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58년생이다.
따라서 일제시대와 육이오전쟁의 아픔에 대해 깊이 느끼는 데 한계가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일제 시대에 태어나 어렵게 살고, 아버지가 징용되어 끌려가다 탈출해 돌아왔지만 실감이 나지 않는다.
육이오전쟁 때 아버지는 장티푸스에 걸려 피난을 가지 못한 채 집에 남았고, 그런 아들을 버릴 수 없다 하여 할아버지가 남아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겠다며 간병했다는 이야기도 소설 속 한 장면만 같다. 그때 어머니는 그해 9월에 태어날 큰아들(내 형)을 임신 중이었기 때문에 만삭의 몸으로 아버지를 간병할 수 없어 다른 마을로 피신간 이야기도 들었지만 역시 남의 이야기만 같다. 당숙이 몇 주 훈련도 못받은 채 소위로 임관되어 전쟁터에 나갔다가 전사했는데, 실은 바로 옆집 아저씨가 등뒤에서 쏜 총에 맞아(오발이겠지) 죽은 것이라는 소문도 들었다.
역사소설가를 자처하는 나마저도 내 눈으로 보고 내 몸으로 겪지 않은 이야기라 실감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이제야 육이오전쟁을 처음부터 다시 의심하며 하나하나 캐나가고 있고, 일제 식민지의 원인에 대해서도 머리로, 가슴으로 제대로 알게 되었다.
오늘 임시보호 중인 유기견 겸 척추장애견 별군(말티즈 9개월령)이 중성화 수술이 있어 서울 구로에 갔다가 대기 시간에 인근 영화관에서 <덕혜옹주>를 관람했다.
낮시간인데도 자리가 없어 겨우 빈 자리 하나를 얻었다.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나는 무지와 탐욕으로 조선을 일본에 갖다바친 대원군 이하응, 고종 이재황(아명. 왕이 된 이후 이희로 개명하지만 난 그렇게 안부른다. 형편없는 인간말종이라는 개인적인 소신 탓이다.), 명성왕후 민자영(죽을 때 왕후 신분이었기 때문에 나는 황후라고 부르지 않는다.) 세 인간에 대한 크나큰 증오심을 갖고 있다. 그런 고종 따위의 딸이 있은들 망국의 집안에서 난 핏줄이 뭐 대수랴, 이런 인식이 강하다.
- 한일합방 조약 체결 후 천연덕스럽게 기념사진을 찍은 고종 이재황, 순종 이척.
무능한 놈이 왕이 되어 나라를 팔아먹었으면 혀를 깨물고 죽을 일이지 이완용 등 매국노들과 함께
이따위 기념사진이나 남긴 게 고종, 순종이다. 영화에서는 고종이 이완용을 모욕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여러 사료를 들여다 볼 때 두 사람은 나라 팔아먹은 공범이다. 덕수궁 석조전 앞.
그런데 내 왼쪽과 오른쪽에 앉은 여성들이 영화 관람 내내 한숨 쉬다, 울다, 한숨 쉬다, 울다 하는 바람에 나도 기꺼이 눈물 지으면서 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애비는 망국의 무능한 왕이지만 이미 나라가 망한 1912년에 태어난 덕혜옹주가 겪은 고통이 차가운 내 가슴에 살살 젖어들었다.
난 영화 인천상륙작전처럼, 국제시장처럼 시대와 역사를 다뤘다고 포장하면서 실은 거짓말하는 것을 극도로 혐오한다. 그래서 눈 부릅뜨고 사실관계를 따져가면서 보았는데, 그럼에도 기구하게 펼쳐지는 덕혜옹주의 삶 앞에서 징용 가고, 징병 가고, 위안부로 끌려간 일반 백성들처럼 그 역시 식민지 백성으로 똑같은 운명을 겪었다는 사실에서는 감정이입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원군 이하응과 명성왕후 민자영 두 인간 사이에서 줏대를 놓고 제 일신의 안위나 살피다 국권도 왕권도 잃은 고종 이재황 따위에게는 일말의 동정도 없지만 이미 일이 저질러진 1912년에 태어나 평생 고난을 겪은 덕혜옹주 개인의 인간사는 또다른 측면에서 볼 수 있는 비극이다. 딱 이런 차원이다.
