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경향신문에 1년간 연재한 소설 <당취(黨聚)>를 쓸 때 언제고 한번 쓰자고 결심한 소설이 <하늘북>이다.
그래서 그해가 가기 전에 <소설 정역(正易)>이란 이름으로 발표했다. 그뒤 2006년에 <하늘북소리>란 제목으로 바꾸어 2판을 내고, 이제 2020년이 되어 <하늘북>이란 이름으로 완전개정판을 3판으로 내게 되었다.
이 소설은 소설 <당취(黨聚)> 1권(현재 해냄출판사 본에는 소설 토정비결 3권이다, 3권이던 소설 토정비결은 1, 2권으로 두텁게 묶고, 여기에 당취를 두 권으로 합쳐 포함시킨 것이다)에 예고되어 있었다.
“이 녀석아. 살려면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 하느니라. 절대로 눈 뜨지 말고 죽은 척하거라. 안 그러면 진짜로 네 목을 따 희생(犧牲)을 삼아야 하느니. 일단 굿이 시작된 뒤에는 내가 네 머리를 지팡이로 두드리기 전에는 눈을 뜨면 안된다. 알았으면 어서 눈을 감아라.”
그러자 멧돼지는 다시 눈을 감고 죽은 듯이 움직이지 않았다.
휴정은 단에서 내려와 무당을 올려보냈다.
무당은 혼자가 아니었다. 열대여섯이나 났을까 싶은 어린 무당 셋이서 그 무당을 따라 단에 올라갔다. 장구와 북이 울리자 그들은 격렬하게 춤을 추면서 쉬지 않고 노래를 불렀다. 북소리가 둥둥둥 고조될 때는 단 주위의 나무 이파리가 파르르 떨곤했다.
불두와 불안은 가부좌를 하고 단을 향해 앉아 휴정이 치르는 봉선을 지켜보았다.
몇 시간이 되도록 무당들의 춤이 이어지는데, 그때 객승이라는 사람 둘이서 그 봉선 자리를 지나갔다. 산중에 스님들이 지나가는 거야 다반사지만 그래도 봉선 자리를 지나치는 건 우연치고는 이상했다. 그래서 모두들 무당한테서 눈을 떼고 그들 객승을 바라보자니 그들이 한 마디씩 하면서 지나갔다.
“난리가 난다고들 하는데 토정이란 술사가 생전에 다 비보를 해 놓았다더군.”
“전쟁을 막을 수도 있었지만 곪은 종기를 터뜨리는 거라고 내버려둔 곳도 많다네.”
휴정은 그들 객승이 멀리 사라지자 뭔가 생각이 난 듯 단을 향해 절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무당에게는 혼이 실리지 않았다. 토정은커녕 잡신도 오지 않는 모양이다. 휴정은 다급해졌는지 지극정성으로 절을 올렸다.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휴정을 따라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한 시간이나 했을 때다.
그때 갑자기 마른하늘에서 번개가 번쩍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하늘을 올려보아도 구름이라고는 보이지 않은 화창한 봄날씨다. 천둥소리까지 제법 크게 울리자 휴정을 비롯한 봉선 참석자들도 절을 하다 말고 모두 어안이벙벙해 하늘만 바라보았다.
“하늘북이 울리는구나.”
휴정은 혼잣소리로 중얼거리면서 하늘을 향해 계속 절을 올렸다.
여진족 무당도 뜀을 뛰다 말고 그 자리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마지막에 눈을 감고 있던 멧돼지가 놀라 번쩍 눈을 떴다. 그리고 휴정을 한번 바라보더니 산쪽으로 냅다 뛰었다. 어찌나 쏜살같이 달렸는지 멧돼지는 그만 석벽(石壁)에 쿵하고 머리를 짓찧었다.
“저, 저 멧돼지가...”
모두들 놀라서 절을 하다말고 일어섰다.
멧돼지는 머리를 한 차례 흔들고는 다리를 비틀거리며 산쪽으로 사라져갔다.
“스님! 큰스님!”
멧돼지를 바라보고 있던 불두는 석벽을 바라보면서 휴정을 소리쳐 불렀다.
