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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태양/*파란태양*

이 땅에서 소설가로 산다는 뜻은?

나는 직업이 세 개다. 

주업은 소설가지만 부업 1은 사전편찬자이고 부업 2는 바이오코드 개발자다. 부업 1, 2는 내가 소설 쓰기 지루해서 가진 일이 아니고, 소설을 더 잘 쓰기 위해서 내가 개발한 직업이다. 차례차례 그 사연을 적어본다.


1. 소설가란 직업을 갖기 위해 4년간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김동리 선생으로부터 소설을 공부하고, 2년은 같은 학과 대학원에서 서정주 선생으로부터 시론을 공부했다. 다른 선생들이 더 있었지만 내게 큰 영향을 줄만한 위치에 있지 않아서 적지 않는다.

이러고도 나는 서정주 선생의 개인적인 가르침을 충실히 따랐다. 동양 고전을 충분히 공부하라는 말씀이 따로 있었다. 대학 때도 말씀하셨지만 대학원 다니면서 선생을 모실 때 개인적으로도 몇 번이나 강조하셨다. 그래서 한문을 공부하고, 주요 한문 서적을 읽었다. 이런 과정에서 한국인의 무의식을 형성하고 있는 여러 개념들이 왜 잘못되고, 근거가 왜곡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즉 한국인의 의식이 형성된 과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뒤 나는 군대에 다녀온 뒤 <뿌리깊은나무>와 <샘이깊은물> 편집장을 지낸 김형윤씨가 만든 회사에서 3년간 글 쓰는 일을 했다. 김형윤 씨는 나보다 12살이 많은 띠동갑이었는데 사고 체계가 나와 비슷했다. 다만 12년 인생을 더 살고, 글을 더 다룬 노하우가 풍부하여 나는 그 분의 말과 주장에 늘 유의했다. 글에 관해서는 김동리 선생의 기본기, 원칙, 맞춤법과 문장에 대해 같은 인식이었는데, 김형윤 씨는 더 나아가 글의 구조와 표현법까지 현미경처럼 들여다볼 정도로 철저한 분이었다. 당시 매우 보기 드물게 우리말 어휘를 깊이 이해하는 수준이었다. 대학에서 소설가네 시인이네 하는 사람들이 우리말 어휘에 대해 거의 아무런 인식이 없었던 데 비하면 깜짝 놀랄 수준이었다.(문예창작과는 글 쓰는 기술만 가르치기 때문에 막상 교수들조차 국어학에 문외한이다. 그런 건 국어국문과에 가서 배우라고 할 정도다. 사기꾼을 통해 양심을 배우고, 독재자를 통해 민주주의를 배운 셈이다) 


이런 환경에서 나는 3년간 주로 재벌과 재벌기업이 요구하는 글을 썼다. 현장 중심의 글, 클라이언트 중심의 글을 쓰는 일이었다. 여기서 글 쓰는 사람은 오로지 기술자가 돼야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천년영웅 칭기즈칸>을 쓸 때 글 쓰는 사람은 기술자라고 주장한 칭기즈칸의 말을 나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소설가나 시인이 되기 위해서는 천부적인 재질을 타고 나야 하느니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해야 하느니 하는 말은 다 헛소리다. 요즘 인기 많다는 요리사가 아무 음식에나 설탕을 뿌려대듯이 필요하지 않은 글에 부사 형용사 등 감성 어휘를 감미료처럼 마구 뿌리면 독서를 많이 하지 않는 한국인들은 환호하면서 달려들기 마련이다. 내 글에는 그런 감미료가 거의 없다. 내 글은 감미료 없어 단맛이 덜 나는 자연식이다.


물론 주인이 원하는 요리를 만들어 줄 수 있듯이 독자가 원한다면 나도 얼마든지 감미료를 칠 수 있다. 내가 구사할 수 있는 문체는 꽤 여럿이다. 다만 내 주력 문체를 버릴 수 없어 안할 뿐이고, 더러 재주를 부릴 때도 있다.


이처럼 김형윤편집회사 3년 생활은 내게 2차 대학원을 다니는 학습효과를 보게 했다.

이러고 나서 나는 30년 인생을 다 버리고 무작정 인도 여행을 하고 돌아와 새 인생을 출발했다.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땅에서 본능에 가장 충신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인도 땅에서 나는 서른살 내 인생을 리셋했다.

