왕이 되고, 왕위에 앉아 있는 것이 무슨 돌이나 나무처럼 가만히 있어서 그리된 줄 아느냐? 등신 같은 놈. 시강원에서 대체 뭘 배웠기에 세상을 물정을 그리 모르느냐? 왕은 칼에 찔려도 안죽고, 독약을 먹어도 안죽는 줄 알았느냐?”

“아버지, 저는 세상의 이치를 알기도 전에, 왕도를 배우기도 전에 아버지의 비밀부터 먼저 알았사옵니다.”

“그러게 그년들이 악귀들 아니더냐!”

저승전 상궁들을 가리켜 하는 말이다.........................(중간 생략)

 

“세자야! 아니, 넌 아까 폐위시켰으니 세자가 아니지. 선아!”

“예, 아바마마!”

“넌 그냥 내 아들일 뿐이야. 세자도 아니고 서인이야. 내가 어찌 네놈의 아바마마냐. 서인 주제에 감히 왕을 호칭하려 드느냐! 전하라고 부르거라.”

“할머니도 서인이었사옵니다. 서인이 뭐가 어쨌다고 그러시옵니까.”

또 무의식중에 튀어나왔다. 그래서 영조가 펄펄 뛰는 건데 세자는 아직도 사태 파악을 못하고 있다.

“뭐, 뭐라고? 네놈이 지금 내 어머니가 무수리라고 얕보는 거냐! 너는 무수리 손자 아니더냐!”

“왕후장상의 씨는 따로 있지 않습니다. 소자는 할머니가 전혀 부끄럽지 않사옵니다.”

아직도 둘이서만 나누는 대화니 환관이나 대신들은 듣지 못한다. 부자지간이 아니면 나눌 수 없는 말이 마구 오간다.

“하이고, 다 틀렸다. 다 틀렸도다.”

그러고는 합문 쪽을 향해 소리 질렀다.

“산아! 세손, 이리 오너라! 내가 목이 타니 물 좀 들려 보내라.”

잠시 뒤 열한 살 세손 이산이 물그릇을 들고 종종걸음으로 들어왔다.

걸음걸이도 바르고, 얼굴은 품격이 있다. 의젓하다.

‘그래, 저 아이에게 앞날을 맡기자.’

영조는 세손이 바치는 물그릇을 받아 벌컥벌컥 마셨다.

“너도 좀 마시거라.”

“전 조금 전에 청심환 탄 물을 마셨사옵니다.”

“뒤주에 들어가면 아무도 물 안 준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마셔 두어라.”

세자는 하는 수 없이 물을 마셨다.

그러는 사이 영조는 세손을 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눈물을 글썽거린다. 세손이라도 지키자, 지금 그런 결심을 하고 있다.

“산아. 네 아비하고 할아버지는 할 얘기가 있으니 너는 이제 나가 보거라. 합문 밖에 서 있지 말고 어서 네 처소로 돌아가라.”

“할바마마, 아버지를 용서해 주세요. 꼭 살려 주세요.”

“알았느니라. 어서 나가라. 여긴 흉한 곳이다.”

세손이 물러나자 영조는 그제야 고함을 질렀다.

하루 종일 뙤약볕에서 소리 질러 지칠 법도 하건만, 그의 목청은 휘령전을 뒤흔들었다.

“이제 그만 뒤주로 들어가라!”

추상같은 어명을 느낀 세자는 휘청거리며 일단 뒤주 속으로 들어갔다.

궁중에서 쓰는 큰 뒤주라 그리 좁지는 않다.

“명심해라. 너는 세자가 아니라 서인이니라! 그냥 장삼이사요, 아니 우수마발이다.”

“뒤주를 닫아라!”

“뒤주에 풀을 덮어라!”

영조의 나이 예순아홉, 세자의 나이 스물여덟, 손자 산의 나이 열하나다.

