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은 때려죽여도 죄가 안되던 시절이 있었다
이성계의 후예들은 조선왕조 5백 년을 통틀어 불교를 내리누르는 억불정책을 꾸준히 썼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성종에서 연산왕까지는 극심한 탄압을 일삼았다. 불교를 사교(邪敎)로 단정하여 사찰을 불태우고 불상을 파괴하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승려는 노소를 막론하고 강제 환속을 시킴으로써 불교의 씨를 말리려고까지 하였다.
이렇게 불교를 탄압한 것은 이성계의 쿠데타를 고려의 국교였던 불교계에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성계가 정치 이념으로 유교를 내세워 신봉하고 장려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무리수가 불교계에 떨어지고 그때마다 불교는 잎을 잃고 가지가 꺾이고 기둥마저 썩는 수난을 당해야만 했다. 오늘날 그 뿌리만 겨우 남은 불교가 회생을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은 조선조 5백 년 동안 철저히 탄압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성계의 군사 쿠데타의 피가 흐르고 흘러 마침내 조카를 불태워 죽이면서까지 정권을 찬탈한 세조에게 그 맥이 이어진 시기에 지엄은 세상에 태어났다.
당시 김천 직지사에는 벽계 정심(碧溪正心) 선사가 있었는데 그 난리통에도 유일하게 조계의 법맥을 이은 큰 스님이었다.
하지만 정심 화상도 관원의 등살에 견디다 못해 직지사를 떠나 황악산 너머 지리산 물한리라는 산골로 들어가게 되었다. 머리를 깎거나 승복을 입으면 대번에 잡혀가니 할 수없이 신분을 숨겨야만 했다. 그래서 스님은 그곳에 오두막을 지어 시봉들던 여신도를 부인으로 삼고 나무 장사를 하면서 탄압이 완화되기만을 기다렸다.
그때 선지식을 찾아다니고 있던 지엄은 사찰마다 텅텅 비어 썰렁한 바람만 불고 있는 현실을 보고 공부에 인연이 없음을 탄식했다. 선지식은 고사하고 도반마저 만나기 힘들고, 지엄 자신도 늘 관원을 피해 숨어 다니는 형편이었다. 세상은 양반 놀이에 미쳐 돌아가고 사찰마다 폐허가 되어 있었다.
“아무리 난세라도 선지식은 계시련만....”
지엄은 텅빈 바랑을 짊어지고 터덜터덜 전국을 걸어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지친 발도 풀 겸 정자 그늘에 앉아있는 지엄 앞에 다른 스님 한 분이 지나갔다. 그 스님과 이 얘기 저 얘기 나누던 중 지엄은 정심 화상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
“정심 화상이 지금은 몸을 숨겨 물한리에 계신데, 나무꾼으로 위장하셔서 조계의 법맥을 지키신답니다.”
“그래요?”
신심이 솟구친 지엄은 단숨에 물한리로 찾아갔다. 산 넘고 물 건너는 것이 전혀 힘든 줄 모르고 첩첩산중을 찾아간 것이다.
“소승 문안드립니다.”
“어디서 온 수좌이길래 이 하찮은 나무꾼을 찾는가?”
“계룡산 와초암에서 왔습니다.”
“이름은?”
“지엄입니다.”
“왜 하필 늙은 나무꾼을 찾아왔는가 물었네.”
“도를 배우러 왔습니다. 선지(禪旨)를 가르쳐 주신다면 몇 해라도 정성껏 시봉하며 배우겠습니다.”
“살림이 군색해 남는 방이 없네.”
“제가 만들지요.”
“무얼 먹고?”
“이래봬도 힘은 장사입니다.”
“그럼 함께 나무꾼이 돼보세.”
마침내 정심의 허락을 받아낸 지엄은 우선 초가 한 칸을 엮었다. 풀을 베어다 하늘을 가리고 흙을 물에 개어 벽을 발랐다. 그리고 소나무 가지를 잘라 지게를 맞춰 당장 땔나무를 하기 시작했다.
지엄은 밥값뿐 아니라 스승을 모실 생각으로 쉬지 않고 땔나무를 해서 장에 내다 팔았다.
