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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운 작품/태이자 우리말 사전 시리즈

사전 만들면서 더 신중해야지 결심하게 만드는 신문 기사

<조선일보 / 미르>


이 기사를 보고 나를 돌아본다.

지금까지 만든 사전이 10여 권에 이르는데, 그동안 어휘를 다루면서 위 기사를 쓴 사람처럼 아무 거나 갖다 들이대며 함부로 주장하지는 않았는지 겁이 난다.

1994년부터 지금까지 23년째 사전 만드는 일을 하면서, 나는 숱한 '자기 주장' 자료들을 보았다. 거르고 걸러 사실이라고 인정될만한 것들만 모아 책을 만들었지만 개정판, 증보판을 만들다 보면 가끔 해석이 잘못됐거나 잘못된 내용이 발견되는데, 그때마다 식은땀이 흐른다.

나도 1995년에 조선일보에 <청사홍사>를 연재했는데, 그때 조선일보는 토씨 하나 틀리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요즘은 데스크도 기사를 잘 읽어보지 않고 대충 내보내는 것같다.


위 기사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1. '미르'는 순 우리말이다. 용(龍)을 의미한다. 고대 우리말에 '미'는 물(水)의 의미가 들어가 있다. 미르, 미나리, 미역, 미꾸라지가 모두 물과 관련 있다. 

2. 일본말에서 '미즈'는 물을 뜻한다. 여기에서도 역시 '미'가 들어간다. 고대 우리말이 일본으로 건너갔음을 암시한다. 

3. 미르재단은 '용의 재단'이라는 뜻이 된다. 박근혜 대통령이 1952년 임진생(壬辰生)이다. 용띠에 해당하니까 최순실이 재단 이름을 '미르'라고 지었던 것 같다.

4. 강과 폭포, 호수에는 미르가 산다고 믿었다. 우리말 지명 '미리내'는 미르가 사는 내(川)이다. '개천에서 용 났다'는 말도 이러한 맥락에서 생긴 말이다.

5. 농사지으면서 미르에게 빌다가 불교가 들어오면서 미륵에게 빌게 되었다. 미르가 살고 있던 늪지대에 불교 절을 지을 때는 대량의 숯을 사용하여 메웠다는 전설이 있다. 숯이 촛불? 촛불이 상징하는 바가 크다.



이 글에 5가지 오류가 있다. 순서대로 적는다.

1. '미르'는 순 우리말이다. 용(龍)을 의미한다. 고대 우리말에 '미'는 물(水)의 의미가 들어가 있다. 미르, 미나리, 미역, 미꾸라지가 모두 물과 관련 있다. 

<미>가 물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은 성급하다. 알타이어에 물에 관한 숱한 어휘가 있는데 반드시 그렇지 않다. 또 미나리의 미가 물이 되려면 나리가 따로 남는데, 미나리는 나리와 관련이 없다. 미역의 미 역시 관련이 없다. 미역의 최초 기록은 '머육'인데 국어학자 서정범은 바닷말을 뜻하는 말(藻)에 왔다고 주장한다. 미꾸라지는 미끄럽다는 데서 온 말이 가능성이 더 높고, 강원대 권오길 교수는 가끔 산소호흡을 하는 미꾸라지가 항문에서 공기방울이 뽀글뽀글 나와 '밑이 구린 놈'이라는 뜻에서 왔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물론 정설은 아니다. 함부로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2. 일본말에서 '미즈'는 물을 뜻한다. 여기에서도 역시 '미'가 들어간다. 고대 우리말이 일본으로 건너갔음을 암시한다. 

- 고구려어, 백제어, 신라어가 일본으로 간 사례는 굉장히 많다. 그렇다고 일본어 한 단어로 어원을 유추하는 것은 위험하다.


3. 미르재단은 '용의 재단'이라는 뜻이 된다. 박근혜 대통령이 1952년 임진생(壬辰生)이다. 용띠에 해당하니까 최순실이 재단 이름을 '미르'라고 지었던 것 같다.

- 우리나라에서 띠를 말할 때는 입춘을 기준으로 삼는다. 박근혜는 양력 2월 2일생이다. 따라서 용띠가 아니고 토끼띠다. 이 글을 쓴 이는 사주역술하는 사람으로 아는데, 이건 그쪽 분야의 기본 상식이다.


4. 강과 폭포, 호수에는 미르가 산다고 믿었다. 우리말 지명 '미리내'는 미르가 사는 내(川)이다. '개천에서 용 났다'는 말도 이러한 맥락에서 생긴 말이다.

개천에서 용난다는 건, 작은 개천에는 용이 살 수 없는데 큰인물이 났다는 비유다. 용이 개천에 산다는 뜻이 아니다.


5. 농사지으면서 미르에게 빌다가 불교가 들어오면서 미륵에게 빌게 되었다. 미르가 살고 있던 늪지대에 불교 절을 지을 때는 대량의 숯을 사용하여 메웠다는 전설이 있다. 숯이 촛불? 촛불이 상징하는 바가 크다.

미륵은 물이나 용과 관련이 없다. 원래 산스크리트어로 마이트레야인데 한자로 음역한 것이 미륵이다. 자비로운 어머니란 원래 뜻도 있다. 용과 아무 관련이 없다. 또 절을 지을 때 물 나는 자리에 숯을 넣는 것은 '물을 먹어도 딱딱한' 숯의 성질을 이용해 땅을 다지기 위한 것이지 촛불하고 아무 상관이 없다. 


- 우리나라 국민은 지적으로 깊고 세련되지 않아 비전문가의 작은 선동에 쉽게 넘어간다.

거짓말을 해도 거짓말인 줄 모르고 박수 치며 환호한다. 요즘 연영과 출신의 한 젊은이가 역사 강의를 하는 걸 보면 숨이 턱턱 막힌다. 저러고도 겁 안나나 싶을 정도로 거짓말이 매끄럽다. 그러니 3천년에 한 번 핀다는 우담바라 꽃이 해마다 피어도 의심하지 않고, 100년에 한번 핀다는 고구마가 해마도 꽃을 피워도 의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