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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태양/전원 이야기

부여 궁남지 연꽃

백제 무왕이 궁 남쪽에 만든 큰못(大池)인 궁남지에 연꽃이 활짝 피었다.

삼국사기 기록에 서기 600년대, 즉 641년 이전에 무왕이 직접 사비궁 남쪽에 큰 못을 만들어 잔치를 하고, 뱃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또한 일본서기 기록에는 이 못을 만든 기술로 일본 정원 문화를 이뤘다고 한다.

무왕은 동아시아에 널리 알려진 힘있는 왕으로서 일본과 중국에 영향력이 컸다. 그가 죽자 당나라 태종이 소복을 입고 곡을 했다 한다. 

무왕은 익산 출생으로, 능도 익산에 썼다. 2018년 7월 17일에는 무왕의 뼈가 공식 확인되기도 했다. 

익산에서 태어나 마를 캐는 소년으로 살던 무왕은 동아시아 최대 강국 백제 왕위에 40년간 있었다.


다만 안따까운 것은 그의 아들이 바로 의자왕이고, 거기서 백제가 멸망해 왕족들이 대부분 일본으로 건너가 오늘날 일본의 뼈대를 이뤘다는 사실이다. 백제가 망할 때 제명천황(무왕의 딸로 추정)은 백제부흥군 수만 명을 조직해 달렸지만 후쿠오카에서 숨지고, 이 군대는 결국 조국을 구해내지 못했다. 이후 일본은 백제가 사라지자 왕호를 버리고 자신들이 본국이라는 의미로 천황을 자처했다.

오늘날에도 일본 왕실의 무의식에는 백제를 향한 강렬한 향수가 남아 있고, 일제 때에는 부여에 실제로 왕궁을 조성하려 시도하기도 했다.


지금의 궁남지는 백제가 망한 후 논으로 쓰이던 것을 발굴, 약 1만 평 정도만 복원한 것으로 대부분 연을 심었다. 카약 같이 생긴 작은 보트가 돌아다닐 수 있다.


나는 이곳에서 북서쪽으로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청양에서 태어나 중학교 마칠 때까지 살았다. 할머니(김만희)는 부여 출신이다.












페이스북 / 어제, 공주에 내려가 풀을 깎은 뒤, 일본 왕실의 뿌리가 된 백제 무왕이 만든 사비성 남쪽 연못 '궁남지'에 다녀왔다.
내 고향 청양(나는 청양-공주-부여를 다 내 고향으로 여긴다)에서 30킬로미터, 할머니가 태어나 자란 땅이다.
무왕이 40년 재위 끝에 죽자 당의 태종이 소복을 입고 곡을 했다고 한다. 무왕은 그만큼 동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왕이었다.
익산에서 태어나 익산에 묻힌 무왕은 2018년 그의 유골이 공식 확인된 실제 역사 인물이기도 하다.
유감스럽게도 그의 아들이 의자왕이다. 백제가 망할 때 무왕의 딸인 일본의 제명천황(천황은 나중에 추증된 호)이 일본군의 절반에 해당하는 3만 5천 명을 이끌고 달렸지만 그는 후쿠오카에서 죽고, 백제부흥군은 조국을 구해내지 못한 채 백마강에서 전멸한다. 이후 일본과 조선은 영영 갈라선다.(일본이 보기에 한국은 백제를 멸망시킨 원수이고, 통일신라가 보기에 일본은 백제의 잔당일 뿐이다.)
일본 왕실의 무의식에는 백제를 향한 강렬한 향수가 아직 남아 있다. 일제 때에는 부여에 실제로 왕궁을 조성하려 시도했다. 이번에 퇴위한 일왕의 소원이 공주 부여 익산에 가 자기 조상들 뼈가 묻힌 능에 절 한 번 하는 일인데, 그걸 못하고 있다.

악귀들처럼 싸우는 여야, 실제로는 피터지게 당하면서, 임란, 식민지, 육이오, 외환위기 등 백전백패했으면서도 늘 정신승리만 부르짖는 일부 정치인들 보면서 연꽃의 아름다움에 시름을 맡겨 본다.

일본 가서 창고로 안내되는 우리 협상단, 적은 일본인데 오직 자유한국당만 물어뜯는 민주당, 일본에는 말 한 마디 대놓고 하지 못하면서 우리 국민더러 경제보복하지 말라고 현수막이나 다는 자유한국당이 그 주범임을 다시 한번 새긴다. 일본군의 개틀링 기관단총을 향해 진격하라며, 겨우 부적 한 장씩 가슴에 붙여주고 죽창 하나씩 들려준 전봉준을 닮으라고? 죽창 들고 법무장관하든지 대통령하든지 마음대로 해보라지. 내가 웃고 만다.

* 이 연못에서 무왕, 의자왕이 배타고 놀았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