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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운 작품/태이자 우리말 사전 시리즈

우리말은 얼마나 과학적인가?

물론 우리말 자체가 과학적, 비과학적이라는 표현은 있을 수 없다. 말을 쓰는 사람이 과학적으로 쓰느냐, 비과학적으로 쓰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동아일보 / 새 보러 갔다가 뇌경색...새 보기 위해 다시 일어서>


1987년말부터 1990년초까지 나는 내가 맡고 있던 어린이 잡지에 새 사진을 실을 일이 있으면 윤무부 선생을 찾아가 필름을 구해오곤 했다. 올해가 75세시니 약 50세 무렵이시고, 나는 30살 무렵이다. 필름 한 장 구하는 일이야 간단하지만 선생께서는 새 이야기를 하시느라고 오래도록 날 잡아두시곤 했다. 한 분야에 이처럼 자신의 거의 모든 열정을 집중한다는 것은 보통 사람이 해낼 수 없는 일이다.

 

마침 비례 국회의원이 된 바둑기사 조훈현 씨가 정세균 의장 사퇴하라는 시뻘건 구호가 적힌 시위판을 들고 뻘쭘하게 서있는 뉴스를 보고 혀를 차던 참에 이 기사를 보니, 역시 평생 한 우물을 판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님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내 스승 서정주 선생께서도 오직 시만 쓰셨으면 좋았을 텐데 기어이 일제의 꾀임에 넘어가 친일시를 쓰시다 오점을 남기셨고, 많은 문화예술인과 학자들이 지조를 꺾고 독재자와 군부가 잡고 있는 정치판을 기웃거리다 오명을 뒤집어쓴 분들이 많다.

이런 점에서 윤무부 교수의 한 생은 학자로서 참 아름답고, 본받을만 하다고 평할 수 있다. 


내가 이 기사를 링크한 이유는 사실 윤무부 교수가 반갑기도 하지만, 기사 몇 줄을 지적하고 싶어서다.

제목에 "새 보러 갔다가 뇌경색"이라고 나오는데 기사에는 설명이 없다. 상식이려니 하고 넘어가면 문제될 것도 없지만 독자를 그렇게 수준 높게 보면 안되다. 새 보러 간 일과 뇌경색 사이에 원인-결과가 있어야 한다. 글이 그렇게 적혔으니 마땅히 설명이 나와야 한다. 그런데 새를 본다고 뇌경색이 생기는 일은 없다. 둘 사이에는 아무런 인과관계가 있을 수 없다. 조류에 뇌경색을 일으키는 바이러스가 발견된 바 없기 때문이다.


단서는 '2006년 겨울 철원'이라는 데 있다. 구글검색창에 <200년 + 겨울 + 철원 기온>을 치니 2월 4일 - 23.5도, 2월 2일 -20도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2009년 12월 31일은 -19.8도, 2010년 1월 6일은 -26.8도였다. 이 기록은 철원 시내 갈말읍에 있는 기상서비스센터에서 측정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철새 관측 장소인철원평야는 더 온도가 낮을 수 있다.


- 철원 지역 겨울 사진. 출처 / onkweather


10년 전이면 윤 교수가 65세 무렵인데 이 연령대에 이르면 겨울철 혹한에는 극도로 주의해야 한다. 영하 20도 기온이 자주 관측되는 철원 들판이라면, 혈행이 순조로울 수가 없다. 옷을 두텁게 입어도 숨을 쉴 때, 얼굴, 손 등으로 냉기가 전달되고, 이러면 혈관이 수축되기 쉽다. 특히 두뇌 부분은 모자를 써도 보온이 완벽하지 않으면 더 위험하다. 아마도 그래서 뇌경색이 온 듯하다. 이런 설명이 기사에 한 줄도 없어 아쉽다는 뜻이다.


또 하나, "뇌경색으로 쓰러져 전신마비가 왔다."는 표현도 부족하다. 뇌경색으로 쓰러져 전신마비가 온 게 아니라 뇌경색으로 전신마비가 와서 쓰러진 것이다. 순서가 그렇다. 뇌경색이란 뇌혈관이 막히는 것인데, 그 즉시 두뇌 활동이 장애를 입는다. 그때 두뇌는 운동신경을 통제할 능력을 잃는데 곧 손과 발을 쓰지 못하게 된다. 신경 통신 두절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뇌경색 -> 쓰러져 -> 전신마비'가 아니라 '뇌경색 -> 전신마비 -> 쓰러져' 순서다. 즉 쓰러진 원인은 전신마비가 왔기 때문이지 쓰러져서 전신마비가 온 게 아니다.


그 다음 문장 "한동안 그가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이유다."도 틀렸다. '드러내지 않은' 것이 아니라 '드러내지 보이지 못한' 것이다.


그뒤에도 이 기사에는 불편한 표현이 보인다. '성공한 덕후' '새 네이티브'가 그렇다. 덕후는 일본어인데 이 말의 의미를 모르는 독자가 더 많다. 기분 나빠 나는 설명하기 싫다. 이런 말을 함부로 쓰면 안된다. 또 새 네이티브는 잉글리쉬 네이티브(태어나면서부터 영어를 모국어로 써온)니 하는 데서 주로 쓰는 영어 어휘인데, 이 역시 다짜고짜 설명 없이 써대면 알아들을 독자가 많지 않다.


윤무부 교수께서 경색(혈관이 막혀서 굳은)된 뇌가 뚫리거나 시냅스가 우회로를 찾아 다시 운동신경을 회복하셨다니 천만다행이다. 두뇌는 놀라운 복원능력을 갖고 있다. 윤 교수처럼 의지가 강하다면 뇌경색으로 생기는 장애 정도는 웬만큼 극복해낼 수 있다. 우리 어머니는 몇년 전 집안에만 계셨는데도 소뇌가 경색되어 운동신경 일부가 마비되었는데 연세가 많아 재활에 실패했다. 하지만 두뇌는 여전히 건강하셔서 웃고 말씀(어눌하지만)하시는 능력은 잃지 않고 있다.


오는 겨울, 연로한 부모가 계시다면 체온 유지에 신경써서 뇌경색으로 고생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 아스피린, 들기름, 은행, 인삼, 커피 등 피가 잘 흐르게 도와주는 식품이 많으니 꾸준히 섭취할 수 있도록 배려하자.


- 평생 새 연구에 몸 바친 윤무부 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