그제야 영조는 휘령전을 나가 창덕궁으로 돌아갔다. 환관들도 물러나고 대신들도 다 흩어졌다. 왕명을 받은 군사들 몇이 남았을 뿐이다.

 

이날 밤, 이산은 어머니 몰래 휘령전 앞 뒤주 곁으로 다가갔다. 군사들이 지키고 있지만 이산인 걸 알고는 못 본 척한다. 군사들이야 어찌 세자를 죽이랴, 이러다 말겠지 여기는 듯하다.

“아버지.”

“오냐, 우리 산이구나.”

“할바마마께 왜 살려 달라고 하지 않아요?”

“산아, 잘 들어라. 원래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야 하지만 할아버지는 왕이시니 돌아가실 수 없고, 대신 나라도 죽어야 한다. 할아버지께서는 큰 죄를 지은 게 있으시다.”

“아버지, 목이 마르시지요? 제가 물 가져왔으니까 여기에 입을 대고 마시세요.”

이산은 뒤주 한쪽을 톡톡 두드리고 나서 호리병에 담아 온 물을 흘려 넣었다.

“고맙구나. 우리 산이가 똑똑하구나. 그러지 말고 뒤주 뚜껑을 열어라.”

세손이 뒤주 뚜껑을 열려고 보니 너무 높다.

세손은 군사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리 오너라.”

세손이라고 말투가 다르다. 시강원에서 배운 말투다.

“뒤주 뚜껑을 열어라.”

“왕명이 지엄한데…….”

“어허, 그럼 뒷간에도 안 보낼 것이냐!”

“아, 예예.”

군사는 할 수 없이 뒤주 뚜껑을 열었다.

지친 세자가 힘겨워하자 군사가 밖으로 끌어내주었다.

“아이구, 답답했는데 이제 살 것 같구나. 너는 저리 물러가라.”

군사는 담장 쪽으로 물러났다.

세자는 아들 산의 여린 손을 잡았다.

“아이구, 우리 산이 제법 컸네. 시강원에서 무술도 배우라고 하지 않던?”

“어제는 화살을 쏘아 봤어요.”

“난 네 나이 때 매일 궁녀들과 더불어 칼싸움을 하면서 놀았다. 그러다 들켜 경을 쳤지만.”

“저는 공부하는 게 참 재미있어요. 칼싸움은 싫어요.”

“짜식, 그러니까 할바마마가 너를 좋아하시는 거다.”

“아버지도 그러시지 말고 공부 좀 하시고, 예예 그러세요. 왜 자꾸 할아버지 말씀에 기어이 한마디씩 하시냐구요.”

“이놈아, 너도 지금 아비 말에 토를 달잖아?”

“아버지야 안 무서우니까. 할바마마는 너무 무서워요. 창덕궁에 놀러 갔다가 죄인들 머리를 자르는 걸 보았다니까요. 할바마마가 다른 사람처럼 보였어요.”

“할바마마는 진짜 무서운 분이야. 두고 봐라, 아버지를 반드시 죽이시고 말 거다. 당신 형도 죽이셨는데 아들 죽이시는 건 일도 아니지. 할바마마는 참 죄를 많이 지으셨다. 내 생모이신 영빈께서는 오늘 이곳에 나타나지도 않으시잖니. 그만큼 무서우신 게다. 네 어머니도, 외할아버지도 무서워 벌벌 떠시잖니.”

구름 사이로 나온 달빛이 나뭇잎 사이로 비쳐 든다. 보름이 지난 지 며칠 되니 조금씩 일그러져 달빛도 점차 흐려진다. 한여름이긴 하지만 부자간에 몰래 대화를 나누기에는 좋은 밤이다.

“할아버지가 무슨 죄를 지으셨어요?”

“아비를 죽이라고 소리 지르는 신하들 보았지? 노론 벽파라고 하는 악귀들이다. 그 사람들이 옛날에는 선왕이신 경종 전하를 독살하고 그 자리에 할아버지를 앉힌 것이란다.”

“감히 신하들이 왕을 독살해요?”

