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등학교를 두 군데 다니느라 4년만에 대학에 갔다. 그래서 1년 늦은 78학번이다.
청양농업고등학교를 자퇴하고, 공주고등학교에 신입생으로 다시 들어갔기 때문이다.
집안 사정이 안좋아 농고를 다닐 참이었는데, 다니면서 생각하니 내 인생이 너무 아까워 이럴 수가 없다는 생각으로 고민하다가 그해 11월인가, 무작정 이모 사는 공주로 가서 시험을 쳐버렸다. 입시 점수가 200점 만점인데, 난 체력장 시험을 안보았으니 -20점으로 응시하여, 1년 전 실력으로 겨우 들어갔다.
1978년, 둘째형이 나 가르친다고 주중에는 건설현장으로 나가고, 주말에는 이삿짐센터 일꾼으로 나갔다.
형이 워낙 고생하여 날 가르치던 중이라 목숨 걸고 박정희와 싸울 생각은 하지 못했다. 시위가 있으면 참여하는 정도지 일 삼아 몰려다니고 시위를 기획하고 유인물을 들고다니지는 못했다. 그래도 1979년 10월 26일 아침 "각하가 서거하셨다"는 주인집 아주머니의 눈물 섞인 절규를 듣고 "와, 그거 잘됐네요!(이 말은 후회한다. 철없어서 모진 말을 했다) 이제야 세상이 바뀌겠네요!" 이러는 바람에 눈밖에 났다.
1980년에는 대학생불교연합회 서울지부장을 맡아 어쩔 수없이 시국에 깊이 관여할 수밖에 없었다.
광화문, 시청, 남대문 등에서 벌어진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면서 나도 매일 같이 현장에 나가 싸웠다.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돌을 던지고 "전두환 물러가라!"는 함성을 질렀다. 그때의 눈물 콧물을 잊을 수 없다.
- 여기 내가 있었다. 화염병은 던지지 않고 돌멩이는 던졌다.
지금도, 불타는 페퍼포그차(지랄탄이라고, 최루탄을 기관총처럼 발사하던 차량)에서 뛰쳐나오던 경찰이
"나도 대학생입니다, 학생입니다!" 하던 소리가 귀에 맴돈다.
그래, 전두환은 청와대에 숨어 있고, 우리끼리 싸웠지.
그해 부처님오신날에 대불련 제등행렬 중 광화문에 이르러 연등에 불을 질러 태우며 일제히 시위를 하기로 모의를 했다. 그런데 준비 중에 광주에서 참극이 일어났다.
대불련 광주지부에서 실시각으로 소식이 들어왔다. 공수부대가 총을 쏜다, 금남로에 시신이 나뒹군다, 그러다 전화가 끊기고, 사무실은 폐쇄되었다. 그뒤 소식을 못들었으니 여러 사람이 죽었을 것이다.
대학 정문은 즉각 탱크로 막히고, 대불련 모임도 갖지 못한 채 휴교령 속에서 나는 집에 들어앉아 <아드반(나중에 '사막을 걷는 사람은 별을 사랑해야 한다'로 바꿈)>와 <허공 잡는 긴 외침 - 오도송 임종게(나중에 '목불을 태워 사리나 얻어볼까'로 제목 바꿈)을 써냈다. 이게 나의 1980년이었다.
당시 나보다 3살 많은 김영환 의원(55년생)은 연세대 치대를 다니다가 박정희 정권과 싸우기 시작, 이 감옥으로 저 감옥으로 전전했다. 대학에선 제적되고, 그는 박정희 세상에서 '단순조립공'이 되어 노동현장을 누볐다.
그러다가 광주항쟁이 일어나자 또 들고 일어나 부부가 함께 합수부에 붙들리고, 그의 어머니까지 연행되었다. 전두환 시절, 부부가 모두 민주화유공자가 된 경우는 매우 드물 것이다.
나에게는 너무나 생생한 시절이다.
이제 민주화가 됐다고, 살만하다고 그 시절을 잊어서는 안된다.
지금은 누구나 다 독재자와 싸울 것같이 말하지만 당시에는 그러지 못했다. 비겁한 사람이 더 많았다. 아니, 대부분 비겁했다.
일제 때도 그랬다.
침묵해주는 것조차 감사할 정도로 일왕을 칭송하고, 박정희 생신에 선물 갖다바치고, 전두환에게 머리 조아리며 찬송하던 자들이 있었다.
이제 길목마다 전철역마다 학교마다 강의동마다 하이에나처럼 노려보는 짭새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함부로 말하면 안된다. 민주화 운동을 폄하해서도 안된다.
김영환이 노동현장에 있을 때 지은 시 <단순조립공>으로 김호철이란 분이 노래를 지었다.
김영환은 십수년만에 치대를 졸업하고 의사로 성공했다. 그뒤 김대중 정부에서 초대 과기부장관을 지내고 국회의원을 4번 했다.
2016년 안철수 문병호와 함께 "우리가 이러자고 정치하나?" 후회하면서
오직 국민 편에 서자는 새정치 깃발을 들고 국민의당 창당에 나서고 오늘에 이르렀다.
인간의 삶은 올곧아야 한다.
지렁이 기어가듯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면 못쓴다.
만일 김영환이 전두환이 만든 당에 들어가 장관을 하고, 도지사를 하고, 국회의원을 했다면 난 그를 쓰레기로 여기고 쳐다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는 단 한 번도 진실과 정의가 아닌 길은 가지 않았다.
지금 그가 가는 길도 그러하다.
그래서 그의 어깨를 두드린다. 힘내라고!
그가 민주화 현장에서 피땀 흘릴 때 나는 그저 거들기만 하면서 소설 150권을 써냈다.
우리말 사전 10권을 만들었다. 정말 귀중한 바이오코드를 28년 걸려 발명하고 완성했다.
그가 한 것을 나는 못하고, 내가 한 것을 그는 못했다.
그래서 <우리>가 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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