사는 게 훨씬 좋아졌지만 스승 정심은 지엄에게는 더욱 알뜰히 일만 시켰다. 마치 그것이 정심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인 것처럼 늘 일만 시킨 것이다. 지엄도 처음에는 스승의 깊은 속을 몰랐기에 그저 황송한 마음으로 날을 보냈다.
지엄이 이따금 도를 물을라치면 정심은 요리조리 발뺌을 했다.
“스님, 도가 뭐래요?”
“오늘은 기운이 다 해서 말할 수가 없으니 다음에 이야기하자. 늙으니까 지게 지기도 힘에 부쳐.”
간혹 던진다는 말이 지엄을 웃게 하는 정도고 지엄을 만족시킬만한 선문답은 일절 나누지 않았다. 다만 “제 공부는 제가 하는 것이지 남이 해주는 게 아니다.”라고만 덧붙일 뿐이었다.
‘아이고 답답해.’
지엄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지엄이 알고 싶은 것은 조계의 법맥을 이었다는 정심 화상의 비상한 법문이다. 뭔가 화끈한 감격을 줄 만한 강한 충격을 바랐다.
지엄은 나름대로 좌선을 열심히 하면서 정심의 가르침만을 고대했다. 그럴 때마다 들려오는 것은 나무하러 가자는 말뿐이었다. 더구나 이따금 안방에서 들려오는 대화는 평범하기 짝이 없었다. 부인과 나누는 그저 그런 잡담에 불과했다. 그럴수록 더욱 초조해졌다.
“그놈의 도는 어떻게 생겼길래 그다지도 소중히 감춰둔단 말인가!”
지엄은 마침내 불만을 품게 되었다. 속았다는 생각도 해보고 정심이 가짜라는 생각까지 하면서 철저히 증오하였다.
지엄이 물한리에 들어간 지 석 달째 되던 어느 날, 정심이 홀로 산에 오른 사이 그는 하산을 결심하고 말았다. 빈 바랑을 들쳐메고 산 길을 내려가는 지엄의 가슴은 미어지는 듯했다.
‘내가 저따위 늙은 나무꾼에게 속아 석 달이나 산골짜기에서 썩었다니.’
지엄이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정심이 나뭇짐을 지고 돌아왔다. 지엄의 방을 들여다본 화상은 지엄의 하산을 알아차렸다.
“지엄 스님이 내려갔어요.”
“왜?”
“당신이 밤낮 미루기만 하고 도를 가르쳐 주지 않으니 화가 나서 갔겠지요.”
“내가 안 가르쳐 주었나, 제 놈이 알아듣질 못했지. 자고 나서 인사할 때도 내가 반은 가르쳐주고 밥상을 갖다줄 때도 내가 반갑게 받았으니 도를 가르쳐준 것이요, 산에 가서도 때에 맞게 이것저것 말했는데 제가 몰랐지 내가 안 가르쳐 주었나?”
그러고는 산아래를 내려다보던 정심은 멀리 씩씩거리며 길을 가고 있는 지엄의 모습을 지켜보며 슬며시 웃었다. 그러더니 큰 소리로 지엄을 불렀다.
“지엄아, 지엄아! 나 좀 보고 가라!”
메아리가 우르르 계곡을 울리면서 화가 잔뜩 나 있는 지엄을 흔들었다.
지엄은 무심코 산마루를 올려다보았다. 그때 또 한 번의 메아리가 지엄의 귀를 마구 흔들어댔다.
“도를 달라는데 내가 안주었다고? 여기 있다. 옛다! 도 받아라!”
정심이 무엇을 집어던지는 시늉을 해보였다. 산을 뒤흔드는 메아리의 물결 속에서 정심의 몸짓은 지엄의 가슴으로 깊이 박혀들었다. 지엄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이심전심의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지엄은 다시 정심에게 달려가 인가를 위한 정식 선문답을 마치고 또다시 시봉에 열중하였다. 그렇다고 생활 자체에 변화가 온 것은 아니었다. 그저 열심히 산을 오르내리며 나무 장사만 계속했다. 다만 변화라면 그의 좁은 의식 세계에 갑자기 강한 폭발이 일어난 나머지 속이 너무 허했던지 이따금 허허 하면서 빈웃음을 흘릴 따름이었다.