“그러니까 무서운 놈들이지. 그전에는 선왕의 모후이신 대빈 장씨 마마를 자진시켰다. 저놈들이 하는 말은 언제나 죽여라, 죽여라 이 말뿐이다. 네 할바마마는 저들이 쥐고 흔드는 꼭두각시다. 난 꼭두각시가 되기 싫어,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저들이 막았다. 조금이라도 백성을 생각해 무슨 일을 하면, 저들이 기어이 트집을 잡아 나를 헐뜯고 비난했다.”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해요?”

“세상에는 역적도 충신도 없다. 힘이 생기면 충신이 되고, 힘이 빠지면 역적이 되는 것이다. 왕이라도 죄인을 마음대로 죽이지 못한다. 신하들이 죄인이라고 해야 죄인이 되고, 아니라면 무죄 방면해야 한다. 난 그런 흉악한 무리에게 끌려 다니는 할바마마가 싫었다. 진짜 왕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할바마마는 왕 시늉만 하라고 나를 혼내셨다. 지금도 할바마마는 나를 죽이고 싶어 죽이시는 것이 아니다. 할바마마가 살기 위해, 그리고 너를 살리기 위해 나를 죽이시는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저는 어떻게 해요?”

“할바마마가 우리 산이를 믿기 때문에 나를 죽이시는 거다. 내가 죽으면 너는 세손이니까 이 다음에 왕이 된다. 네가 나를 대신해 이 나라의 왕이 된단 말이다.”

“왕이 되면 신하들이 죽인다면서요?”

“그러니까 내 말 잘 들어라. 조정 대신들, 하나같이 왕을 잡아먹으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귀신들이다. 저승사자란 말이다. 그놈들은 백성 생각은 하나도 안 하고 오로지 당과 가문의 부귀만 원하고, 왕명보다도 당론만 따른다. 왕이 시켜도 일을 하지 않는다. 백성이 굻어 죽어도 모른 척한다. 그러니 그런 악독한 대신들은 혹시라도 죽일 기회가 생기면 확실히, 꼭 죽여야 한다. 살려 두면 나중에 화근이 되어 왕의 목숨을 노린다.”

“어떻게 사람을 죽여요?”

“네가 죽이는 게 아니고 왕이 되면 ‘죽여라!’ 한마디만 하면 된다. 그런데 눈치를 잘 봐야 한다. 왕이 믿는 신하들이 있을 때 그런 말도 하는 것이지, 죄다 적으로 보일 때에는 속마음을 숨겨야 한다.”

“왕이 신하 눈치를 봐야 해요?”

“아무렴. 아무리 죄인이라도 잘 죽여야 용상을 지킬 수 있고, 충신이라도 잘 거둬야지 안 그러면 저 악귀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엮여 처형시키거든. 할바마마도 무수한 사람을 죽여 가며 지금껏 왕위를 지키고 계신 것이다. 사람 안 죽이고는 왕위를 지킬 수가 없다. 이인좌의 난 때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모른다. 무고한 백성이 많이 죽었다. 선왕이신 큰아버지 경종을 죽이고 오른 자리니 그만큼 많이 죽여야 하는 업보를 받으신 것이다. 그러다 끝내 자기 아들까지 죽여야만 하는 절박한 위기에 빠지신 것이다. 당신 꾀에 스스로 넘어가신 거지. 또 경종께서도 여러 사람을 죽여 그나마 몇 년 버티신 것이다. 내 할아버지 숙종대왕 역시 엄청나게 많은 사람을 죽이시면서 줄타기하듯이 왕위를 지키셨다. 지금 네 할바마마가 하시는 일을 보면 숙종대왕이 하시던 것과 비슷하다. 언제나 힘센 놈, 이기는 놈에게 의지해 왕위를 붙여 오셨다. 그래야 살아남기 때문이다.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고 힘없는 놈은 제일 나쁜 놈이다.”

