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하늘로 돌아가신 지 9년 되었다. 9년도 길어 그새 아버지 묘소를 옮겨드리고, 그뒤 아버지가 보지 못하신 손자 한 놈, 손녀 한 놈이 태어났으니 길다면 긴 세월이다.
제목을 '아버지의 유산'이라고 적으니 땅이라도 받은 줄 알겠지만 우리 아버지는 집과 집터 말고는 남겨주신 게 없다. 형제들이 다툴 일 없어 참 좋다. 우리 아버지, 참 훌륭하신 분이시다.(요 어디 사는 놈은 아버지가 땅 남겨놓고 돌아가시는 바람에 월세방 살다 아파트 사고, 길길거리는 중고차 내다버리고 오피러스 뽑았다는데...)
그렇다고 우리 아버지가 왜 유산 하나 안남기셨겠는가.
지난 4월 5일 식목, 청명, 한식에 고향에 내려갔다가 마침 아버지가 쓰시던 확대경이 있길래 챙겨가지고 왔다.
아버지는 뭐든지 수집하고 보관하는 걸 즐기시는 분(1105코드)이라 약케이스 같은 것도 버리지 않고 언제 구입한 건지 내력을 다 적어놓곤 하셨다. 문병 온 사람이 용돈이라도 주고가면 반드시 수첩에 아무개가 아무날 얼마 줌, 이렇게 적어놓는 분이다. 돌아가시기 두어 달 전이 설날이었는데 그때 깨끗한 만원 짜리 지폐를 일부러 구해 10만원을 드렸는데, 아버지는 누우신 채 돈을 세보더니 수첩을 찾아 딱 적어놓으셨다. 그 돈 쓰지도 못하셨다.
이 무렵 아버지가 앓던 병명이 다양한 만큼 약도 다양해 큰 것부터 작은 것까지 올망졸망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아버지는 깨알같이 적혀 있는 설명문을 다 읽어보는 취미가 있었다. 모든 전자제품 매뉴얼도 아버지 수납장에 다 들어가 있고, 심심하실 때 아버지 독서용이 되곤 했다. 그러자면 이 확대경이 요긴한 것이다.
이번에 내가 가져온 확대경 말고도 더 큰 게 있었는데, 그렇게 하여 아버지 사물함(머리맡에 늘 있어야만 하는 좌우 15단짜리 사무용 수납장)에 서너 개는 있었던 것같다.
아버지 유품 중에서 아들 다섯이 각자 기념이 될만한 것들을 다 챙겨갔는데, 난 아버지가 쓰시던 휴대용 다용도칼을 갖다가 자동차 글로브박스에 넣어두었다. 차를 타고다니다 갑자기 쓸 일이 생길 때 요긴하게, 그리고 아버지 생각하며 꺼내든다. 돋보기 안경이 몇 점 있어 챙겨보려 했는데 난 근시라서 소용이 없어 그냥 두었다. 그러다가 9년만에 아무도 안가져가 뒹굴던 확대경을 가져온 것이다.
난 고등학교 때부터 근시용 안경을 쓰기 시작해 아직 벗지 못하고 있다. 겁이 나서 라식 수술은 생각도 못하고, 그 수술 해봤자 돋보기 또 써야 하면 그게 그거려니 해서 내내 안경을 쓰고 생활했다. 그런데 쉰이 넘으면서 원시가 오기 시작하더니 이젠 가까이 있는 글을 읽을 때는 꼭 안경을 벗어야 한다. 근시는 나이를 먹거나말거나 가까이 있는 글은 잘 읽을 수 있는데, 안경을 쓰면 도리어 흐릿해지기 때문이다.
가장 답답한 게 강연할 때인데, 기껏 강의안을 준비해 가도 그걸 보려면 안경을 벗어야 하기 때문에 썼다벗었다하는 게 창피해 기어이 외워서 하거나 얼버무리고 만다. 안경을 벗으면 사람들이 안보이니 내가 더 답답하여 어쩌는 수가 없다.
할 수없이 늙음의 상징이라는, 저건 정말 하지 말아야지 하던 다초점렌즈 안경을 주문했다. 강연 때 실수하지 않으려면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러고도 이 확대경을 꼭 가지고 다닐 참이다. 요즘 제품들은 20대나 30대 한참 눈 좋은 아이들이 디자인해서 그런지, 아님 소비자 골탕먹이려고 일부러 그러는지 글씨가 5포인트 정도밖에 안되는 게 많다. 환장한다. 안경을 벗어도 안보인다. 물건을 앞으로 당겼다 뒤로 밀었다 해도 안보인다. 적어도 50 넘은 인간들은 보지 말란 얘긴가 보다.
그러나 포기할 순 없다. 이 확대경을 들이대면 꼼짝 없이 다 보인다. 샴퓨, 화장품, 약병, 전자제품 매뉴얼, 전자제품 부속품에 적혀 있는 작은 표시,카드에 적힌 글씨, 손바닥에 낀 가시 등이 제대로 보인다. 이렇게 다 사는 수가 있다. 아버지가 돋보기 쓰고, 확대경 들이대던 게 엊그제 같은데 내가 그러고 앉아 있으니 참 우습다. 아버지 목덜미에 나 있던 기미가 내 목덜미에도 오르니 더 우습다. 서재 책꽂이에 사진으로 계신 아버지가 허허 웃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같다.
- 인생이 그런 거지 뭐 벌 거 있겠느냐? 나라고 이렇게 될 줄 알았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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