“왜 그러느냐?”
“저기, 저기 좀 보십시오.”
불두는 멧돼지가 머리를 박고 지나간 석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과연 멧돼지가 머리를 박은 자리에 두꺼운 이끼가 벗겨지고 희미하게 글씨가 나타났다.
- 本心
소설 <하늘북>은 이러한 인식을 기초로 쓴 소설이다.
구한말, 무능한 왕실과 타락한 조정으로 백성은 도탄에 빠져 신음하고, 금수강산은 청(淸)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에 짓밟히고 하늘마저 슬픔에 잠겨 있던 그 시절.
당시 일본을 개화시킨 인물 중 자유(自由)라는 말을 만들어낸 후쿠자와 유기치(福沢諭吉)는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유길준, 윤치호, 서재필, 서광범을 제자로 기르며 조선의 개화를 간절히 염원했다. 하지만 개화파들이 일으킨 갑신정변은 무산되고, 김옥균 등은 참수형을 받아 그 꿈이 사라지자 후쿠자와 유기치는 "조선 인민을 위하여 조선 왕국의 멸망을 기원한다(朝鮮人民のために其国の滅亡を賀す)' 인민의 생명도, 재산도 지켜주지 못하고, 독립 국가의 자존심도 지켜주지 않는 그런 나라는 오히려 망해 버리는 것이 인민을 구제하는 길이다.”고 극언을 퍼붓는다.
이런 절망의 극한 상황에서 사상적으로 독특한 세계를 꿈꾸는 ‘미친’ 사람들이 조선땅에 나타났다. 이 세상은 혁명할 가치조차 없을 정도로 썩었다고 규정한 이들은 민란이나 혁명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더 큰 세계를 보고 더 큰 변혁을 꿈꾸었다.
한편 충청도 연산 사람 일부(一夫) 김항(金恒), 그는 일제(日帝)와 양이(洋夷)의 준동을 바라보면서 세상이 불의와 부정, 원한으로 가득 차서 이제는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치유 불능상태에 빠졌다고 판단했다. 안은 썩어문드러지고 밖은 사납게 날뛰었다.
결국 김항은 감히 하늘을 향해 사형 선고를 내렸다.
그는 선천의 묵은 하늘을 때려부수고, 그 대신 상생(相生)의 신천지, 새 하늘을 건설하는 꿈을 꾸었다. 그리하여 19세기 말의 인류로서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새 하늘, 새 땅, 새 사람이라는 신천지를 설계했다. 그것이 바로 ‘정역(正易)’이다.
과거 2000년 동안 주역의 시대가 펼쳐졌다면, 이제 21세기는 정역의 시대가 열린다. 주역은 중국 주나라 시대부터 이어져 온 동양의 역술서이고, ‘토정비결’은 토정 이지함이 주역의 음양설을 근거로 하여 만든 일년 신수를 보는 예언서이다.
그러나, 김항의 ‘정역’은 주역의 시대를 마감하고 앞으로 펼쳐질 21세기 이후의 세계를 예언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역서라 할 수 있다. 즉, ‘정역’은 ‘주역’의 밀레니엄 버전이다.
조선에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사람의 시대를 열어라!
《하늘북》은 곪고 곪은 종기처럼 터져버린 동학농민군이 궤멸당하고 일제가 시시각각 밀려들어오던 시절, 우리 한민족 역사상 가장 극심한 재앙기에 백 년 뒤의 밝은 미래를 내다보며 꿈을 잃지 않던 선각자,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이 소설 《하늘북》은 1800년대 말이 무대이고,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120년 뒤 현대의 대한민국에 다시 태어나 새 하늘, 새 땅, 새 사람을 완성하기 위해 《황금별자리》를 찾는다.
'이재운 작품 > 황금별자리 & 하늘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늘을 향해 사형 선고를 내린 사람들 (0) | 2021.12.02 |
---|---|
하늘북 2권 원고를 마치고 (0) | 2020.06.01 |
소설 황금별자리 (0) | 2020.05.11 |
태양은 어디를 향해 그리 급히 달리는가 (0) | 2016.0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