그러고나서 쓴 소설이 <소설 토정비결>이었다. 물론 내가 원해서 쓴 글이 아니라 김형윤편집회사에서 클라이언트의 주문에 따라 글을 쓰듯이 해냄출판사에서 주문한 소설을 내 기술로 써낸 것뿐이다. 그런데 그만 사고가 나서 계약기간 내에 320만 부가 팔리고 말았다. 그런 데서 정신차리지 않으면 평생 바보가 되는데 그때 나는 인도에서 가져온 소련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이 책이 나를 지켜주었다. 그러면서 나는 그때 역사소설 전문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반역의 한국사>, <~중국사>, <~세계사>를 썼는데, 이제는 역사를 전공한 후배 민병덕 선생에게 맡겨 증보판을 내고 있고, 또 이 민 선생에게 <옛날에도 일요일이 있었나요> 등 여러 권의 생활역사 교양서적 집필을 요구, 완성되면 숱한 자료를 거저 갖다 쓰고 있다. 말하자면 "육조에 출근한 관리는 점심은 몇 시에 먹느냐, 출퇴근 시각은? 공휴일은? 똥 누고 뭐로 닦아?" 등등 내가 찾기 귀찮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은 후배에게 다 떠넘겨 놓고 공짜로 쓰는 셈이다.


2. 나의 부업인 사전편찬자와 바이오코드 개발자로서의 3D(입체적인) 삶이 시작된 동기는 거의 동시에 시작된다.

순서상 바이오코드 개발 이야기를 먼저 해야겠다. 

나는 인도에서 30년 내 인생을 리셋(reset ; 재부팅)할 즈음 소련인 의학자 V.M. Dilman이 쓴 <The Grand Biological Clock>을 우연히 만났다. 마치 누군가 나를 위해 숨겨둔 보물찾기처럼 인도 중부의 한 도시 서점에서 그 책을 만났다. 1996년부터 서방의학계에도 알려진 <Bioclock ; 학술적으로는 suprachiasmatic nucleus 즉 SCN>을 나는 1990년에 먼저 만난 것이다. 인도에서는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이동하려면 대여섯 시간이나 열 시간이 걸리는 일은 예사다. 두세 시간 거리는 택시로 이동하고, 그보다 길면 버스로 이동했는데 그 사이에 나는 이 책을 탐독했다. 대학원에서 원서강독한답시고 더듬더듬 원서를 읽어본 이래 마치 한글 서적을 읽듯이 영어 번역본을 단숨에 읽어치우기는 처음이었다.(러시아어로 된 원서를 영어로 번역한 건데, 인도영어는 좀 쉽다)

나는 귀국하자마자 이 책을 번역자에게 번역을 맡겨 1991년에 <생체시계>란 이름으로 출간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출간이자 생체시계란 어휘가 우리나라 생명과학계에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다.


그런 뒤에 <소설 토정비결>이 밀리언셀러가 되면서 어린 나이에 주체할 수 없는 저작권료가 생기자 생체시계 연구비로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여 인간에게는 다양한 성격 패턴이 있다는 사실이 20년 연구 끝에 밝혀지고, 그것을 체계화한 것이 <바이오코드>다.

나는 바이오코드 초기 버전을 개발한 1996년 이래 모든 역사인물의 성격을 분석하여 내 소설에 적용하였다. 따라서 내 소설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역사인물은 그냥 추정해서 만든 캐릭터가 아니라 바이오코드 분석을 통하여 사실에 가깝게 묘사된 것이다. 일반 독자들은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다. 예를 들어 인물캐릭터 면에서는, 이문열이 쓴 이순신은 이문열이고, 김훈이 쓴 이순신은 김훈일 뿐이다. 말투 역시 똑같다. 이문열 소설 속 이순신은 이문열 어법으로 말하고, 김훈의 소설 속 이순신은 김훈의 어법으로 말할 뿐이다. 실제 이순신과 완전히 다르다. 이순신은 0520이기 때문에 G12인 그들같은 언어를 구사하지 않는다.


이런 무기가 있다 보니까 나는 그 사람의 성격 분석을 통해 판단하고 예측하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몇년 전 어떤 지역 국회의원에게 잘못을 고쳐달라는 요구를 한 적이 있는데 그는 도리어 나를 고소하고, 음해하고, 거들떠보지 않았다. 결국 그는 교도소에 가고, 정치 인생을 스스로 단숨에 끝냈다. 또 한 시장은 여러 경고를 무시했다. 그 밑에서 맴돌던 측근들도 내 경고를 무시했다. 시장은 3년 6개월 형을 사는 중이고, 그 일족도 교도소 등 비참한 가시밭길을 가야만 했다.


나는 올해 4.13 총선에서 김종인의 더불어민주당이 문재인의 방해만 극복한다면 1당이 될 수 있다는 예측을 한 바 있다. 그때 나는 국민의당 창당에 관여하고 있었고, 김종인을 전두환군부정권부역자라고 비난할 때였는데도 결과 예측에서 평정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내 사감을 버리고 오로지 바이오코드 이론에 따라 관측을 했기 때문이다. 대개 정치노선을 정하면 그때부터 눈꺼풀에 뭔가 씌워 팩트를 잘 보지 못하는데, 나는 그런 실수를 덜 하는 편이다. 트럼프 당선 예측도 마찬가지다.


