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록의 힘/아빠 나 무시하지마

할머니, 가슴이 두근거려

<할머니, 가슴이 두근거려>

기윤이는 올해 여덟 살 원숭이띠, 초등학교 1학년이다. 학교에 갔다오면 일단 텔레비전을 켜놓고 나서야 옷을 갈아입는 텔레비전 광이다. 매일매일 봐야 할 만화 프로그램을 꿰고 있으므로 한 프로그램도 놓치려 하지 않는다. 어디 갈 일이 있어도 거기서 만화를 볼 수 있는지부터 알아보는 아이다. 동화책 읽기를 아주 좋아하고, 주말의 명화쯤은 다섯 살 시절부터 즐겨보고 있다. 지나친 애정물이나 잔혹한 전쟁 영화만 아니라면 거뜬히 소화해낸다. 그래서 우리집에는 웬만한 동화책, 웬만한 디즈니 영화는 다 있다.
 
텔레비전을 볼 때도 가만히 앉아서 보질 않는다. 노래를 하거나 과자를 먹거나 숙제를 한다. 체조도 한다. 바쁘면 요강을 갖다놓고 일도 본다. 텔레비전 보면서 틈틈이 숙제하는 게 왠지 걱정되어 늘 야단치지만, 재미없을 때만 숙제를 한다고 주장하므로 일단 내버려 두고 있다.
재미있을 때는 정말 가관이다. 비명을 지르면서 온집안을 뛰어다니거나 주인공의 일희 일비에 따라 저도 울고 웃느라 시끄럽다.
 
그러던 어느 날.
이렇게 문장이 전환되면 뭔가 사건이 있다는 뜻이다.
<경찰청 사람들>이란 프로그램을 보다가 아이가 갑자기 헐떡거리기 시작했다. 도둑질한 사람은 죽어라 도망질하고, 경찰관 몇 명이 호루라기를 불면서 뒤쫓았다. 카메라가 흔들거리며 헉헉거리는 소리가 요란하더니 도둑과 경찰관이 뒤엉켜 한 바탕 뒹굴었다. 결국 도둑의 손에 수갑이 철컥 채워졌다. 그 장면을 보면서 우리 애의 호흡도 가빠지는 것이었다.
애가 과민 반응을 보이자 룸메이트인 할머니가 걱정되어서 왜 그러냐고 물었다. 평소 그것보다 몇 배 더 폭력적인 프로그램을 보고도 낄낄거렸었으니 말이다.
기윤 : 할머니, 나 가슴이 두근거려.
할머니 : 경찰청 사람들, 이젠 보지 말자.
기윤 : 할머니, 도둑질하면 경찰한테 저렇게 잡혀가?
할머니 : 그럼.
 
그것으로 끝이었다. 아이는 조용히 공부방으로 물러가 숙제를 마저 하고 혼자 세수하고 이 닦고 자러 갔다. 다른 날과 달리 아빠한테 와서 업어달라고 하지도 않고, 숙제를 하기 싫다고 엄마한테 떼를 쓰지도 않았다. 컴퓨터 게임 좀 하게 제 시디 롬을 넣자고 보채지도 않았다.
 
이튿날, 아이는 할머니한테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하소연했다. 그제야 식구들은 우황청심환을 반 쪽내서 먹여라, 폭력 프로그램은 절대 보이지 말아야 한다, 애가 겨우 여덟 살인데 우리가 착각하고 있었다 하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그 이튿날은 토요일이라서 엄마가 학교에 가서 아이를 데려오는 날이었다. 평일에는 학원차가 데려갔다가 데려다주지만 토요일만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토요일은 ‘까먹는 날’로 정해졌다. 딸아이는 돈 천 원을 받아들고 교문을 나서더니 늘 다니던 단골가게로 들어가지 않고, 그 가게 앞에 주차해 있는 차량 옆을 살그머니 지나 다른 가게로 들어갔다.
 
