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주 큰스님께서 돌아가셨다. 내가 이따금 나는 불교신자가 아니라고 말할 때마다 가까운 사람들이 깜짝깜짝 놀라는데, 그 배경에 월주 큰스님이 계시다
나는 1980년 3월부터 개운사 부속건물에 마련된 대불련 서울지부에 자주 나갔다. 그 험한 해에 나는 대불련 서울지부장이 되고, 광주항쟁이 일어나 대학이 모조리 폐쇄될 때까지 이 일을 맡았다.
주말마다 개운사에 갔는데, 당시 법률적으로 조계종 총무원장으로 선출되기는 했으나 조계사파 개운사파 갈등이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이라, 월주 스님은 한가할 때마다 마당으로 나오셔서 우리 대불련 학생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시곤 하셨다. 울분에 차서 하시는 말씀인데, 어린 내게는 아수라 세계의 끔찍한 이야기로 들렸다. 지금도 나는 머리 깎은 분들 보면 먼저 아수라 나찰 파순 따위를 떠올리곤 하는데, 월주 스님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너무 충격적이어서 그럴 것이다. 스님들이 도박한다, 아내와 자식을 숨겨둔다, 룸살롱 드나든다 정도는 낭만에 속할 정도였다. 그러면서 월주 스님은 어떻게 해야 이 나라 불교를 다시 세울 것인가 피 끓는 주장을 펴곤 하셨다. 당시 45세셨다.
이런 대화는 광주항쟁이 일어나 서울 시내 모든 대학에 탱크가 배치되고, 군인들이 출입을 막을 때까지 계속 되었다. 그때 나는 나라도 불교도 다 버리고 시골집으로 돌아갔다. 그때 헤어진 대불련 동지들, 그리운 이 분들을 이 생에서 다시 보지 못했다. 광주에서 항쟁 소식을 전해오던 법우는 사망했다. 늦가을, 대학 문이 다시 열렸으나 대불련 서울지부는 문을 열지 못했다. 그때 우리 보호자이자 후견인이던 월주 스님은 전두환 신군부의 군홧발에 짓이겨진 상태라서 우린 갈 곳이 없었다.
이후 나는 한국 승려들을 통한 한국불교를 버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직행했다. 그래서 1980년은 내가 진짜 소설가로 데뷔한 해가 된다. 학교가 쉬니 날마다 집에서 책을 읽고 소설을 쓴 덕분이다.
난 지금도 한국불교 신자라고 말하지 못한다. 그래서 테라와다로, 마하야나로, 혹은 티베트불교로 이리저리 떠돈다. 30년 전, 바이오코드를 연구하기 시작할 때 내가 용수보살이 되어 새 불교를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부질없어 그만두긴 했으나 그 마음이 사라진 건 아니다.
젠장, 이런 얘기를 늘어 놓는 걸 보니 내 나이도 적은 건 아닌 모양이군. 어른들이 일제 시대 공출이나 깨묵 받아먹던 이야기하고, 육이오 때 피난 얘기하던 걸 지겹게 들었는데, 그 분들 불과 서른살, 마흔살이었다. 어쩌면 우리가 광주항쟁 얘기하고, 오일륙 쿠테타 이야기하면 청년들은, 국사 시간에 중종반정이나 인조반정 공부하듯이 여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내게는 실화인걸...
* 월주 큰스님, 다시 오셔서 이 나라 불교 좀 제대로 세워주십시오.
[새로 쓰는 근현대 불교사]50.‘정화’된 종단 다시 내부에서 양분 - 법보신문
1977년 신문에 실린 이서옹 종정의 중앙종회 해산 발표 장면. 사진제공=민족사 종정-총무원장 중심제 힘 대결…결국 소송으로 얼룩져교세 위축과 승려자질 저하로 분열…10·27법난 빌미 1954년 .
www.beopbo.com
'파란태양 > *파란태양*'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시 짐승의 시대로 돌아가 형수 찢어죽이고, 형 정신병원에 쳐넣자는 욕쟁이들 (0) | 2021.09.24 |
---|---|
나를 버리면 그때부터 니르바나가 시작된다 (0) | 2021.09.24 |
사람은 왜 중도에 발을 딛고 살아야 하나. (0) | 2021.09.24 |
폐암 투병 중인 김철민 씨를 응원한다 (0) | 2021.09.24 |
품위있게 일본을 이기자 (0) | 2021.09.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