난 안철수가 2017년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지만 늘 그를 비판하고, 다른 후보의 장점에 대해서 놓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가끔 안철수를 신앙하는 '안빠들'하고 부딪힐 때도 있다. 그 사람들이 내가 누구인지 잘 몰라서 그러는 거겠지만, 나는 내가 안철수를 지지한다고 해서 그를 신앙하는 일은 결코 없다. 대통령이 되더라도 나의 비판은 계속될 것이다. 그러다보니 내부적으로는 그를 칭찬하는 것보다는 그의 실수와 오판을 꾸짖는 경우가 더 많다. 물론 공개되는 자리에서는 가급적 그를 칭찬하는 편이지만, 내가 비판을 멈추지 않는 것은 그래야만 그가 국민의 선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 솔직히 말하면 나는 선거 전에 대한민국과 우리 국민에게 안철수보다 더 좋은 대통령감이 보이면 일말의 후회도 없이 갈아탈 것이다.


바이오코드는 여러 분야에서 다양하게 응용될 수 있는 일종의 인간분석 무기다. 이 정도로 그친다.


3. 나는 <소설 토정비결>을 쓰고 나서 약 50만 부쯤 나갔을 무렵 <소설 토정비결 사전>을 출간했다. 내가 쓴 소설을 사전적으로 분석한 책이다. 자기 소설을 위한 사전을 발간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거의 모든 소설에 사전을 만든다. 베스트셀러가 안되어 출간을 못할 뿐이지 다 있다. <천년영웅 칭기즈칸 사전>, <상왕 여불위 사전>, <소설 당취 사전>, <소설 태사룡의 거꾸로 보는 삼국지 사전> 등 매번 사전을 만든다. 나의 글쓰기 습관이다.


나는 어떤 소설이든지 집필에 들어가기 전부터 사전, 연표, 등장인물 성격 등을 정해둔다. 탈고할 때는 저절로 사전이 완성된다. 아마도 내가 만든 연표를 이어붙이면 가장 자세한 한국사 혹은 중국사 연표가 될 것이다.


이런 글쓰기 습관을 가진 내게 1993년경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사전에 있는 어휘 설명이 사실과 다른 경우가 종종 발견되고, 또 어휘 설명이 터무니없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우리말 사전은 그 출생이 일본어사전이었다. 아, 나는 일본어로 소설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냥 발음만 우리식으로, 또 한글로 표기한 것이었다.

흔히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한자 한문을 써온 터라 우리말이 이 한자 한문에 뒤덮였다고 탄식하는 경우가 많은데, 일본어는 우리 조상들이 천년 이상 써온 이런 한자 한문도 덮어버렸다.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가 쓰는 한자어 대부분이 일본어라는 사실이다. 한국 한자어는 중국과 천년 이상 소통이 되었는데 일본 한자어는 중국과 통하지 못한다. 다만 일제 식민 교육을 받은 세대 이후 사람들만 통할 수 있고, 그 이전 정약용, 송시열, 이황, 기대승, 조식, 이이 등과 소통이 안되는 한자어인 것이다.

난 이때부터 북한 사전과 연변 사전을 구하고, 한 질에 수십권이 되는 중국 사전을 구하고, 갑골사전을 구하고, 보이는대로 사전을 구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나는 내가 쓰는 글의 정체를 처음부터 다시 닦기 시작했다. 문예창작과 4년, 대학원 2년, 글쓰는 회사 3년을 다닌 내가, 글쓰기만 9년을 연습한 내가 뒤늦게 이런 충격을 받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나는 오늘까지 덩치만 큰 우리말 사전을 미분(微分)하여 버릴 건 버리고 쓸 건 골라내어 먼지를 닦고 때를 벗겨내었다. 그렇게 8권을 완성했다. 아마 죽을 때까지 하면 20여 권은 해낼 것같고, 내가 다 못하면 내 딸이나 아내가 할 것이다. 못하면 조카나 손자에게라도 맡길 것이다.


그래서 내 글이 더러 맛이 없다고 느끼더라도 우리말은 문학언어가 된 지 얼마 안되고, 더구나 일본어와 한자 한문에 훼손되어 내가 잘 쓰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맛없는 음식이라도 유기농재배한 탓에 조미료 없이 만든 자연식이라고 여겨주기 바란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향기 나는 꽃잎에 나의 거친 글을 싸서 보낼 정도의 여유는 있다.


이렇게 하여 나는 3가지 일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 어느 것 하나도 다 완성하지 못하고, 우리 아버지 관을 덮은 명정에 씌어 있던 그대로 나는 아직도 <학생學生>이다.

* 아래는 내가 쓴 작품의 일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