아이를 지켜보던 엄마는 뭔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챘다. 그래서 가게에 다녀온 딸을 자동차 옆자리에 앉혀 놓고 물었다.
엄마 : 너, 엄마한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지?
기윤 : 없어.
엄마 : 그런데 왜 강원문구 안가고 다른 가겔 가? 강원문구가 네 단골이잖아?
기윤 : 다른 가게가 더 좋아.
엄마 : 그러면 왜 강원문구 앞으로 지나가지 위험하게 차 옆으로 몰래 지나갔어?
그러자 순진하기만 한 딸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엄마 : 엄마한테 할 말 있으면 해. 엄마는 네 편이니까.
기윤 : 나, 강원문구에서 사탕 그냥 먹었어.
엄마 : 돈 안내고?
기윤 : 응.
엄마 : 너 그래서 경찰청 사람들 보면서 가슴이 두근거렸던 거지?
기윤 : 응.
엄마 : 그래서 강원문구 아줌마한테 잡힐까봐 피해다녔니?
기윤 : 응. 학교 올 때도 무섭고, 집에 갈 때도 무서워. 아줌마 만날까 봐. 그래서 가게 앞을 지날 때면 가슴이 두근거렸어.
아이는 교문 바로 앞에 있는 그 가게 앞을 지나기가 너무도 두려워 가게 앞에 차가 서 있기를 기도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면 차 뒤로 몰래 다닐 수 있으니까.
 
엄마 : 그러면 엄마가 하자는 대로 하자. 아줌마한테 가서 사실대로 말씀드리고 돈을 내자. 그러면 아줌마가 용서해줄 거야.
기윤 : 그래도 무서워.
엄마 : 걱정마. 엄마가 앞장설 테니까 너는 엄마를 따라오기만 해. 사과도 엄마가 할게.”
기윤 : 알았어.”
 
엄마 : (기윤이를 앞장 세워 문구점으로 들어서며)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문구 아줌마 : 기윤이 왔구나.
기윤이는 강원문구 단골이다. 단골이면서 도둑질을 했다.
기윤 : (고개를 푹 숙이고 묵묵부답) ….
엄마 : (기윤이가 훔친 장물을 내보이며) 기윤이가 이걸 사고 돈을 못 치렀대요. 이거 얼마죠?
문구 아줌마 : (눈치를 채고는) 5백원요. 기윤이는 참 정직한 애구나.
결국 모녀는 단골인 문방구에 들어가 이실직고하고 사죄하고 사탕값을 치렀다.
문구 아줌마 : 올 1학년 애들이 좀 이상해요. 다른 학년보다 손버릇 나쁜 애들이 더 많네요.
엄마 : 그럴수록 더 조심해서 애들이 훔쳐갈 기회를 주지 마세요. 미안합니다.
딸은 그제서야 마음이 놓였는지 그 가게에서 과자 한 개를 더 사가지고 나왔다.
기윤이는 사태가 해결되고 나서야 헤헤 하고 멋쩍게 엄마를 올려다보며 웃는다.
그러고도 엄마한테 한 가지를 꼭 다짐시켰다.
기윤 : 엄마, 아빠한테는 절대로 말하지 마. 아빠가 실망해. 약소옥.
그러고는 손가락까지 걸었다.
물론 엄마는 그 약속을 배신하고 아빠한테 다 털어놓았다. 모르는 척하라고 단서를 붙이긴 했지만. 그 이야길 듣고 딸한테 가보니 벌써 잠들어 쌔근쌔근 자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내 딸도 마침내 인생을 살아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코끝이 시렸다. 그래, 이렇게 인생은 시작되는 거란다.

'기록의 힘 > 아빠 나 무시하지마'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걸 왜 따먹어?  (0) 2008.12.31
아빠가 내 아들이라면  (0) 2008.12.31
우리 엄마는 나쁜 엄마에요  (0) 2008.12.31
엄마, 참 나가 뭐야?  (0) 2008.12.31
휴 자로 시작하는 거  (0) 2008.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