“전 무서워서 왕 안 하고 싶어요.”

“나는 뭐 세자를 하고 싶어서 한 줄 아느냐? 그냥 할바마마의 아들이 나뿐이니 태어나자마자 세자가 된 것이다. 너 또한 내 아들이니 어쩔 수 없이 세손이 되었고, 그냥 왕이 되는 거다. 그러니 저 무섭고 흉악한 노론 대신들과 싸우는 건 딱 너 혼자다. 그때는 할바마마도 안 계시고 나도 없다. 너 혼자 그 많은 악귀들과 싸워 왕실을 지켜야 한다. 안 그러면 아예 바보가 되는 게 낫다. 바보 노릇을 하면 죽이지는 않으려나...”

“엄마가 있잖아요?”

“아이고, 산아. 네 엄마도 노론이란다. 외할아버지도 노론이고. 오죽하면 궁중에서는 개를 길러도 노론 개만 기른다고 하지 않더냐. 궁녀고 환관이고 다 노론이다. 그러게 내가 꼼짝없이 걸려든 게다. 이렇게까지 살벌한 줄 내가 어찌 알았겠느냐. 그저 사서삼경에 나오는 대로 나쁜 놈은 나쁘다 하고, 좋은 놈은 좋다 한 것뿐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궁중에 있는 건 걸어 다니든 기어 다니든 날아 다니든 죄다 노론뿐이더라.”

“그냥 모른 척 바보처럼 지내시지 왜 백성을 생각하셨어요? 대신들 말 잘 들어 가며 편히 사시지 않고요?”

“그러기에는 내가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단다. 내 아버지이신 주상 전하의 비밀이며, 저 인조대왕이 그 아드님 소현세자를 죽이신 이후에 벌어진, 더럽고 지저분하고 냄새 나는 추악한 왕실 역사를 너무 많이 알았단 말이다. 내가 그 얘기를 해 줄 테니, 네가 왕이 되거든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소슬바람이 한 줄기 마당을 감돈다. 군사들은 지쳐 여기저기 담장 아래에 기대어 서 있거나 앉아 쉬고 있다. 쳐들라는 칼은 이미 칼집에 들어가 있다...................(중간 생략)

 

세자는 힘이 드는지 뒤주에 기대어 앉아 있다.

“당쟁이 그렇게 무섭사옵니까? 어떻게 할머니까지 아버지를 죽이려 할까요?”

“왕실을 구하기 위해서라니까. 아바마마도 어마마마도 지금 너를 믿기 때문에 나를 죽일 수 있는 것이다. 나를 안 죽이면 아바마마도 죽고, 어쩌면 너도 죽을 수 있거든.”

세자는 아들 산의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너를 살리기 위해 내가 아마 죽어야 할 것이다.’

산은 아버지의 손길이 머리에 닿자 씩 웃었다.

“아버지가…… 혹시라도 안 계시면 저는 어떻게 하나요? 겨우 열한 살인데?”

“난 두 살 때 대리 청정을 할 뻔했다. 할바마마의 변덕이 그처럼 심하시다. 할바마마를 닮아서 그런지 나 역시 변덕이 좀 있다. 어떤 때에는 너무 기분이 들떠 평양이고 아산이고 돌아다니지 않으면 배겨 날 수가 없다. 북문으로 남문으로 마구 돌아다녀야 직성이 풀린다. 하지만 한번 가라앉으면 죽은 상궁들이 귓속말로 들려주던 말들이 똑똑히 들려온다. 그러면 나는 견딜 수가 없다. 무섭다. 난 죄인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럴 때 노론 대신들을 보면 침을 뱉고 싶어 미칠 것만 같다. 나는 나를 절제하지 못한다. 조급병이 있기는 있다.”

“노론 대신들이 저도 죽이려 할까요?”