그러나 지엄의 깨달음은 단순한 교감일 뿐 궁극의 깊은 이치에는 이르지 못한 것이었다. 그의 손제자인 서산의 청허당집(淸虛堂集)에 의하면 지엄은 그 후 금강산에 들어가 대혜어록(大慧語錄)을 보다가 ‘개한테는 불성이 없다.’는 화두를 타파하고 또 고봉어록(高峰語錄)을 보다가 ‘颺在他方(양은 바람에 날린다는 뜻)’이란 귀절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서산은 스승 지엄의 평소 생활을 적었는데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인사(人事)를 닦지 않았으므로 세상에 아첨하지 않았고 세상에 아첨하지 않았으므로 불법을 세상에 팔지 않았다. 무릇 선학에 참여하는 자들은 오르지도 못할 절벽 앞에서 거만하다고 비방하는 사람이 많았으니 옛 사람이 말하기를 고기가 아니면 어찌 고기를 알아보겠냐고 한 말이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 지리산에 벽송사 창건하다
말년에 지리산에 은거하면서 여름이나 겨울을 가리지 않고 누더기 한 벌로 옷을 삼고 음식은 약을 먹듯이 조심스럽게 먹었다. 약이든 음식이든 먹는 것도 먹히는 것도 아닌, 그저 서로 만나 잠시 지나치는 것처럼 억지로 구속하려 하지 않았다. 진리의 흐름에 자신을 맡겨버린 듯한 보살행이고, 무위의 고고한 실천이다.
지엄은 어느 날 법화경을 강의하다가 문득 방편품에 이르러 길게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중생이 어리석어 스스로 제게 있는 광명을 발견하지 못하고 오래도록 윤회를 받아왔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이것을 불쌍히 여겨 입이 아프시도록 방편으로 말씀하신 것이 바로 법화경 방편품이다. 그러나 모두 중생을 깨우치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 것이요, 정법은 아니다. 정법이란 적멸허확하여 말로써 그 형상을 그릴 수 없는 것이니 이제 너희들이 정말 부처님의 실상을 믿으려면 당장에 자기 마음 속을 들춰내야 한다. 그래야만 부처님의 은혜를 갚는 것이다. 오늘 나도 너희들을 위하여 또 하나의 적멸상을 보일 테니 너희들은 절대로 밖에서 찾으려 하지 말고 한 마음 속을 더듬어 보아라.”
지엄은 시자를 불러 차를 달여오라 이른 뒤 잠시 문답을 나누다가 시자가 끓여온 차를 마시고 방장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 후로 오래도록 아무 기척이 없어 문을 열어보니 벌써 앉은 채로 입적에 든 뒤였다.
1534년 11월 초하루 아침이었다.
제자로는 서산(西山)의 스승인 숭인(崇仁)을 비롯하여 설은(雪은), 원오(圓悟), 일선(一禪) 등이 있다.
다음은 지엄의 임종에 대한 서산의 감회다.
서산은 지엄의 법손(法孫) 즉 불법으로 볼 때의 손자이다.
“아아, 섶의 불은 다함이 없고 의식의 성품은 멈추지 않네. 겁의 바다는 망망하고 묵은 자취는 아득하니 어찌 해와 달로써 기록할 수 있겠는가. 대개 이미 지나간 것이 환화(幻化)일진대 부처님도 다 환화로 장엄하여 환화인 중생을 깨우쳤다네. 부처와 중생이 다 하나의 환화일 뿐이니 어찌 우리 대사만이 환화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환상의 정체 또한 거짓이 아니니 보는 이는 소홀히 여기지 말라. 초상을 흠모하여 시를 짓는다.”
진단의 가죽, 천축의 뼈
중국의 달과 조선의 바람은
살이 있는 머리틀을 움직이는 듯
어두운 거리의 촛불
법의 바다에 떠있는 외로운 쪽배라네
슬프다, 사라지지 않으리니
만년이요, 또 천추이어라
진단은 중국, 천축은 인도의 딴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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