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운의 <우리말의 탄생과 진화>
- 일본으로 건너갔다 천 년만에 돌아온 우리말들
모든 언어가 대개 그러하듯이 우리말도 홀로 고고하게 발전해 오지는 않았다. 정치적으로 단일민족을 주장한 적이 있지만 결코 사실일 수 없듯이 우리말만이 지상 최고의 언어요, 가장 과학적이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이따금 한글을 지나치게 숭상하는 이들 중에서는 우리말을 세종 이도가 만든 것처럼 종종 사실 관계를 오해하는데, 이도는 표기법만 만든 인물이고 우리말은 수천 년간 한겨레가 쓰면서 다듬은 것이다. 이도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의 부모들이 쓰던 말이 곧 우리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말은 완성된 말이요, 완전무결하다는 맹신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다듬고, 새 어휘를 만들거나 들여다 고쳐써야 한다.
그러자면 이웃 나라들과 교류하고 소통해야 하는데, 여기에 민족주의가 끼어들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우리나라가 교류하는 상대국이란 미국, 일본, 중국 세 나라가 대표적인데, 중국은 사대주의라 하여 안되고, 일본은 친일이라 하여 안되고, 요즘은 미국마저 친미라 하여 안된다는 목소리가 높다. 전에는 여진어, 몽골어, 거란어 등이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쳤는데 그때는 오랑캐라고 깔봐서 못하고, 오늘날에는 교류가 없어 역시 무시되고 있다.
오늘날 남아 있는 세 나라 중 우리하고 매우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가 일본이다. 일본은 유전자 검사에서 우리 민족과 가장 가까운 혈통으로 밝혀졌다.(중국의 경우 막연히 국가단위 유전자를 비교했을 뿐 여진족, 거란족, 묘족 등 소수민족과 한국인을 비교 연구했다는 기록을 아직 보지 못했다.) 동양인과 서양인은 유전자가 99.9% 동일하다는데, 한국인과 일본인은 이 차이 0.1%를 100으로 볼 때 불과 5.86%만 다르다고 한다.
지금까지 나온 연구 결과에 따르면 고대 한국어는 신라어, 가야어, 백제어, 고구려어 네 가지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학자들은 이중에서 가야어-백제어-고구려어 순으로 일본에 전파되었다고들 한다. 말하자면 나라가 망할 때마다 그 유민들이 열도로 집단 이주하면서 일본인과 일본어를 형성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한반도에 남은 한국어는 신라어 뿐이라서 일본어 속으로 스며든 가야어, 백제어, 고구려어의 원형을 찾아내기가 더 어려워졌다들 한다.
그런 중에도 천년이 지난 뒤 고구려어 몇 개가 돌아와 아직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옛 우리말이 많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에서 요지라고 부르는 ‘양지’나 된장을 가리키는 ‘미소’가 그렇고, 또 백제어이자 고구려어인 ‘밀(密=3)’, ‘우츠(于次=5)’, ‘나는(難隱=7)’, ‘덕(德=10)’이 멀쩡히 살아있다가 돌아왔다. 고구려어의 미에(水), 나(國), 탄(谷)과 나머르(鉛)는 각각 고대 일본어의 미두, 나, 타니와 나마리라고 한다. 백제어의 고마(熊)와 키(城)는 고대 일본어의 쿠마와 키이며, 고대 한국어의 셤은 일본어 시마, 낟(鎌)은 나타, 밭은 파타, 바닿는 와타로 살아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에서는 우리말 멍텅구리를 봉구라라고 하는데, 여기서 더 나아가 회골(위구르), 꾸러기 등을 보면 ‘굴’이 얼굴을 뜻하는 우리 옛말이라는 실마리가 잡힌다.
일본어는 이제 친일이니 극일이니 하는 개념으로 볼 게 아니라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간 동포들을 되찾아오던 마음으로, 일제에 징용되어 나가 살던 사할린 동포들을 모셔온 것처럼 정성들여 하나하나 확인해 돌아오게 해야 한다. 천년이 더 지난만큼 옛 모습이 온전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우리가 잃어버린 우리말이니 기어이 찾아오기는 해야 한다. 이처럼 일제 때 압록강, 두만강을 건넌 동포들을 따라 중국이나 러시아로 멀리 가버린 평안도, 함경도의 조선 후기어를 찾는 일도 중요하다. 이와함께 고구려어와 거의 비슷했을 여진어를 복원시켜야 할 간절한 의무가 중국이 아닌 우리나라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옛 조선의 백성이요, 고구려와 부여의 백성이었으니 여진어 속에 우리 고대어의 흔적이 적잖이 남아 있을 것이다. 말을 찾는 것은 우리 혼을 찾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재운(소설가․『뜻도 모르고 자주 쓰는 우리말 어원 500가지』대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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