그의 아버지 고종은 을사늑약 뒤 헤이그에 밀사를 보내보지만 소용이 없었다. 진작에, 강제합병 20년 전부터 벌어진 아버지와 아내의 싸움을 방치했으니 누굴 원망하겠는가. 왕 스스로 정신 똑바로 차리고 부국강병에 나섰으면 되었을 것을 망국의 왕이 되어 뒤늦게 애써봤자 신하들만 더 죽이는 짓이다. 덕혜옹주 또한 이미 나라를 빼앗긴 이후에 낳았으니 한가하고도 한가한 짓을 벌인 것이다.
따라서 이 영화를 보며 덕혜옹주 한 인간의 역정을 들여다 볼 일이지 그가 왕의 딸이라서, 옹주라서 슬퍼한다면 그건 역사를 모르는 눈물이 된다. 조선왕실은 그 무능에 대한 벌을 마땅히 받은 것뿐이다.
- 여기는 충청도 성환 땅, 이놈들은 일본군 육군이다. 여기서 일본군은 청군을 상대로 싸워 이겼다.
남의 나라 땅에서 벌어진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군은 그 즉시 경복궁을 점령, 친일정부를 세운다. 1894년의 일이다. 덕혜옹주가 태어나기 18년 전이다. 이때라도 덕혜옹주의 아버지 고종 이재황, 어머니 민자영, 할아버지 이하응은 정신을 차렸어야 했다.
지금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 청일전쟁 터 인근 평택에 오늘날에는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 남의 나라 군대 불러 문제 해결하려는 우리의 굴욕은 현재진행형이다.
더 자세히 얘기하면 영화 보는 재미가 줄어들지 모르니 이만 줄이고 팩트를 맞춰본다.
1. 8살 때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과 약혼한 것은 맞다. 그러나 그가 일본 사관학교를 차석으로 졸업하고, 영친왕의 무관이 되었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
다만 덕혜옹주를 위해 박정희 의장에게 귀국 허가를 요청한 서울신문 도쿄특파원은 김장한의 형인 김을한이다. 조선왕족의 귀국은 전적으로 김을한 기자의 노력으로 이뤄졌다고 한다.
- 덕수궁에 살던 어린 시절
2. 덕혜옹주는 일본으로 나간 뒤 1962년이 될 때까지 한번도 귀국한 적이 없나?
아니다. 1925년에 강제로 일본왕족이 다니는 귀족 학습원으로 유학을 떠나지만 1926년에 영친왕 내외와 함께 귀국하여 일주일간 머물며 순종 등을 만났다. 그러다 며칠 뒤 순종이 위독하다 하여 다시 귀국, 열흘 정도 머물다 인산은 보지 못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특히 생모인 양 귀인이 죽을 때 못갔다는 영화 속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1929년 양 귀인이 사망하자 이틀 뒤 귀국하였다. 다만 덕혜옹주는 왕족 신분이지만 양 귀인은 그러지 못하기 때문에 복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덕혜옹주의 법률상 관습상 어머니는 명성왕후이기 때문이다. 그런 뒤에는 1962년까지 귀국이 거부되었다.
- 심상소학교 시절의 덕혜옹주(이때 이름은 미상).
심상은 소학교 이름이 아니라 '심상소학교' 자체가 학교라는 의미다.
- 덕혜옹주의 생모인 귀인 양복녕(복녕은 작호)
3. 몸종 복선은?
유모 이름이 변복동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젖을 먹여준 유모(상궁 신분)로 고종조차도 수유를 할 때는 앉은 채 그대로 있게 했다. 이때 이미 늙은 변복동 씨는 덕혜가 타고오는 비행기를 향해 큰절을 했다고 한다. 이후 변복동 여사가 옹주를 보살폈다.
