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운의 <우리말의 탄생과 진화>
- 남사당 놀이에서 온 말 1
요즘에는 방송, 인터넷, 신문 등의 매체 발달로 새로 생긴 말이 쉽게 퍼지고, 그래서 새로운 말이 쉼없이 만들어진다. 그러다보니 정돈이 되거나 검증되지 않은 채 확산되어 우리 언어 문화가 그리 깔끔하지 못하다. 문법이 틀려도, 어법이 맞지 않아도 방송이 되고, 신문에 나오고, 더 심한 욕설이나 속어 따위도 인터넷 댓글에 마구 달라붙는다.
물론 옛날이라고 해서 말이 새로 생기지 않은 건 아니다. 속도가 느릴 뿐 새로 생기기도 하고, 들어오기도 했다. 그래도 요즘처럼 유행어, 신조어, 외래어가 마구 생겨나 며칠만에 전국 어딜 가나 다 쓰는 현상은 없었다.
그래도 유행어를 만들어 내고, 이런 유행어를 전파하는 수단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남사당이었다. 수십 명에서 최대 백여 명에 이르는 남사당 단원들은 팔도를 돌아다니면서 기예를 펼치는 게 주요한 일이지만, 이들은 바로 말을 나르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민중들의 가슴으로 파고들고, 그러면 너나없이 그들의 말을 따라 썼다. 조선시대에 남사당만큼 민중의 언어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친 집단도 별로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남사당이라면 단연 안성 남사당을 들 수 있는데, 안성장이 삼남대로를 깔고 앉아 한창 번성할 때는 적어도 두 팀 이상이 활동했던 모양이다. 그러다보니 남사당에서 직접 흘러나오는 유행어와 안성장에서 만들어진 어휘가 이들 남사당을 통해 전국으로 흘러나갔다. 그 예는 다음과 같다.
딴지걸다 - 씨름이나 태껸에서, 발로 상대편의 다리를 옆으로 치거나 끌어당겨 넘어뜨리는 기술을 딴지라고 한다. 남사당 패들이 살판을 놀면서 자주 쓰는 기술이다.
엿먹어라 : 남사당패는 그들만이 쓰는 은어가 많았다. 그중에서 '엿'은 '뽁'과 함께 여자 성기를 뜻하는 은어였다.
살판나다 - 남사당의 땅재주 놀음 중에 살판이라고 있다. 이들의 놀이는 매우 격렬하고 흥겹기 때문에 재주꾼들이 살판을 놀면 볼만했다는 뜻에서 ‘살판나다’는 재물이나 좋은 일이 생겨 생활이 좋아진다는 뜻으로 옮겨왔다.
얼른 - 남사당패의 은어로, '요술'이나 ‘마술’을 가리키는 말이다. 요술이나 마술을 부리려면 손놀림이 매우 빨라야 하는데, 이런 뜻에서 시간을 끌지 아니하고 바로라는 의미의 부사로 쓰였다.
마련하다 - 놋쇠를 만들기 위해 선별한 구리쇠 등의 일차 재료를 마련이라고 한다. 마련을 잘 가려야 높은 등급의 유기를 생산해낼 수 있다. 그래서 마련을 고르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정성이 들었던 데서 ‘마련이 많다’, ‘마련하다’ 등의 말이 생겼다. 이후 마련이란 헤아려서 갖춤, 어떤 일을 하기 위한 속셈이나 궁리의 뜻으로 발전했다.
부질없다 - 놋쇠를 만들려면 마련을 녹여야 하고, 그러기 위해 부질 즉 불질을 많이 해야 한다. 그런데 부질편수가 부질을 잘 못하면 놋쇠를 잘 만들 수가 없다. 여기에서 ‘부질없다’는 대수롭지 아니하거나 쓸모가 없다는 뜻이 생겼다.
트집잡다, 도구머리에서 왔나 - 갓은 원래 통영이 유명하지만 선비들이 쓰고다니다 보면 구멍이 나기 쉬운데 이를 수선하는 기술은 안성장 내 기술자들의 솜씨가 뛰어났던 듯하다. 특히 안성 도구머리(道基洞) 지역이 갓 수선으로 유명한데, 이들은 갓을 수선하면서 흠이 난 트집을 많이 잡아 수선비를 비싸게 타낸 데서 이 말이 나왔다고 한다. 이후 시비를 걸거나 트집을 잘 잡는 사람을 보면 ‘이놈이 도구머리에서 왔나?’라는 말까지 생겼다.
이후 한 덩이가 되어야 할 물건이나 한데 뭉쳐야 할 일이 벌어진 틈을 ‘트집’이라고 하고, 공연히 조그만 흠을 들추어내어 불평을 하거나 말썽을 부리는 것을 ‘트집잡는다’고 하고, 트집잡는 사람을 가리켜 ‘안성 도구머리에서 왔나’라고 쓰였다.
안성맞춤 - 경기도 안성 유기장에 맞춘 유기 세트가 주문자의 요구에 썩 들어맞게 잘 만들어졌다고 해서 생긴 말이다. 이후 무엇이든 좋은 제품을 가리켜 안성에 주문한 유기 제품처럼 품질이 좋다는 뜻으로 ‘안성맞춤’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안성장 윗머리냐 - 안성장 중에서 소를 매매하는 쇠전에서 소의 이를 검사하여 튼튼한 소를 윗머리라고 했는데, 자연 그런 검사를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바뀌었다. 이런 때문에 윗머리는 소의 품질을 가르면서 자연히 말이 많게 마련이었는데, 이를 가리켜 말많고 자꾸 따지는 사람을 가리켜 '안성장 윗머리냐?'라고 쓰이게 되었다.
다음 주에는 남사당 단원들끼리 몰래 쓰던 은어만 다뤄보기로 한다.
이재운(소설가․『뜻도 모르고 자주 쓰는 우리말 어원 500가지』대표 저자)
- 남사당 놀이에서 온 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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