“아무렴, 그들이 너도 죽이려 할 것이다. 그러니 발톱을 숨겨라. 아버지는 발톱을 숨기지 않은 죄로 오늘 뒤주에 갇힌 것이다. 이 아버지의 잘못이라면 백성을 위해 뭔가 해 보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너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 백성 앞에 흉포한 임금이 되어라. 또 당인들이 하라는 대로 하는 것처럼 미련스럽게 굴어라. 그러다 보면 단 한칼에 그들을 쓰러뜨릴 수 있는 기회가 올 것이다.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그들을 죽여라. 임금은 사람 죽이는 것을 주저하면 안 된다. 아, 사악한 인간은 용서할 가치가 없다는 걸 내가 왜 이제 깨닫는지 모르겠다. 바보처럼 미련하게 굴다가 저들이 나를 업수이 여겨 무사히 왕위에 앉거든, 그때 가서 기회를 보아 가며 저 사악한 당인들을 쳐죽여야 했거늘 이 아버지는 너무 성급했단다. 그러니 너는 바보처럼 굴어라.”

“아버지 안 계시면 누굴 믿느냐니까요?”

“아무도 믿지 말라. 할바마마는 이미 노론 신하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새로 온 김씨 할마마마는 정말 무서운 사람이니 더 조심하라. 네 어머니, 모두가 다 지독한 노론이다. 우리 왕실을 망하게 할 사람들이다. 아버지를 죽이라는 자들은 노론 중에서도 벽파라 하고, 아버지를 살리라고 한 시파도 있다. 하지만 너는 시파만 감싸서는 안 된다. 네가 그들을 감싸면 그들은 반드시 죄를 입어 꼼짝없이 죽게 될 것이다. 그들이 조정을 장악한 뒤에는 네가 충신이라고 하면 그는 역적이 되고, 네가 역적이라고 하면 그는 충신이 될 것이다. 그들의 적이 되면 없는 죄가 생겨나고, 그들의 친구가 되면 있던 죄도 없어진다. 그러니 사서삼경 따위는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고 오직 살아남는 방법을 연구해라. 아무도 믿지 말라. 할바마마, 네 어머니에게도 아부를 해야 살아남는다. 네 어머니, 네 외할아버지는 모두 나를 죽이자는 노론 벽파들이다. 아무도 믿지 말라. 또 말한다. 아무도 믿지 말라.”

“예, 아버지. 할바마마도 할마마마도 어머니도 무조건 믿지 않겠습니다.”

“오냐, 그럼 지금부터 아버지가 하는 말을 잘 들어라. 네 어미가 언제 달려와 너를 잡아갈지 모르겠으니 서둘러 우리 왕실 이야기를 해 주마. 오늘 혹 말을 다 하지 못하면 내일 밤이라도, 아무 때라도 몰래 오려무나. 죽기 전이라면 아무 때라도.”

이산은 세자처럼 뒤주에 등을 기대어 앉고, 세자는 귓속말로 속삭였다..........(중간 생략)

 

세자는 뒤주에 기대 앉아 세손 산의 손을 잡아 가만가만 토닥이며 말했다.

“나의 아들아, 산아. 내명부는 무서운 곳이다. 온갖 악행이 만들어지고, 음해와 역모가 독버섯처럼 자라는 음침한 곳이다. 너는 절대로 내명부를 믿지 말고, 내명부에 힘을 실어 주지도 말라. 외가에는 절대 의지하지 말라. 이 아버지도 노론들이 길들이려고 노력했으나, 나는 숙종대왕 때부터 노론들이 해 온 짓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나는 신하들을 이겨 보려 했다. 대리 청정을 하면서 정말로 저 악귀 같은 세력들을 다 몰아내고, 백성을 돌보는 올바른 신하들과 이 나라를 다스려 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졌다. 그들에게 졌다. 네 어머니에게 지고, 네 외할아버지에게 졌다. 아바마마는 유일한 내 편이었으나 아버지도 결국 지셨다. 아바마마가 나를 살리려 애를 썼다는 걸 잘 안다. 하지만 나는 굴복하기 싫다. 아바마마는 차마 저들에게 대항하지 못하지만 이 아들만은, 세자만은 굴복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 이 나라 왕실의 위엄을 살리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실패했다. 그래서 말한다. 너는 길들여지는 척하되 정말로 길들여지지 말라. 노론 대신들이 너를 끊임없이 길들이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면 길들여지는 척해라. 그러다 단 한 번의 기회가 오거든 송곳처럼 찔러라. 그때 그들을 처형하라. 유배 가지고는 안 된다. 노론 영수들은 기회를 보아 반드시 처형하라. 그래야만 왕실이 산다. 우리 왕실의 존망이 네 어깨에 달려 있다. 네가 실패한다면 왕실은 외척들의 노리개로 전락할 것이다. 그러면 아버지가 죽는 보람이 없어진다.”