3. 일본에 머물던 왕족은 귀국이 거부되었나?
실제로 이승만이 입국을 하지 못하게 막았다. 이승만은 영친왕 등 왕실 일족이 귀국하면 왕정이 복고될까봐 두려워했다.
4. 덕혜는 정신병에 걸렸나?
정신병은 어쩌면 타고난 것인지도 모른다. 1931년 강제 결혼 때부터 실어증, 조현병 증세가 나타났다. 영화에는 귀국이 거부되자 나타난 것으로 묘사됐는데 더 뿌리가 깊다.
1946년부터는 공식적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이후 대마도주 소 씨 집안의 다케유키와 이혼했다. 다케유키는 임란 때의 대마도주 종의지(소 요시토시)의 후손이다.
5. 덕혜의 딸 정혜(일본명 마사에)는 자살했나?
1956년, 정신병을 앓고 있던 덕혜가 영친왕과 다케유키 사이에 이혼이 합의된 뒤에 자살하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가출한 뒤 행방불명되었다.
덕혜는 이혼 후 성을 생모 성인 양 씨로 바꾸어 이덕혜가 아닌 양덕혜로 일가를 창립했다. 이 당시 미군 주도로 일본 왕실 법이 바뀌어 일왕 직계가 아니면 왕족이 될 수 없다 하여 덕혜, 영친왕 등은 모두 평민이 되었다. 일본 정부의 자금지원이 완전히 끊겼다.
6. 박정희가 귀국시켰나?
약혼자 김장환의 형인 김을한 서울신문 도쿄특파원의 간청에 따라 박정희가 허가했다.
이로써 15년간 정신병원에 머물던 덕혜옹주가 귀국하게 되었다.
이후 창경궁 낙선재에 머물렀는데, 정신병은 상당히 좋아졌던 듯하다.
한편 김을한 기자는 영화 속 김장환과 비슷한 이력을 살았다. 일본 와세다 대학 유학 중 극단 토월회를 조직하고, 귀국 후 기자가 되어 일본의 식민 정책을 비판하는 기사를 많이 썼다. 육이오전쟁 때 도쿄특파원이 되어 영친왕을 만나게 되고, 이후 20년간 덕혜옹주 등을 귀국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덕혜옹주는 김을한의 아내 민덕임과 유치원 동무였다. 따라서 영화 속 김장한은 김을한 이미지가 합쳐진 것이다.
- 덕혜옹주가 귀국 후 말년을 보낸 창경궁 낙선재
7. 영친왕 망명 사건은?
임시정부로부터 망명 제안을 받았다.
영친왕의 형 의친왕은 실제로 망명을 시도하다 실패했다.
망명을 반대하는 이건은 이후 완전히 일본인이 되어 1962년 다른 왕족이 다 귀국할 때 허가를 받지 못해 일본에 남았다. 일본군 중좌까지 오른 이우는 반일 사상이 깊고, 일본에 반항적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히로시마 핵폭탄 투하 때 사망했다.
8. 덕혜의 독립운동은?
기록은 없다.
다만 아버지 고종이 독살된 사실을 두려워하여 늘 물병을 갖고 다녔다고 한다.
9. 전남편 소 다케유키가 창덕궁으로 찾아왔는데 만나지 않았나?
만나지 않았다. 거부했다.
10. 이왕직 장관 한택수는?
이왕직 장관 실명은 한창수다. 실제로 덕혜옹주를 일본으로 보내는 등의 악랄한 역할을 했다.
- 영화배우 손예진이 덕혜옹주 역을 맡았다. 덕혜는 본명이 아니라 1921년 5월 4일에 순종으로부터 받은 작호다. 그 이전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어려서는 아기씨로 불렸다.
* 바이오코드 1225(1912년 음력 4월 8일, 양력 5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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