“아버지, 이 아들이 아직 너무 어리니 이를 어찌합니까. 대체 어찌합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시지 말고 저 대신 그 일을 하시면 안 되겠사옵니까? 할바마마께 용서를 빌어 한 번 더 기회를 가져 보세요. 할바마마에게 용서를 청해 보세요.”

“할바마마는 아버지를 용서할 기회를 이미 다 쓰셨다. 노론 대신들이 더 이상 용서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노론 대신들을 무시하고 나를 살리면 저들은 기어이 아버지를 죽이고, 이어 나도 죽이고 너도 죽일 것이다. 그러느니 나 하나 죽어 주는 게 우리 왕실에 이로운 일이라.”

 

밤이 늦어 세자와 이산의 대화는 그쯤에서 마무리되었다. 낮에 너무 시달린 세자는 몸이 무너질 것처럼 피곤했다.

 

이튿날 이산은 할바마마를 찾아갔다. 하루 종일 기다리다가 겨우 대전에 든 영조를 잠시 만날 수 있었다. 독대는 허락되지 않았다. 사관이 눈을 부릅뜨고 있다. 말할 것 없이 사관도 노론이요 벽파다. 임금의 시중을 드는 내관 등 궁인들조차 모두가 다 노론 벽파의 조종을 받는 사람들 일색이다.

“할바마마, 우리 아버지 좀 살려 주세요.”

“내 손자야, 산아. 너는 장차 이 나라의 국왕이 되어야 할 세손이다. 국왕은 태산처럼 진중해야 한다. 한마디 말을 하기 위해서 열흘은 생각하라. 국왕의 말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국법이 된다.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아버지를 살려 주세요. 저는 왕 싫어요. 할바마마가 하세요.”

“산아, 할아버지는 곧 죽는다. 할아버지가 올해 예순아홉이나 된다. 이 나이까지 살아 있는 늙은이가 별로 없다. 그러니 할아버지는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른다는 뜻이다. 너의 아비는 할아버지의 이 간절한 소망을 짓밟았다. 왕이 될 재목이 아니었느니라.”

“왜 대신들이 아버지를 죽이라고 소리 지르옵니까? 아버지가 무슨 잘못을 했사옵니까?”

“산아, 내 손자야. 죄는…… 쉿!”

영조는 사관을 돌아보더니 산의 귀에 대고 말했다. 그래야 사관이 사초에 적질 못한다.

“산아, 죄는 짓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란다. 네 아비의 죄는 네 아비가 만들었다. 쓸데없는 짓을 하여 대신들을 화나게 하고, 내명부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궁중에 대혼란을 일으켰다. 그러니 왕이 될 재목이 아니라고 한 것이니라. 산아, 산처럼 묵직하라고 말했다. 잊지 말라!”

영조 이금은 이따금 사관들을 돌아보곤 했다. 그들은 시커먼 먹을 찍어 영조의 말을 하얀 종이에 받아 적고 있다. 그 검은 먹이 시뻘건 핏빛으로 뒤바뀌기도 한다. 사관들이 적은 사초는 본디 사관 외에는 누구도 볼 수 없지만, 그건 경국대전 한 귀퉁이에 적혀 있는 먹 가루에 불과하다. 노론 대신들이라면 왕이 하루 종일 무엇을 했으며, 무슨 말을 했는지 낱낱이 알 수 있다. 그의 부왕인 숙종대왕조차 사관 하나 휘어잡지를 못했다. 숙종이 아슬아슬하게 노론과 소론 사이를 줄타기했듯이, 영조 역시 노론의 벽파와 시파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

할 말은 많으나 지금은 말할 때가 아니다.

“물러가라. 내관은 이 아이를 어서 동궁으로 돌려보내라. 또한 뒤주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게 하라.”

곧 내관들이 달려들어 이산을 잡아 일으켰다.

이산은 그 뒤로 다시는 뒤주를 보러 갈 수가 없었다.

 

세자가 뒤주에 갇힌 지 여드레째인 7월 12일(음력 윤5월 21일), 시위 군사들의 교대가 있고 나서 포도대장 구선복이 뒤주를 살살 두드렸다.

“저하, 뒷간에 가셔야지요. 아침입니다.”

세자는 어젯밤에도 몰래 뒷간에 다녀왔다. 어명이 무서워 밥은 못 주지만 가끔 물은 주었다. 대소변이 마렵다 하면 군사들이 눈치를 보아 가며 뒤주 문을 열어 주곤 했다. 평소에는 돌까지 올려놓지만 다 사람이 하는 일이다. 애초에 병이 있던 몸이라 세자는 첫날부터 크게 지쳤다. 그것도 삼복더위에 마당 땡볕에 뒤주를 내놓으니, 한낮에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시강원 신하가 몰래 전해 준 부채를 부쳐도 소용이 없었다.

“저하, 기침하십시오. 아침이옵니다.”

포도대장 구선복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제 저녁에만 해도 인기척이 더러 있어 대화도 나누었는데, 아무 반응이 없다.

“돌을 내려라!”

뭔가 이상하다. 지켜보던 시위 군사가 뒤주 뚜껑을 눌러 놓은 돌을 안아 내렸다.

구선복은 뚜껑을 열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세, 세자 저하!”

세자는 자는 듯이 누워 아무 반응이 없었다.

“너, 어서 달려가 의원을 모셔 와라! 저하가 이상하시다. 너희는 이리 와서 저하를 밖으로 모셔라.”

시위 군사들이 달려들어 세자를 밖으로 끌어냈다. 그래도 의식이 없다.

구선복이 맥을 짚었다.

“아이구, 맥이 안 잡힌다! 이거 큰일이다. 팔다리를 주물러라.”

어명은 세자가 죽을 때까지 뒤주를 열지 말라는 거지만, 그러다 죽기라도 한다면 그 책임이 포도대장에게 올 수도 있다. 그래서 음식은 차마 주지 못했지만 물은 가끔 넣어주고, 소변이 마렵다면 뒷간은 다녀오게 했다. 궁중에서 하는 일은 적당히 눈치 보고 시류를 따라야지, 안 그러면 목이 남아나질 않는다.

곧 내의원 의관이 달려왔다. 그가 맥을 짚더니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물러들 가시오. 내가 창덕궁으로 가 말씀을 드리리다. 세자빈과 세손에게 연락하시오.”

 

세자는 뒤주에 갇혀 꼭 여드레 만인 7월 4일에 그 안에서 굶어 죽었다.

영조는 보고를 받고는 눈을 질끈 감더니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문을 닫아라. 내관도 나가고 승지도 나가라. 혼자 있고 싶다.”

그러고 나서 한참 뒤에야 승지를 불렀다. 눈시울이 붉다.

“30년에 가까운 부자간의 은의(恩義)를 생각하니 슬프구나. 다시 세자로 삼고, 그 호를 회복시켜라. 시호는…… 사도세자(思悼世子)라 하라. 장례를 세자의 예에 따라 시행하라. 세손은 3년상을 치러야 한다.”
(이하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